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 장애우, 여성,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 화가 > 대학생 기자단


프리다 칼로 - 장애우, 여성,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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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던 이도 드물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장애의 고통 속에 평생을 살아야 했으며,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평생 스탈린을 신봉했던 골수 공산주의자였으며 페미니스트로 상징된다.

무엇보다 프리다 칼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화가가 소외된 미술사 속에서 족적을 명백히 남긴 위대한 화가로서 실제 장애우로서 여성으로서 받아야 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성으로서 흔치 않은 배경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인기는 대중적으로도 지대한 그 일생이 영화나 노래로 만들어졌고 세계적인 패션잡지인 "보그"에는 표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일당 5만원의 건설 노동자로 구성된 국내 인디밴드는 아예 팀의 이름을 "프리다 칼로"로 명명했다. 칼로의 그림도 인기가 높아 자화상 중 하나는 89년 5월 뉴욕에서 1백 50만 달러에 팔렸고, 1995년 에는 3백 50만 달러에 팔려 가장 비싼 라틴 아메리카 미술품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프리다 칼로는 대다수의 확가 그렇듯이 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았던 화가는 아니었다.

한때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피카소와 같은 위대한 화가로부터 칭송을 들을만큼 유럽에서는 남편보다 더 잘 알려졌지만 54년 사망이래 70년대 이전까지 20년 동안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 디에고 라베라의 아내 정도로 여겨졌을 뿐 정작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철저히 잊혀져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70년대 들어 중요한 페미니스트 작가로 부각되면서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1984년에는 그의 작품들이 멕시코 국보로 지정돼 국내 반출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역시 신체장애였다. 독일인이었던 아버지가 붙여준 "프리다"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지만 그녀는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결코 평화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


멕시코 혁명 발발 직전인 1907년 7월 멕시코시티 코이오칸에서 태어난 칼로는 6세 때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와 발이 뒤틀리는 장애를 입었고 그로 인해 동네 아이들로부터 "목발 프리다"라는 놀림을 당해야 했다.

칼로의 장애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1925년 9월 17일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버스가 시내전차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나 칼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사고 순간 손잡이가 부러져 긴 쇠막대가 프리다의 복부를 찌르고 왼쪽 옆구리로 들어갔으며 자궁에 관통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척추 뒷부분 요추 부위 세 곳이 부러졌고, 쇄골과 세 번째, 다섯 번째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오른쪽 다리는 일곱 조각으로 부서졌고 오른 발은 탈구되고 뭉개졌다. 또한 외쪽어깨 관절이 빠지고 골반 세 곳이 부러졌다. 의사들은 회생가능성에 의문을 가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칼로는 이때부터 척추와 오른다리의 통증으로 시달려야 했고 평생 동안 30여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고 세 차례에 걸쳐 유산을 한다. 이 경험들은 칼로의 인생전반에 영향을 끼쳐 한때 꿈꾸던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으며 이러한 역점은 그대로 작품세계에 반영되었다.

칼로는 교통사고 후 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 한 달 동안 지루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놓았던 그림을 시작했다. 퇴원하고 나서는 거울을 주문해 침대 밑에 담아 놓고 거기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가 이때부터 줄곧 천착한 작품세계는 자화상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의 심리를 관찰하고 표현하려했다. "나는 나를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내 그림의 주제는 바로 나다."

칼로에게 또 다른 영향력을 끼친 것은 남편 리베라였다. 칼로는 사고 이전 국립예비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1921년 그곳에서 벽화작업 중이던 리베라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때 리베라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선구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칼로는 리벨라의 예술 혼에 이내 빠져버렸고 좋은 동지가 된다. 결국 1929년 칼로는 리베라와 결혼을 한다. 리베라로서는 3번째 결혼이었다.

그러나 칼로 스스로가 디에고와의 만남을 전차사고에 이은 일생 일대의 심각한 사고였다고 토로했을 만틈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리베라는 여기 모델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렸으며 칼로는 세번 이상의 유산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고통에 더해 장애를 빌미로 남편으로부터 모진 굴욕까지 당했던 것에 몹시 번민하여 담배와 술에 빠져 살았다.

칼로는 리베라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여러 남성과 염문을 뿌렸으며 심지어는 동성연애까지 즐겼다. 특히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와의 짧은 사랑은 아주 유명하다. 결국 리베라가 칼로의 친동생인 크리스티나와 스캔들을 일으킴으로써 칼로는 1939년 이혼선언을 한다. 1년 후 재결합하지만 리베라의 못된 버릇은 여전했다. 칼로는 체념 상태에 빠지고 이러한 심경변화를 역시 그림으로 반영했다.

이렇게 악연이었던 칼로는 1954년 폐경색 증세로 사망했고 3년뒤 리베라는 자신의 72세 생일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칼로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칼로의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으며 사랑에 있어서나 정치적 신념에서 늘 당당했다. 또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의상과 엑세서리를 착용하였으며 고통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반듯한 자세를 잃지 않았음에도 사회관습은 완강히 거부했다. 바로 이와 같은 면모 때문에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전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은 그에 열광하고 있다.

 

아르텍과 마야에 뿌리를 둔 프리다칼로의 작품 세계

 

칼로는 멕시코 미술의 전통인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남편 리벨라와 공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 리베라가 대형 벽화 작품을 통해서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면, 칼로는 작은 규모의 주로 자화상을 통해 개인적이고 보련적인 여성의 고통, 즉 여성이자 장애우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내면을 담아냈다. 칼로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감을 바탕으로 초현실주의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부러진 기둥(1944)은 가장 놀라운 자화상으로 고통에 대한 감정이 가장 크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칼로는 전신에 이어지는 끔찍한 상처를 입은 채 나신으로 서 있다. 심하게 손상받은 척추를 여기에서는 부스러진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칼로는 온몸에 지지장치를 부착한 상태로 자세를 유지시킬 수 있었는데 어깨에서부터 골반까지 이 장치를 적용시켜 간신히 분해된 몸을 결합해 지탱할 수 있었다.

오른다리와 몸통 전체의 피부를 꿰뜷고 있는 몸은 신체적 고통을 묘사하고 있고 못의 기가 각기 다르게 묘사된 것은 통증의 정도가 다름을 나타낸다. 하반신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특히 오른다리의 시트 위에 박힌 못들은 6세 때 소아마비 발병으로 뒤틀리고 약해진 다리로 말미암아 경험해야 했던 고통을 암시한다. 고통의 또 다른 표식은 국가와 체념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얼굴표정과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빰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배경으로 그려진 텅 빈 풍경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겪어야 했던 체험들이 온통 정신적인 고통과 슬픔 소외 고독으로 채워졌음을 암시한다.

다비셔(1994)는 이를 거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 결박, 장애와 신체적인 방해의 이미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칼로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가슴, 그리고 엉덩이에서 허리까지 완벽한 비례로 그린 전형적인 작품이란 사실이다.

즉 신체의 내부는 비록 부서졌지만 신체 외적으로 표출되는 자신의 성적이고 관능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칼로는 리베라가 디트로이트예술협회에서 벽화스리즈 작업을 하게 됨에 따라 디트로이트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버스사고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했고 합병증이 발생했다.

이때의 경험을 <헨리포드병원>(1932)이라는 작품에 담겨있다. 여기에 나타난 칼로의 모습은 유산의 고통을 넘어서 아이를 갖지 못함에 대한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작품에서 그것을 탯줄과 줄 혹은 뿌리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작은 사슴>(1946)은 척추작용이 되돌아오기 직전에 뉴욕에서 완성됐다. 여기에서 프리다는 몸에 화살이 꽂히고 몸과 옆구리에서 출혈을 하고 있는 작은 사슴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아주 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더 나아가 자시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배경의 숲은 고독감, 황폐함 혹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칼로는 외과수술이 지속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통증을 성공적으로 경감시킨 상태에서 희망에 가득 차 이 그림을 친구에게 보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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