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어느 화가의 평전 쓰기 > 대학생 기자단


[붓소리] 어느 화가의 평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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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부터 손상기라는 화가의 평전(評傳)을 쓸 준비를 해오고 있다. 그가 남긴 그림을 관리하고 있는 화랑과 유족의 부탁이 있어 시작한 일이다. 화가가 남겨놓은 스크랩북의 메모들과 오고간 편지, 시작(試作) 노트 등을 읽으면서 그의 친구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있다.
  일이 조금씩 진척되면서 그의 삶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장애우로 살아가기의 고단함과 쓸쓸함, 혹은 그의 꿋꿋함이 하나 둘 전해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손상기는 1949년에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88년 서울에서 타게 한 서양화가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높은 나무에 올라가 놀다가 떨어져 장애우가 되었다.
  그가 남긴 메모가 불행을 잘 말해 준다. <눈 이 호흡 배 변비 다리 신경통 가슴 등 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제일 부럽다. 어떻게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눈이 핏발제거 수술을 요하고, 이는 충치라. 호흡은 무거운 일을 할 수 없고, 왼쪽다리 무릎 아래로 신경이 약하며, 다리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찌리찌리하다. 명산의 바위처럼 위용있게 돌출한 가슴뼈, 외등 낙타처럼 생긴 등. 5척에도 못 미치는 키, 불쌍타. 가엽다, 그가.>
  손상기는 화단에서 "39세로 요절한 꼽추화가"로 불린다.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그가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림을 그린 것은 상처 난 꿈을 실현시켜 보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내면 언어를 추려 내어 가혹하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원광대에서 유화를 전공했지만 고교 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며 미술학도였다. 그는 훌륭한 화가였다. 그에 대한 평전을 쓰는 일은 우리의 근현대 미술사를 윤택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순수했고 자기 세계를 가꾸고 지켰으며, 반(半) 지하방에 세들어 가난하게 살았으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한국의 로트렉, 제 2의 구본웅이 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은 작가다.
  그의 생애는 궁상맞은 구석도 있으나 유쾌하고 모험적인 일도 많았다. 그는 두 명의 부인과 결혼하여 각각 한 명씩의 딸을 이승에 두고 눈을 감았다. 첫 부인과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나 그녀를 향한 열정과 진념은 불타는 듯했다. 그가 보냈던 간절한 편지를 모으면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그는 부인과 함께 결혼을 반대하는 처가 사람들을 피해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았고, 부인이 마침내 강요를 이기지 못해 친정으로 간 후에는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부인을 찾아 헤맸다.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한 것은 그녀가 자기 딸을 잘 키워줄 여인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떼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육신은 괴로웠으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그림작업을 했고, 그로 인해 그의 가난한 화실에는 그를 따르는 후배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쓴 시작 노트의 한 구절은 답답한 삶의 철학과 작업태도를 보여 준다.
  <육중한 철제에 몸을 담고 목적 없는 여행길에 허탈한 심정으로 가고 있는 인간고(苦)/ 그러나/ 내겐 크레용 펜과 스케치북이 있어 외롭거나 슬프지 않다>
  그는 생전에 전업작가가 되어 7∼8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작고한 후에는 2회의 추모전이 열렸다. 구상회화 정신에 충실한 그의 그림은 어둡고 우울하고 칙칙하면서도 보는 이에게 충분한 공감을 주었다. 고향인 항구 여수와 서울의 변두리 지역을 즐겨 다룬 그의 그림에는 낭만적인 요소도 많아 특히 같은 화가들이 좋아했다.
  "불행은 가장 탁월한 평등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누구나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손상기는 자신의 자화상 옆에 "위대한 자"라고 낙서를 해놓기도 했다. 이는 그가 육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큰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꿋꿋한 자기주장과 아픔을 이겨낸 강한 정신력은 내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또한 평전을 쓰기 위해 만났던 많은 사람들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곤 한다. 완성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테지만, 쓰는 일이 즐거울 듯하다. 그 책은 많은 이에게 용기를 주게 될 것이다.

 

 

글/ 박래부 (한국일보 논설위원)

작성자박래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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