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사랑이라는 말이 지겹다. 장애 연금을 지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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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랑 이라는 말이 이젠 정말 지겹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장애우와 연관돼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의미없이 너무 자주 남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신문 한 모퉁이에는 한 장애우 단체가 기업의 협조를 받아 장애우에게 사랑의 컴퓨터 나눠주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기사 실려 있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장애우 관련 행사가 열리거나 장애우 돕기 캠페인이 벌어지면 빠지지 않고 행사명으로 등장하는게 "사랑의 ○○○○" 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마치 장애우들은 사랑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듯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장애우와 연관돼서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비장애우 시각으로 장애우들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사랑이라는 단어의 배경에는 장애우들은 자선의 대상이라는, 차별에서 기인한 인식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애우라면 왜 자신을 위한 행사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붙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의문 끝에 자신이 동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조섞인 한숨을 토해낸 아픈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언제까지 장애우들이 자선의 대상으로 존재해야 하는냐는 것입니다. 왜 장애우들은 자존심을 가진 자주적인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비장애우들이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나약한 존재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면 바로 현시점에서 장애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문제 제기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은 장애우들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고 있고, 직업을 가지지 못한 장애우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입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동정의 대상으로 전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장애우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전제와 인식은 장애우 문제가 해결되는 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장애우들이 타인의 도움 없이 모두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장애우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장애우들이 일정 부분 수용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애우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이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장애우에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도움은 기업도 아니고 자선사업가도 아닌, 정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주체가 돼 우선 장애우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고,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다음 나머지 부분에서 민간의 도움을 기대해야지만이 장애우들이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부가 아닌 민간이 장애우에게 도움을 주는 주체가 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정부가 주체가 돼 연금 지급 등 다양한 복지정책 시행으로 장애우들이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런 외국의 장애우 복지현실과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우리나라의 장애우 복지 현실입니다.
최근 정부에서는 서민 복지에 신경을 쓰며 잇따라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서민을 위한 정책 중 핵심은 아무래도 국민생활보장기본법의 제정 계획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국민들이 최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한다는 이 법제정은 대통령의 약속도 있었던 만큼 조만간 가시화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법 제정 과정에서 장애우들은 무엇을 관철시켜야 하는지, 지금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생활보장기본법의 제정을 약속하긴 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기조는 생산적인 복지입니다. 생산적인 복지는 쉽게 말하면 구호 차원의 복지가 아닌, 직업훈련 등의 실시로 장애우 등 저소득층에게 일자리를 갖게 해 일을 통한 복지를 추구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즉 장애우등 저소득층의 노동 시장 참여에 초점을 시행되는 게 향후 정부의 복지정책의 기조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복지정책 기조를 장애우 현실과 대비시키면 생산적인 복지가 그대로 장애우에게 적용돼서 실시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장애우 중에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심한 장애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우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노동시장의 참여를 전제로 한 생산적인 복지를 무리하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중증장애우들에게는 생산적인 복지보다는 정부의 배려가 절실하며, 정부가 고통받는 중증장애우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차제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국민생활보장기본법에 중증장애우에게 생계비 수준 이상의 연금을 지급하는 장애 연금 지급 조항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장애 연금 얘기를 꺼내면 먼저 우리나라 복지 현실에서 연금 지급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회의론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이런 회의로는 장애 연금 지급을 위한 제정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충분히 연금 지급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니까 외국처럼 무각출 연금으로 장애 연금을 지급하는 방법도 있고, 가령 간접세 형태로 담배나 주류에 단 돈 1원이라도 붙여 기금을 조성한다든지 야구장이나 축구장 입장 요금의 일정분을 모아 기금을 조성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수당이 됐든 연금이 됐든 지원 방안을 모색하면 당장 정부 부담없이 중증장애우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누구도 중증장애우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도 사회도 그리고 당사자인 장애우와 가족도 고민을 하지 않고 있고, 연금 지급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우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이해한다면 정부로부터 장애 연금을 지급받는 것을 장애우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장애 연금을 지급 받아야 하는 중증장애우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장애 연금 지급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일단 소수인 중증장애우들에게 정부가 연금을 지급하도록 장애계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증장애우들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붙는 동정과 자선의 대상이라는 왜곡된 현실은 이젠 끝장낼 대가 됐다는 것은 비단 저희들의 주장만은 아닐 것입니다.
글/ 이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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