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 편집자문워원 칼럼] 기뻐하지 못하는 죄, 잘못 기뻐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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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 지 얼마 안된 우리 아파트촌만 그런가 했더니 운전 중에 들은 라디오 대담의 출연자들도 그렇다고 한다. 성탄절이고 연말인데도 사는 동네마다 그 흔한 징글벨 노래 하나 틀어놓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성탄절 당일 명동 거리라든가 지나는 해 마지막 날의 보신각 근처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국이 대체로 썰렁했다고 언론은 약간 비감스럽게 전한다. 흥청거리는 거품이 걷혔다고 좋아할 수준은 이미 지난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은 과거 좋았던 시절보다 더 많이 걷혔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우니까 사람들 사이에 인정이 더 살아나는 것이 아니냐고 "제멋대로" 해석한다. 이렇게 말하면 자선 냄비에 돈을 넣은 분들에게 실례인 줄은 나도 안다.
하지만 사회복지 시설이나 단체에 들어온 정규적인 기부금이 격감하여 이 겨울을 나기 어려울 정도라는 보도는 믿었던 인정에 대한 배신감마저 들게 한다. 따라서 살림이 어려울수록 인정이 그에 정비례하여 늘어난다는 결론을 믿고 내가 하지 않았으면서도 남이 베푸는 걸 보고 괜히 흐뭇해 하는 공짜 심정도 반쯤은 싸늘하게 식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기뻐했던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경축일이란 무엇인가, 기뻤던 일을 오래오래 잊지 말면서 계속 기뻐하자는 뜻에서 정한 것이다. 그것은 기쁘고자 하는 일은 세월이 흘러도 그 일만 생각하면 언제나 변함없이 기뻐할 수 있을만큼 어느 정도 보편적인 가치를 가질 때 정해지는 것이다.
평소 기쁠 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 날만은 기뻐하라고 일부러 잔치상을 펼쳐주는 날이 이른바 경축일이다. 따라서 기뻐하라고 정해놓은 날을 기쁘게 지나지 않거나 기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죄이다.
분명히 재작년까지 우리는 경축일마다 기뻐했다. 그런데 작년과 올해 이른바 IMF 사태를 맞아 기뻐하지 못했다. 기쁜 날이 본래 기쁠 일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아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신앙 여부와 교파를 초월해 진짜 오래 두고 만백성이 기뻐할 만한 일이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기뻐해야 할 이유가 예수보다 적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뻐할 의욕이 없어진 것일까? 무슨 소리, 지금처럼 사람들이 기뻐할 일을 이다지도 간절하게 바란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기뻐할 날에 기뻐할 기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다소 엉뚱하다. 아마 재작년까지 사람들은 "잘못 기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잘못 기뻐했다는 것은 기뻐하긴 했으되 정작 기뻐해야 할 일로 기뻐한 것이 아니라 굳이 축일을 골라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질펀하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날이 성탄절이든 불탄일이든, 3ㆍ1절이든 제헌절이든, 광복절이든 아니면 개천절이든,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날 기뻐해야 할 일로 기뻐하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 그런 날은 단지 노는 날이지 기뻐하는 날이 아니었다.
그런 날은 기뻐해야 할 과거의 그 사건들을 되새겨 기리는 날이 아니라 어느 새주머니의 돈지갑 무게에 따라 기쁨은 조작 되었다. 어느 새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리는 것에서 더불어 나누는 기쁨을 잊어왔다. 그리고 경축일의 기쁨은 경축일의 의미와는 무관한 거품이 잔뜩 낀 소비와 유흥의 구실이 되어 왔다는 것을 속일 수가 없다. 이런 거품의 기쁨 속에서 정작 기뻐할 능력 자체는 거세되었다.
우리는 어느 새 슬프고 비극적인 일을 당했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과거를 돌아본다. 이럴 때 대게는 후회감을 느낀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그런 경우에나 새삼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쁨도 슬픔 못지 않게 과거와 과오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기쁨 속에서 돌아보는 과거는 슬픔만큼 후회감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의 잘못도 여유있게 들여다 보게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고치지 못한 실책은 거의 예외 없이 다급하게 고쳐도 늦은 파국으로 판나기 마련이다. 즐거운 시절 우리가 기쁨 속에서 다 같이 그 기쁠 일에 기뻐했다면 우리의 모자람이 지금처럼 아픔으로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IMF 사태라는 국난을 헤쳐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기쁨도 구조조정하여 진짜 즐거워할 방식을 체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글/ 홍윤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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