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의 여자 여자 여자] 내 소년기에 아름다운 사랑,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대학생 기자단


[이영호의 여자 여자 여자] 내 소년기에 아름다운 사랑,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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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일 학년 이 학기가 시작되고 국어강사로 여 선생님이 부임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는 내가 만난 어떤 여학생보다도 훨씬 이지적이었고 매력적이었다. 단 한 명의 여선생밖에 없었으므로 그녀는 양호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여드름이 더  만발한 녀석들은 여선생이 들어오면 공연히 체육복을 미처 갈아입지 못한 것처럼 유치한 사내 흉내를 내곤 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양호실로 갔다. 손에는 내가 읽었던 모든 책 속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적힌 도서목록 카드가  들려 있었다. 예를 들면,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였다고 하여도 사실은 그에 의해 변하여진 그 사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구절들이었다. 그걸 주면서 그녀에게 읽어보고 조언을 해달라고 말하곤 교실로 돌아왔다. 내가 갖고 있는 어줍잖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노릇이지만 당시는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주번을 시켜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조언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두 다 현자들의 명언들이고 인생을 통찰하고 있는 글들인데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이런 글에 관하여 함께 얘기할 친구가 없어서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그런 얘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좋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며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날은 운이 없게도 그녀가 남자 선생님들과 함께 퇴근하는 바람에 그냥 그녀와 다른 선생님들의 뒤를 망연히 쫓아 걸었다.
  그래도 그녀가 내가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미안한 표정으로 뒤돌아  눈길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는 내 제안을 무시하지 않았고 적어도 남자 선생님들에게 "깜찍한 녀석"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영어회화클럽의 회합에서도 여학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떤 녀석들은 그녀와 산행을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그녀가 저렇게 무지하고 유치한 녀석들과 북한산에 놀러갈 수 있는가? 그녀가 갑자기 경박하게 보여 며칠동안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귀가했다.
  그녀는 나를 찾았다. 그리고 내가 왜 자신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결국 녀석들과 찍은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것보다 더 슬픈 소식이 있다고 하며 자신이 다음 학기에는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겨우 한 학기만을 가르치고 문리대 어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문리대 앞까지 걸어가서 그녀를 만났다. 종로 5가 빵집에서 그녀를 계속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일 년이 지났다. 삼 학년이 되어서 그녀에게 불문과를 갈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녀는 미국으로 특수교육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그녀는 미국에 도착해서 편지를 보냈다. 60년대 말의 자유로운 미국이 대학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하며 내가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와의 편지왕래는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할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 문장의 끝을 "오"로 끝맺었다. 그 작은 변화를 그녀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겠다는 기표로 받아들였다.
  몇 년이 지났다. 그녀가 귀국해서 종암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찔레꽃을 보러 오라고 했을 때 나는 몹시 망설였다. 이미 내 또래 계집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된 이유도 있었지만 이류대학에 다니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나는 청춘의 열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내 소년기의 아름다운 사랑은 끝이 났다.
  그녀는 어느 특수학교의 장이 되어 있을 것인데 도저히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보고 싶은 내 소년기의 아름다운 사랑인 정경숙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

 

글/ 이영호 (영화인, 함께걸음 편집자문위원)

작성자이영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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