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좌절로 점철된 장애우 대학 입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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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 고홍주 씨
4남 2녀 자녀 모두 하버드, 예일, MIT대 졸업, 한 가족 총 12개의 박사학위,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가정 교육의 사례로 소개. 올해 1월 3일 MBC 성공시대에서 소개된 전혜성 여사.
그녀의 셋째 아들은 지난 11월 3일 한국계로서는 미국 정부에서 가장 최고위직인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 자리에 오른 고홍주 씨이다. 고홍주 씨는 얼마 전 클린턴의 수행원으로 모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우란 사실은 언론과 방송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그동안 이루어 온 일들을 생각하면 장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적절하다. 그는 90년대에는 한국계최고로 미 예일대 법대 교수가 되었고 헌법과 국제법 분야에서 미국 법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런 명예보다는 그가 인권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동안 예일대 인권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쿠바, 아이티, 보스니아, 동티모르 등의 난민 인권 보호를 위해 애써왔는데 클린턴 행정부의 쿠바 난민 처리나, 아이티 사태 개입 등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그의 이런 면모에 비추어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재임 기간이 아주 흥미로울 것" 이라 예상했다. 미국 내 인권단체들도 "드디어 정치적 이유가 아닌, 원칙에 따라 인권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됐다"며 환영하고 있다.
그는 모국을 방문하는 동안도 한국의 인권위원회 설치 문제 등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스로도 신체 장애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가 국내의 장애우 인권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좌절로 점철된 70년대 장애우들의 대학 도전기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고홍주 씨를 성공한 장애우로 소개하는 일은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신체상의 장애를 이유로 능력을 도외시하는 국내의 현실에서 좌절하는 장애우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거동에 약간의 불편을 느끼지만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정도의 경미한 장애우들도 대부분 처음 사회에 진출할 때 심각한 괴리감에 직면한다. 스스로 장애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가 사회의 편견에 직면해 자신이 장애우임을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모든 이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지만 장애우들은 첫 출발을 좌절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처음 겪는 좌절은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들 수 있다. 지금이야 중증장애우들도 마음만 먹으면 대학 진학이 가능하지만 한때 다리만 약간 절어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장애우들의 부당한 불합격 처리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곤 했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이들도 눈에 띤다.
장애우 학생에 대한 첫 배려 조치로는 1972년 시행된 장애우 학생들의 고입 체능면제 조치를 들 수 있다. 8점이라는 점수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장애 학생들이 이해 소급적용으로 대거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등 진학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때마침 그해 박장우 씨(22ㆍ소아마비ㆍ국내최초 장애우통신 푸른솔 창립자)형제가 사법고시에 합격해 수많은 장애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1975년에는 이익섭 씨(당시22세)가 세 번째 도전 끝에 연세대에 합격해 화제가 되었다.
73년, 74년에도 예비고사에 당당히 합격하고도 연세대로부터 두 번이나 입학시험을 거부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얻어낸 영광이었다. 당초 학교측은 그에게 시험시간을 다른 학생보다 많이 주기로 약속하고서도 60분 밖에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익섭 씨는 당시 열심히 공부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약속대로 장애우 복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75년에는 장애우의 대입이 사회적인 이슈가 된 해였다. 72년 정부의 체력시험 면제조치의 혜택을 입고 소급입학이 허락됐던 학생들이 대입시를 치른 이 해 전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체장애우 학생은 1천1백21명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학업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장애우에 대한 입학불허라는 입시요강에 따라 지체부자유 수험생들은 수업에 지장이 없는 전공과를 택해도 무조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처리했다. 특히 의과를 비롯한 이공계는 거의 모든 대학이 입학을 불허했고 국립대학은 완전히 입학의 길이 막혀 있는 형편이었다. 비교적 관대했던 연세대조차 매해 장애우 학생지원이 늘어나자 교수회의에서 격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 항의해 지체장애우 학생모임인 "흰양모임"(회장 김광균, 재활국민교 미술교사)과 대학재학 지체장애우 모임인 "등대회"(회장 김흥섭, 당시 20세, 연세대 의예과 1년), 승세원 씨 등 수험생과 학부형 60여명은 서명과 함께 문교부장관과 각 대학 총학장 앞으로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부당한 취급을 바로 잡아달라는 호소문을 냈다.
그러나 이듬해 76년 탈락했던 소아마비 학생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대거 합격했다. 당시 소아마비 학생들과 부모들은 이에 보답해 버스를 대절, 육영수 여사 묘소를 참배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80년대 끊임없는 도전으로 서서히 열리는 대학의 문
80년대 들어서도 장애우 학생들에 대한 부당한 불합격 처리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80년은 때마침 세계장애우의 해를 맞아 장애우의 대입에 있어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1980년 대입 예비고사에 합격한 전국의 시각장애우학생 13명이 대학측의 거절로 입학원서조차 내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학부모와 문교부의 호소 끝에 13명 전원이 대학입학시험(본고사)에 응할 수 있었다. 대학예비고사 제도가 실시된 이후 시각장애우 학생의 예비고사 합격은 71년도 2명, 73년 1명 74년도 5명, 75년도 1명, 79학년 2명 등에 머물다가 80년에는 13명이 대거 합격했다.
1980년 도효희 씨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1.5cm 짧다는 이유로 영남대로부터 불합격 처분을 받고 10개월 동안 법정투쟁을 한 끝에 입학했다. 재판부는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1.5cm 짧은 신체장애우라는 이유만으로 불합격시킨 것은 대학당국의 권한을 넘어선 불법ㆍ부당한 행위이며, 대학의 사회적 기능으로 보아 공공성을 가져야 하는 사회 통념상의 합리성을 잃었고 현저하게 공정성과 균형을 잃은 학사행정 행위로서 법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1981년 세계장애우의 해를 맞아 신체장애를 이유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온 현실에 대해 전환점을 마련한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81년에는 경희대 한의예과를 지원했던 전은석 씨와 배근소 씨가 불합격 처리됐다. 경희대측은 당시 의료법 8조 3항 의료인으로서 부적합하다고 인정되는 "불구폐질자"와 "마약 기타 유독물질의 중독자" 조항을 내세워 한의예과를 졸업한 후 치르게 될 한의사 국가고시에서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결격사유를 규정하고 있고 대학 수업 중에도 실험실습에 참가하는데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희대 측이 불구폐질자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 수학능력이 있는 장애우까지 진학의 길을 막는다는 논란이 일었다.
보사부 당국자도 경희대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사부는 의료인자격 조항을 개정해 의료인으로서의 부적합 범위를 상세하게 규정하는 한편 "농ㆍ맹아자" 조항을 삭제했다.
82년에는 S대 약대에 응시한 구자권 씨가 왼쪽다리를 전다는 이유만으로 "수학불능자(보행불편)"란 판정을 받았다. 같은 S약대에 응시한 양희승 씨도 소아마비를 앓아 "보행불편, 언어불능자 판정"을 받아 불합격했다. 당시 이 대학에 점수미달자가 합격 처리된 것에 비해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었다.
82년에는 사법연수원 수료생 중 박은수 씨 등 지체장애우 4명 모두가 법관 신규임용에서 탈락해 물의를 빚었다. 대법원 당국은 "법관은 무엇보다도 품위와 위신이 중시돼야 하며 특히 신체적 조건에 있어서는 출장, 현장검증 등 직무 수행능력이 고려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1986년에는 가톨릭대 의학부에 3명의 장애우 학생이 불합격 처리됐다. 학력고사 점수와 논술고사에서 합격 선보다 훨씬 높은 점수로 1차 합격됐으나 입학전형위원회에서 수학할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아 불합격 처리를 받았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재심요청에 따라 재합격했다.
이렇듯 장애우들의 좌절이 점철된 대학 입시의 역사지만 80년대 후반, 90년대를 지나면서 부당한 불합격처리는 거의 사라졌다. 이따금 부당한 불합격 조치가 빚어지기도 했지만 여론의 따끔한 질책에 못 견뎌 번복되곤 했다.
90년대 초반의 특례입학 조치로 중증장애우에게도 대폭 대입의 기회가 확대돼 이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장애우의 대학 진학의 장벽이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우의 대학 진학에는 무수한 난관이 남아있다. 편의시설을 제대로 확보하지 않아 형식적으로 장애우의 입학기회를 늘린 전시행정이라는 논란이 끊임없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측에서도 전에 비해 이에 대한 배려를 늘려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장애우 학생만을 위해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는 대학측의 입장과 장애우 학생에 대한 당연한 조치라는 학생들간의 입장이 대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도와 물리적인 양면에서 충분한 장치 마련이 하루빨리 이루어져 더 이상 시체장애를 이유로 원하는 학업을 중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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