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나는 가산공동체에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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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의 생음악보다는 웨이브로 편집된 음악을 듣고, 얼굴을 쳐다보고 대화하기보다는 채팅으로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산과 들로 소풍을 가기보다는 사이버 쇼핑몰을 배회하며 가상구매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컴퓨터가 하나의 통신망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초사회적인 앨도라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곳이 바로 아무도 살지 않는 비사회적 거주 공간인 ‘가상 공동체(virtual community)’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생각하는 법, 물건 사는 법, 대화하는 법,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달리한다. 낡은 세대로서는 성능 좋은 ‘속도완충기’를 달지 않고는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사람과 세상에 대한 표상은 점점 더 낯설어지고 있다.
이런 신세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든 전체주의자들이 상상의 자유를 두려워했다는 귀납추리를 통해, 정보사회의 미래에 대해 불길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심정적 전체주의자들’이라고 공격한다. 그랬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든 동화책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므로 이들은 ‘젊은이들이여, 책을 덮고 가상 공동체에 접속하라, 접속하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짜 파시스트’일까? 상상력처럼 변화무쌍하고 방대한 것의 생존이 과학기술의 성공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무한정한 ‘상상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자들일까?
그러나 가상 현실은 무의식적 환상의 투사이다. 이는 현실로부터 환상에로 무제한적인 퇴행인 나르시시즘을 부추긴다. 욕망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를 정신병의 중요한 특징으로 본다면, “가상 현실은 전형적인 정신병적 공간”이다. 버추얼 스페이스에서 타자의 실종은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도 없고, 도덕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게 된다. 타자에 대한 도덕적 신뢰는 연속적인 정체성에 의한 상호관계 때문인데, 수시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호적 존재(아이디)는 우리에게 수상한 자로 다가온다.
가상 현실의 거주자들은 타자의 실질적 독립적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진입하는 상호의존과 책임의 관계를 거부하기 때문에, 반사회적, 반도덕적이 된다. ‘부유하는 정체성’은 정신분열적 혹은 나르시시스적 영역을 방황하며 탈신체화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가상 현실의 ‘탈타자화된 자아’는 일종의 자폐증이며, 컴섹스를 통한 ‘디지털 오르가슴’은 현실 세계의 욕구불만의 투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 실제적 삶의 공간의 윤리는 치명적이 된다.
세기말 IMF사태라는 자존심 상하는 절망을 경험한 정부는 해가 바뀌자마자 기업과 매체를 동원하여 한국이 정보·지식중심사회 - 혹자는 이를 ‘지본주의(知本主義) 사회’라고 재빠르게 작명했다 - 의 선구자일 수 있으며, 이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구호는 과거 신분사회에서 양반질 못해본 사람들의 ‘천박한 열정과 분노’는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불순하게 의심하는 이유는 정보사회의 신봉자들이 ‘Y2K’를 고리로 한 협박, 공갈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일년 내내 ‘Y2K’라는 수상한 기호로 우리를 속였기 때문이다. 21세기 1월이 한참 지난 후에 비로소 그것이 목표는 다를지 몰라도 히틀러와 힘믈러-H.Himmuler. 히틀러 시대의 전쟁선전 담당 비서-의 ‘광기’와 동일한 형식이었음을 알았다. 정보·통신기술의 찬양과 인터네트 기업에 대한 광적인 확신은 결국에 가서는 이성적 주체인 개인들을 철저하게 분절화시켜 놓은 채, 없었던 일로 될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 고전물리학의 잣대로, 모던적 인간 개념을 견지한 채, 21세기는 지식·정보가 지배할 것이며,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한국식 억지" 이다.
구승희/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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