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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기적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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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디스트로피 치유를 위한 발걸음
  "저는 이제 혼자서 휠체어를 굴릴 수 있고, 기구의 보조없이 앉을 수 있고, 호흡이 좋아지고, 실내 운동기 페달을 손으로 돌릴 수 있고, 중심을 잃지 않고 45도 각도까지 몸을 숙일 수 있고, 손을 흔들 수 있고, 전화를 받을 수 있고, 휠체어를 타고 마당에 나갈 수 있고, 머리를 긁을 수도 있고, 엄지손가락을 구부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간단한 동작조차 불가능했던 미국의 알칸사스주 퍼시에 거주하는 근육디스트로피 장애우 밀튼 렉스델에게 1년 사이에 벌어진 기적 같은 사건이다. 근디스트로피(근이영양증)는 근육의 형성 및 모양이 유지되지 않아 근육세포가 소멸하여 차츰 지방과 섬유질 조직으로 채워지는 퇴행성 근육질환이다.
  모두 12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일부 형태는 유년기에 발병해서 호흡곤란, 심장 근육 약화 등으로 채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기도 하나 근육이 약화되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예방이나 회복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근육디스트로피 치료의 길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있어왔다. 그 기적의 첫 번째 기회는 앞서 소개한 밀튼 렉스델에게 주어졌다. 그에게 기적적인 회생을 가져다 준 요체는 CTRF-(세포치료연구재단:Cell Therapy Research Foundation)의 회장 피터로 박사가 밝혀낸 MMT(myoblasfer therapy)요법, 즉 근육모세포이식 수술이 었다.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로 박사는 1975년부터 "이상세포를 정상세포로 바꾸어 놓는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15년간 쥐에게 임상실험을 한 끝에 1990년부터 CTRF를 창설해 인간에 대한 임상실험을 해왔다.

  밀튼 렉스델에 대한 시술이 이뤄진 것은 1996년 8월 27일. 건강한 젊은 남자 기증자의 허벅지에서 2그램 정도의 건강한 근육세포를 추출, 6주 동안 배양해 5백억개의 마이오블라스트로 불리는 근육모세포를 증식시킨 다음. CTRF의 정형외과 의사가 전신마취를 시킨 환자에게 전신 1백79군데(82개 근육그룹)에 45분 동안에 걸쳐서 주입, 이식했다.

  밀튼의 근육세포는 이식된 정상 근육모세포의 영향으로 점차 정상적으로 성장해 1년 후에는 호흡기능이 향상되고, 앉지도 못하던 상태에서 앉아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전반적인 운동근육의 힘이 향상되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어 데이빗 플램몬이라는 29세의 청년은 1997년 3월,5백억개의 세포 이식을 받은 후 6개월만에 뚜렷한 호전을 보였다. 데이빗은 휠체어를 벗어나서 다시 걷게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임상실험에 참가하기 위해 CTRF를 찾았다.

  지난해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소식을 발견한 한 근디스트로피 장애우에 의해 국내에도 이 소식이 일부 사람들에게 조용히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만 해도 섣불리 단정지을 단계가 아니어서 추이를 살피는 상황이었기에 국내 의학계조차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난해 국내 근육디스트로피 장애우협회인 잔디회는 피터로 박사를 급히 초청해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이 시술은 이제 FDA승인하에 미국내에서도 80%이상의 효과가 입증되어 근디스트로피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나라에서도 이 요법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중앙일간지를 통해 발표가 되었을 만큼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2일과 12월 3일, 성균관대 의과대학 삼성제일병원 근디스트로피증 클리닉 안재용 교수팀(정형외과 김영조, 유전학연구실장 최수경)이 피터로 박사와 협진하여 동양 최초로 근디스트로피증에 대한 근육모세포이식 수술을 시행하여 성공적인 치료 효과를 거둔 것이다.

  비록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 환자 4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지만 이들은 모드 매우 양호한 치료효과를 거두었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은 2월 5일 국내 장애우를 대상으로 근육모이식 수술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조만간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사실 지난 해부터 근디스트로피 장애우가 있는 일부 가정에서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에 과잉열풍이 불었었다. 잔디회에는 진상을 묻는 전화와 당장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다. 근육모세포 이식술의 성공을 위해서는 조기에, 즉 근육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시행하여야 하며 팔, 다리의 관절에 강직이 없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어야 치료 효과가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치료비도 당분간을 천문학적인 숫자에 머무를 전망이다. 성급한 기대도, 실망도 금물이다. 좋은 소식들이 잇달아 들려오지만 새해에도 근육디스트로피를 앓는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여럿이 죽어갔다. 여전히 시간이 촉박한 이들이 많은데 의학의 발전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작은 거인 미셀페트루치아니의 거대한 발걸음

  지난 1월 6일 프랑스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다.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재즈의 명인, 피아니스트 미셀 페트루치아니, 36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골형성 부전증 장애로 인해 키가 90㎝에 불과해 피아니스트로서는 악조건이지만 재즈피아노의 대가로 재즈역사에 신화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된 인터넷 웹사이트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짐작할 만하다.
  1962년 12월 프랑스 오랑쥬에서 탄생한 그는 신체장애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 모든 것을 독학으로 공부했지만 3개 국어에 능통했고 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음악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소장한 재즈음반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의 재능은 일찌감치 빛을 발해 좋아하는 곡을 음반으로 듣고 곧바로 카피할 정도였다.

  네 살 때부터 드럼을 쳤던 그는 기타리스트인 아버지와 베이시스트인 형과 함께 가족밴드를 결성해 활동했고 19세 때 미셀 페트루치아니 트리오를 결성해 재즈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음악가로서는 처음으로 재즈의 대명사인 블루노트와 7장의 음반을 냈고 몇 개의 앨범으로는 돈방석에 올라앉기도 했다.

  이미 30대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이라 일컬어졌던 그는 지난해 12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티칸에서 마지막 무대에 선 후 가장 열정적으로 일할 나이에 뉴욕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접었다.
  생전에 그는 피아노에 특수장치로 몸을 묶고 의자에 서서 피아노를 쳤지만 음반터치는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강렬할 뿐만 아니라 기교도 뛰어났다.

  그는 신진 재즈피아니스트 중에서 국내에는 비교적 지명도가 낮은 편이었는데 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열린 내한 공연은 국내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함께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컴퓨터통신의 재즈동아리에 올라온 팬들의 후기를 통해 그 때의 상황을 잠시 적어본다. 일본에서 공연중인 그를 국제문화교류협회라는 단체에서 급히 부른데다, 터졌다 말다 하는 스피커, 페트루치아니 자신이 연주하기 무척이나 애먹었다고 토로한 줄 서너 개가 끊어진 야마하 피아노, 좌우로 길게 객석이 늘어서 관람하기 꽤나 애먹었던 급조된 무대, 그가 손수 피아노 의자의 높이를 힘들게 조정하고 애쓰며 의자에 올라오도록 해서 그런 거 하나 미리 조정해 놓지 못하냐는 팬의 질타도 있었다. 연주자나 관객이나 고문받는 느낌의 망신살이 뻗친 연주회였다는 게 1차 평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만들을 날려버릴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연주에 대한 팬들의 평이 이어진다.
  "50분에 가까운 메들리 형식의 첫 곡. 공연에 얼이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너무나 아름답고 절제된 천상의 소리. 가슴 속의 모든 찌꺼기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그런 연주."
  팬들은 모두 기립박수로 그에게 앵콜을 청했고 현악 4중주와 어우러진 베사메무초로 한국 팬과 이별을 고하고 있다.

 이희아 양과 손가락 장애를 이겨낸 위대한 음악인들

  그런데 20여 년을 넘어 대륙을 뛰어 넘어 그의 생전의 모습과 함께 오버랩 되는 작은 거인 피아니스트가 우리에게도 있다. "네 손가락의 즉흥환상곡", 13세 소녀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 손가락 힘을 기르기 위해 시작했던 피아노 연주. 그의 여건은 미셸 페트루치아니아 보다 더욱 어렵다. 건반 여러 개를 눌러야 하는 대목에서는 몇 배나 빨리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고 패드는 허벅지로 눌러야 한다.

  패드를 특수 제작해 피아노 중간 높이에 달아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번에는 허벅지에 물이 차는 난관에 처했다. 그렇게 배운 피아노가 불과 1년 반만에 전국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관객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주최측의 넋 나간 거부가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희아는 이미 10여 개의 대회를 휩쓸었고 누구나 어렵다고 판단했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도 능숙하게 친다.

  세계 음악사에서 팔의 장애를 극복했던 피아니스트는 얼마든지 있다. 오스트리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비트겐슈타인은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을 잃었다. 그를 위해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곡을 썼고 비트겐슈타인은 명성을 되찾았다. 라벨의 그 유명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비트겐슈타인에게 헌정 됐던 대표적인 곡이다.

  특히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오퍼드 고도우스키는 자신의 연주여행을 포기하고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만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해 주었는데 우연찮게 고도우스키도 나중에 중풍에 걸려 오른팔을 못쓰게 되었고 이번에는 그가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썼던 그 곡을 연주하며 연주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황금의 왼손 피아니스트라고 불리우는 라울 소사 또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지만 79년 길에서 넘어져 오른쪽 두 개의 손가락 신경이 파손돼 더 이상 오른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없었다. 소사는 포기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해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외었다.

  그밖에 레온 플라이셔는 오른손 마비로 한 때 연주생활을 포기했다가 17년 만에 재기해 청중을 감동시켰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스크리아빈도 과도한 연습으로 손에 문제가 있자 왼손을 위한 곡을 쓴바 있다.
  아마 이희아 양도 음악사에 길이 흔적이 남아 있는 이들 음악가들의 얘기처럼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게 될 것이다. 단지 그들의 재기 뒤에는 가족과 형제와 친구들의 애정 어린 시선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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