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장애우가 열어갈 새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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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 정명숙 선생이 춤을 춘다. 춤사위에 따라 너울거리는 날개옷.
날개옷은 봄바람을 탄 실버들처럼 하느적거리기도 하고, 돌개바람에 휘몰린 꽃구름처럼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옥빛 치맛바람을 휘잡고 빙그르르 도는 춤사위는 말 그대로 선녀가 나르는 모습이다. 내가 정명숙 선생의 살풀이춤을 먼발치로 본 지가 언제인지는 기억도 삼삼한데 이 분을 가까이서 만난 것은 한창 억수비가 쏟아지던 지난 여름 장마철이었다.
지난 여름, 청음회관이 내가 모 잡지의 청탁으로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 취재 다니는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청각장애우 김영민 씨가 정명숙 선생 밑에서 살풀이춤을 배우고 있으니 취재해 보라는 것이었다.
춤이라면 소리와 어울려 추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장단소리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우가 어떻게 인간문화재 정명숙(무형문화재 제97호) 선생의 그 어려운 살풀이춤을 배우려 하였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억수비를 무릅쓰고 달려갔던 것이다.
김영민은 젖먹이 때 청각을 잃어 집안에서는 이 귀여운 고명딸을 어떻게든 운보같은 대가로 길러내겠다고 아잇적부터 그림을 가르쳐 직업화가로 키워냈지만 시집 보냈더니 엉뚱하게도 춤바람(?)이 들더란다. 별종도 다 있구나 싶어 정명숙 춤연구소에 들어서니 아낙네 너덧이 녹음기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옆사람 몸놀림을 연신 곁눈질하며 춤사위를 익히는 귀염성 덩어리같은 이가 김영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겠더라.
김영민은 몇 마당 춤을 추더니 부리나케 춤옷을 벗어던지고 서둘러 연구소를 나선다. 집에 바쁜 일이 있단다. 길음동 언덕길을 질벅질벅 걸어내려 버스를 타고 돈암동 점쟁이마을 앞에서 꼬부라지도니 아리랑고개를 꼬불꼬불 넘는다. 그의 집은 아리랑고개에서도 한참 올라간 정릉2동 산동네였고, 바쁘다는 일은 팔 그림을 그리기란다.
그의 그림은 주로 일본이나 미국으로 수출하는 ‘사포화’라는데 처음 듣는 얘기라 사포화가 뭐냐니까 목공들이 쓰는 사포(沙布)를 가지고 와 보인다. 그러나 IMF 바람에 요즘은 고작 20만원쯤 팔리고 이 돈에 남편(그도 2급 청각장애우) 월급 60만원을 얹으면 80만원, 이것이 한 달 수입 모두라면서 웃는 김영민의 얼굴은, 가난도 장애를 이기지 못한다는 넉살스러운 밝음으로 환하다.
김영민 씨의 밝고 활달한 성격은 자란 환경 때문인 듯. 여성장애우는 구박받기 일쑤인데 그의 부모는 사랑으로 감싸며 딸을 키웠던 모양이다. 비장애아를 이렇게 키우면 사람 버려놓게 되지만 장애가 교만심과 우월감을 막고 긍정적 성격을 형성시켜 사회를 밝게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이런 천품이 아니었다면 단돈 20만원이라도 벌이가 되는 일을 하지 어떻게 돈 쓰이는 춤 따위를 배우겠다고 나돌아 다니겠나?
강릉 외진 바닷가에서 자폐아보육원을 취재한 일이 있는데, 주로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맡겨진다고 한다. 이 아이들은 거리에 버려진 충격으로 자폐증을 가져 괴상한 버릇이 나타나는 증상으로 돌보기가 매우 어렵단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장애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곧 장애극복은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말이다.
장애는 일차적으로 당사자 문제이지만 환경적 영향이 중복장애를 가져오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장애아는 활동범위에 제약을 받게 되어 성격이 소극·소심화하기 쉬운 터에 주의, 특히 가정에서 귀찮고 성가신 존재라고 구박하게 되면 그나마 찾아보려는 좁은 외길마저 막는 결과를 낳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갈피를 못 잡는 정신적 황폐현상을 나타낸다.
이런 곁에서, 어린이의 성장에 부모의 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케 됨으로 장애아의 난관극복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한 가정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아이가 자라면 집으로부터 사회라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장애우든 비장애우든 사회란 낯설다. 낯선 이웃, 낯선 거리, 낯선 학교….
이런 낯선 환경은 소심한 비장애아에게도 자폐증을 가져온다. 하물며 장애아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바깥세상을 밝게 보는 환경친화적인 성품을 기르는 길이 장애극복을 돕는 가장 따뜻한 사랑일 것이다.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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