신체절단과 보철에 숨겨진 사연
본문
보철의 역사를 짚어보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공통된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시대를 지나오면서 하나 둘씩 기능이 추가되어 안정적이고 실제 팔다리와 같은 기능과 외관을 지향하며 발달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찌 보면 장애우에 대한 애정의 발로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좀더 인간다운 삶을 실현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특히 전쟁으로부터 보철의 중요성과 함께 보철기술의 낙후성을 깨닫고 산학연이 역동적으로 어울어져 세계 최고의 기술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미국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호에서 선사시대부터 14세기까지 보철의 역사에 얽힌 장애우들의 숨은 사연을 엿보았다. 이번 달에는 그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르네상스 : 개화의 시대 (1,400-1,600)
르네상스는 그리스와 로마에 의해 발아되었던 과학과 의료적 관습을 계승하여 부흥시킨 시기였다. 유럽국가들의 통치체제가 중앙집권화되면서 도시와 대학들이 생겨났고 그곳에서 과학과 예술이 자라나고 기록되었다.
독일의 직업기사인 고츠 폰 베를리힌겐(1480-1562)은 독일에서는 홍길동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고츠는 압제자들로부터 소작농들을 보호하는 로빈후드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1508년 란트슈트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우군의 캐논 포탄에 칼을 맞아 오른팔을 잃었다. 전투에서 철제의수를 사용했던 또 다른 전사에 관해서 들은 고츠는 의수 두 개를 제작했는데 그것은 놀라운 만치 앞선 보철의 사례였고 기계적인 명품이었다. 각 관절 부위는 견고한 의수로 세팅되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릴리스(해제장치)와 스프링에 의해서 이완되었다.
또한 내전과 외전(손바닥을 위로 향하거나 뒤집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몸체에 힘은 없었지만, 기능적으로 뛰어난 시도로 알려지고 있다. 기능적인 보철의 또 다른 사례는 1858년 라인강에서 건져진 1400년대에 제작된 알트루핀 손으로 이는 지금도 현전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이탈리아 한 외과의사는 아시아 여행을 하고 양쪽 팔이 절단된 사내가 모자를 벗고, 지갑을 열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묘기를 부렸다고 기록했다. 그 남자는 1512년 알제리 부지에서 터어키 슐탄(군주)을 위해 스페인인들과 싸웠던 해군제독 바바로사에게 철제 왼쪽 의수를 만들어 주었다고 전한다.
16세기는 근대의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근대외과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암브로스 파레(1510-1590)였다. 그는 프랑스 국왕의 시의를 4대에 걸쳐 지냈고 전유럽에 명성을 떨친 만큼 얽힌 일화도 많다. 당시에는 이발사가 의사를 겸할 만큼 의사가 천대를 받는 시대였다. 그도 젊은시절 프랑스 군대의 이발사겸 의사로 전장을 다니며 병사들을 치료했는데 당시의 절단수술법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발사는 환자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후 톱, 망치 따위의 무지막지한 연장을 들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절단했다.
출혈을 멈추는 방법은 시뻘건 인두로 지지기였다. 자르는데 30초, 작업총시간 3분 내에 해치워야 했다. 당연히 마취는 없었다. 19세기까지는 그랬다.
전쟁터 부상자는 더 끔찍해 총상 부위에 끓는 기름을 부어 소독을 했다. 운이 좋으면 살았다. 파레 역시 이 방법을 썼는데 어느날인가는 부상자가 많아 기름이 모두 동나고 말았다.
파레는 급한대로 달걀 노른자나 식물성 기름 등을 아무렇게나 섞어 약이라고 속이고 상처에 발랐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셈이다. 파레는 부작용이라도 나서 집단 사망이라도 할까 두려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웬걸 환자들은 상처가 곪지도 않았고, 통증도 없었다. 이 엉뚱한 시도가 바로 고약의 발명이었다. 뭐니뭐니해도 파레의 최대 업적은 출혈을 막는 방법으로 소작술 대신에 혈관을 묶어버리는 소위 혈관결찰술의 개발이었다.
파레는 보철학에도 명성을 떨쳐 틀니, 의안, 의족 등 다양한 보철을 개발했다. 특히 기본 보철기능의 지식을 보여주는 상하반신 말단보철을 발명했는데 지금 보아도 놀랄만하다.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을 위해 제작된 ‘르 페티 로랜’이란 별칭이 붙은 의수는 스프링과 손잡이에 의해 작동했다. 파레는 무릎을 구부릴 수 있는 의족(Peg Leg)과 발보철로 되어 있는 무릎상부보철도 발명했는데 그것은 말의 자세를 고치고 마구를 조정할 수 있었다. 무릎자물쇠에 의한 제어와 그밖에 다른 기계공학적인 모습들은 오늘날도 통용되고 있다.
보철술의 발전 : 1,600년에서 1800년대까지
지혈대의 발명과 마취, 회복제, 혈액응고지혈제, 그리고 질병과 싸우는 약제들은 근대의학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생명을 살리려고 최후까지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단수술을 용인된 치유대책으로 만들었다. 외과의사는 남겨진 팔다리의 기능을 더 낫게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되었고 그에 따라 보철제작자들이 더욱 진보된 보철을 만들게 되었다.
1600년대 동안 발달한 보철술의 대부분은 단지 갑옷과 투구 형태의 장치가 좀더 일찍이 정교해졌을 뿐이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크고 무거웠지만 점차 더 많은 기능을 얻어갔다. 당시의 많은 보철들은 이탈리아 스티베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많은 기능주의 미학의 희생을 포기한 덕에 좀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남북전쟁 : 기업가 시대
남북전쟁(미국시민전쟁 ; 1861-1865)은 현대전쟁의 첫 사례로 기록된다. 전후 산업혁명은 기업가 시대를 가져왔는데 이의 도화선은 다름아닌 보철산업이었다. 남북전쟁은 무수히 많은 절단장애우를 낳았다.(미연방군대만 3만 명). 이에 정부차원에서 ‘위대한 남북전쟁 기부금’을 조성해 수족을 잃은 퇴역군인들에게 보철을 제공했다. 엄청난 임시청구들이 쏟아졌고 이는 사업가들의 구미를 돋구었고 자본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도 아직은 현실적으로 조직화된 보철 규정은 아무것도 궁리되지 않았다. 이 당시 보철산업과 관련해 역사에 획을 그은 이들은 돌팔이나 다름없었던 보철제작자들이었다.
한편, 정부예산이 투여된 이 시기 동안에 주목할 일은 대단히 많은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1917년까지 대략 2백개의 클리닉과 2천명의 숙련된 인력이 양성되었고 이 때의 많은 임시청구들로 다양한 보철들이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제조업자들은 그 자신이 절단장애우였고 그들의 발명이 치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들 자신들과 선택된 환자집단에만 맞추어 일을 했다.
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도약
보철의 역사에 있어 외과의사와 보철제작자들의 관계는 때로는 협력자였고 때로는 앙숙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보철제작자들은 단지 장사꾼에 불과했다. 1차대전이 발발할 즈음 보철제작자들은 탐욕과 자부심만 있었을 뿐 환자들의 안위나 요구에는 무관심한 잡다한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은 앰뷸런스 추적을 일삼는 소위 ‘신체 절단자를 약탈하는 사기꾼 부류’ 들이었기 때문에 외과의사들 은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대 세계대전을 자신들의 무대로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1914-18) 미국인 보철제작자들은 매우 독립적이고, 경쟁적인 집단이었다. 자기네들끼리는 물론 외과의사들과 좀처럼 함께 일하는 법이 없었다.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절단상해자(4천4백3명)는 영국(4만2천명)과 유럽군(십만명)보다 훨씬 적었다.
이는 미국이 절단자들에 대한 보호에 무관심했음을 의미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의 보철술은 유럽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었다. 1차대전을 통해 유럽 보철제작자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있었기에 미국의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렸다.
이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 육군군의대장은 보철기술과 발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미국 보철 제작자들을 워싱턴 D.C로 소집했다. 이 회합으로부터 현재의 미국 보장구.보철 협회 (AOPA)가 생겨났다. 이 발전에 대해 역사가들은 ‘역사상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보철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포럼을 통해 보철제작자들은 윤리적인 규범, 과학적인 프로그램, 그리고 교육프로그램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다른 보건 전문가들과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차 대전과 공황 때에 상대적으로 절단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에 보철술은 2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는 거의 발전을 하지 못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진보된 기술은 여전히 미국에 전파되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미국인 절단 상해자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상이군인들은 당시의 보철기술(1800년대 이후 모든 것이 변함없이 그대로였다)이 불충분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미 육군군의대장 노말 커크는 보철의 기술적 수준을 조사할 것을 국립과학아카데미에 요청했다. 본래 약간의 디자인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으나 1946년 엔지니어와 외과의사 팀들이 유럽으로 시찰을 갔을 때 미국이 한참 멀리 뒤쳐져 있음이 명백해졌다.
이 조사는 보철학에 획기적인 도약을 가져왔다. 퇴역군인청은 인공의수족 프로그램을 수행했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상지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같은 무수한 연구소가 설립되어 무장된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그밖에 산학연 합동으로 유사한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1947년 이들 새로운 기술과 구조에 대한 교육세미나들이 시작되었고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에 보철조정교육과정이 설치되었다.
1952년 UCLA는 1953년에서 1954년까지 지역별로 6주 단기 코스 교육을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여러 대학에 관련학과와 보철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비로소 보철제작자들과 외과의사들의 훌륭한 협력체계가 이루어져 보철기술은 혁신을 거듭했다. 한편, 이 즈음에 세계에 충격을 던져준 소위 ‘탈리도마이드 비극’은 보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해표지증(구원이를 연상하면 됨) 아동을 위해 독일·영국·스웨덴 등에서 이산화탄소압·전기·유압(油壓)을 외부 동력원으로 하는 의수족을 개발하여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보철은 더욱 기능적이고 에너지가 축적된 모습으로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앞으로의 의수족의 모습은 현재의 의수족 대신에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팔다리가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스키븐 호킹의 말마따나 21세기에는 아예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