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의 여자 여자 여자] 좋은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 아름다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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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름대로 여자를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좋은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 아름다운 여자, 그러나 이 구분은 여자를 외모나 교양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여자의 개성과 매력에 따라 나눈 것뿐이다. 그런데 마침 2년 전 일본에서 열렸던 아시아장애우예술제에 참가했다가 만난 세 여자가 이 세 가지 범주에 각기 해당하는 우연을 겪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여자변호사인 "써린"은 장애아동을 돕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다.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영어도 유창해서 행사기간 동안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반은 서양인이고 반은 동양여자 같은 인상을 주는 여자다. 현명하고 재치있고 매우 사교적이다. 몸집이 아주 작고 키도 작아서 마치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엄청난 골초여서 그녀와 얘기할 때는 비상용 담배를 준비해야 할 정도다. 마지막 날 쫑파티에서 같은 세대인 탓에 팝송을 함께 부르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당시 5살의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으나 그 딸이 이젠 7살 이 넘었을 것이다. 딸의 우표수집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시간과 정신이 없어 도와주지 못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런 여자를 나는 좋은 여자로 분류한다.
그러면 사랑스러운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사랑스러운 여자는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인 섹시함과 아울러 선량함을 갖춰야 한다. 사랑스러운 여자는 그렇게 현명할 필요는 없지만 천성이 선량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둔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우둔함은 교활함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므로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호주의 킹즈랜드에서 온 스콜시아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서양인으로서는 그렇게 큰 키도 아니었고, 영리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매력적인 말투와 행동이 매우 섹시했다. 무용과 체조로 장애아동들의 재활을 돕는 일을 한다고 했다. 송별파티에서 그녀는 나를 "여인의 향기" 의 주인공인 알 파치노처럼 멋진 춤을 추게 했다. 물론 그녀가 나를 이끌어 간 것이어서 영화의 내용과는 상반된 해프닝이었지만, 시각장애우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멋진 경험이었다. 스콜시아는 자신의 남자친구 이야기도 했는데 남자를 잘 아는 여자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여자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덕목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현명함과 선량함 그리고 사랑스러움도 갖춰야 하는데, 이 덕목을 모두 갖추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가끔 이 덕목을 모두 갖춘 여자를 만나게 된다.
역시 동경에서 만났던 중국에서 온 청각장애우 여성이다. 전날 마신 술이 과해서 현장 견학을 위해 허겁지겁 나가니 일행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빈자리에 가서 그냥 앉았는데 앞에 동양인이 앉아 있어 인사를 했더니 옆에서 일행이 청각장애우라고 귀띔을 해줬다. 그 순간 갑자기 처연한 심정이 되었다. 청각장애우와 시각장애우의 만남.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려면 몇 차례의 통역이 필요했다. 우선 내가 영어로 말하면 그것을 일본말로 통역을 하고 다시 중국말로 통역을 해서 그 것을 수화로 통역을 해야만 그녀와 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행 중 통역사가 없어 대화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술이 덜 깬 상태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손을 잡고 "모나리자"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함께 필드 트립을 무사히 마쳤다. 그 날은 마침 공식일정의 마지막 날이었고 저녁에 폐회식 겸 파티가 있었다. 각 국의 대표가 나와 영어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다가 이 상하이에서 온 중국여인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청각장애우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말을 못하고 나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몇 사람의 통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예술제에 참여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장애우들의 공연과 작품을 함께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교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 함께 모인 것은 바로 예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이 힘을 비장애우들에게 증명하고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까?"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렸고 상하이에서 온 그 청각장애우는 내게 조그만 선물을 전하며 울었다. 그녀는 내 연설을 몇 명의 통역을 통해서 이해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도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를 미친놈 정도로 생각했던 그녀의 남편의 오해도 풀린 것이다.
이런 여자가 정말 아름다운 여자이다.
글/ 이영호 (영화인, 함께걸음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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