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기행] ‘나’없이 ‘나’답게
본문
‘집에나 가지’, ‘술이나 마시지’, ‘얘기나 하지’, ‘노래방이나 가지’, ‘모임에 얼굴이나 비추지, 뭐’, ‘누워서 TV나 볼까?’........
일상 생활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보통 언어들이지만, 위의 예문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모든 문장에 ‘....나’라는 글자가 하나씩 추가되어 있다. 들어갈 필요가 없는 그 한글자로 인해 나타나는 다음 반응의 여파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굳이 여기에 열거할 필요 없으리라 생각한다.
왜 우리는 별 의미도 없는 그 글자를 입에 담으며 살고 있을까? 당연히 무언가를 하고 싶으면서도, 마치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한다는 억지와 자포자기의 성향을 내비치는 이유는 무엇을가?
‘영화나 보자’, ‘밥이나 먹자’, 를 ‘영화를 보자’, ‘같이 식사를 할까?’로 바꿔 얘기하면 얼마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되는가. 단순한 어투의 차이겠지만, 그 이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
우리는 ‘...나’를 붙여 사용함으로써 주체적 자아인 ‘나’ 자신을 읽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내기 원치 않는 일을 일부러 한다는 핑계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같은 글자 ‘나’의 차이는 이렇게 큰 것이다. 우리는 그 한글자를 붙일 때마다 자기 자신을 한 조각씩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된다.
‘친구한테 전화나 해서 쇼핑이나 가지고 얘기나 해 볼까?’
이 한 줄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세 번이나 자아를 상실한다. 그 다음에 이어질 행동은 지레짐작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전화를 한 뒤 남는 것 없는 신변잡기를 떠들어 댈 것이며, 만나서 돌아보는 쇼핑에선 필요 이상의 충동구매가 뒤따르게 될 테고, 카페나 식사자리 같은 곳에 앉아 시간을 덧없이 소비하는 언어들로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은 저축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세계는 나 없이도 충분히 돌아가는 스스로의 법칙을 지니고 있다.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애를 써도 모자랄 인생에서, 한 움큼씩 뒤로 물러서는 누를 범하는 것이 하찮은 언어 한 글자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는 흔히 행하는 언어 사용에서부터 사소한 실수를 반복한다.
‘역전 앞에서 만나자’ 는 얘기부터, 야구 중계를 통해 들려오는 ‘아, 타구가 라인 선 밖으로 나갔습니다’ 등의 표현은 무감가가하게 넘어갈 만큼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이다. 이슬람교에서 모신다고 하지만 ‘알라’자체가 ‘신’이라는 뜻임을 지적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세계적인 음료인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자기 언어로 ‘可口可樂’, ‘百차可樂’ 이라 표현한다고 들었다. 같은 외국어를 옮기더라도 낙천적이고 대국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그들의 방식을 보며 나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5평도 안 되는 좁은 가게를 평생 경영하며 아껴 모든 돈으로 궁궐 같은 집을 사서 여생을 편히 보낸다는 그들의 사고방식. 사상누각 위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던 우리의 현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가장 작은 일부터 오류가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는 국민성의 표현이고 개개인의 인격을 나타내며, 문화를 건설하고 지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어 웅대한 중국의 문화를 마들었고, 독일어는 게르만 정신을 엮어냈다.
일본어는 일본인만의 독특한 삶을 개척했고, 영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만국 공통어로 기치를 내걸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언어가 있다. 가꾸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변형해서 우리답지 않은 사고방식을 이끌어 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청소년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은어는 PC통신이니 뭐니 하는 이유를 둘러대기에 늦었을 만큼 심각한 벽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나마 ‘왕따’처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용어를 제외한다면, 욕설을 뺀 상태에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주입식․강압식 교육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기싫지만 ‘에라, 공부나 하자’고 자기 뜻을 접었던 오랜 풍습이 ‘TV나 볼까?’, ‘잠이나 자자’, ‘커피나 마실까?’, ‘오락이나 하지’, ‘다음 주에나 할 거야’ 등의 문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해도 크게 어긋날 건 없을 듯 싶다.
실상 가장 중요한 일을 하찮게 표현함으로써, 그 일의 정당성과 값어치를 추락시키고 자신의 생산 및 발전 의욕을 스스로 반감시켜 버리는 것. 우리는 완전한 진지함에 대한 순수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딜레마를 형성한다.
늘 부실 공사, 뇌물수수, 복지부동, 대충대충주의에 시달려 오면서도, 우리는 같은 과오를 똑같이 반복하는 전철(前轍) 속에 살고 있다.
어느 신도시를 건설했던 공사 담당자들에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 아파트를 공짜로 준다 해도 자신은 절대 입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바닷모래를 사용해 시멘트를 채웠으니 철근이 부식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벌써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뻔히 아는데, 뭣하러 그 아파트에 목숨 걸고 사느냐는 얘기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졌다.
자기가 만든 아파트를 불신하는 사회. 오래 전 일이지만, 자기 회사 빵은 자기 아이들한테 절대 먹이지 않는다는 모 제과 담당자의 웃지 못할 답변.
돼지고기가 소고기로 둔갑하는 햄버거. 영지버섯이 없는 영지드링크. 오로지 소비자의 잘못 뿐이라는 자동차 급발진 사고의 책임자 대응. 입만 뻥긋대고 있어도 인기를 얻는 가수들. 남의 것을 그대로 배끼고도 태연한 예술계의 몇몇 담당자들. ‘정치’하는 것을 볼 수 없는 정치인. 학살자 집단이 민주투사인 양 활개치는 사회. 무허가 가건물에 어린이들을 몰아넣어 희생시키고도 발뺌으로 일관하는 관료들. 나라를 말아먹고도 끄덕하지 않는 재벌들…….
붕어빵처럼 모양만 같으면 해결되는 껍데기의 사회가 되어버린 원인은,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하나하나의 무관심이 모이고 모여 곪아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며 애써 회피했던 것들이 한데 모여서, 정말 어떻게 될지를 모를 수밖에 없는 사회로 바뀌어져 버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생존하고 있고, 언제 어디에서 새로운 통곡 소리와 한맺힘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욕이나 먹어라’며 비난하는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돈이나 버는 게 최고’인 사회 분위기 속에, 언제까지 열심히 ‘일이나 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땅에 떨어진 도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을 위해 ‘종교 생활에나 충실’해야 하는가. 정의를 부르짖는다는 사회 집단들은, 언제까지 실천없는 ‘대안이나’ 내세우며 목소리만 높이고 있을 것인가.
무슨 캠페인을 시작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꼭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스스로가 ‘…나’속에 도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나’를 지니고 살고 있는지를.
‘…나’없이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종교인답게, 정치인답게, 경제인답게, 언론인답게, 군인답게, 문화예술인답게, 공무원답게, 내외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자유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타인’으로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일이다. 스스로 책임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의 입에선 ‘…나’가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답게 살아갈 ‘나’는 누구인가. 그건 그 누구도 얘기하거나 대답해 주지 않는다.
바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글/ 채지민 : 시대문학 시부 및 자유문학 소설부등단. 제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Ⅰ,Ⅱ>, 장편소설<그대에게 가는 길><이별하기에 슬픈 시간><내안의 자유>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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