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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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하여
모든 이들의 자아실현 추구하는 봉사활동 이루어져야
복제 양 "돌리"의 탄생...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작년 봄 TV 뉴스를 보다가 영국의 월머트 박사팀이 똑같은 유전자 조합을 가진 10마리의 복제 양(羊)들을 탄생시켰다는 보도를 접하고 깜짝 놀랬다. 그 바로 전에 국내 유전공학 권위자로부터 그 정도의 기술적 성취는 20년쯤 후인 2010년에나 혹 가능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된 지난 2월 체세포복제 양 "돌리"의 탄생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과연 오늘날 변화의 광풍은 사상 유례없는 문명사적 변혁의 징후를 드러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위 사건도 빙산의 일각에 자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듯 문명이 바뀌고 신인류 혹은 후인류마저 예감되는 지금, 이를테면 인생의 의미, 인류의 성숙, 인간 정신의 고양 등이 절박한 문제로 새로이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 내놓은 에세이집 「21세기에 태어난 장지-밀레니엄 전환기의 휴머니즘 운동론」은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책의 전체 주제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추동력에 관한 진지한 대화"라고 할까. "이야기 하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몰락하는가?"에서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변혁의 양상들을 몇 분야에 걸쳐 그 핵심을 정리했다.
즉, "인조인간·복제인간이 가능한 시대". "사이버 스페이스 시대", "가족형태의 파괴시대", "우주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의 흐름과 그것이 우리들 삶에 미칠 영향, 그리고 사회운동적인 의미들을 짚었다.
"이야기 둘. 휴머니즘을 위한 인간론 지평의 확장"에서는 해방운동의 흐름을 그 사상적 근거에서도 뿌리라고 보는 인간론에 초점을 맞추어 되짚어보았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와 주체사상, 그리고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동양사상 붐도 포함된다. 그리고 미래 사회운동을 위한 휴머니즘 인간론을 제시하였다.
"이야기 셋. 존재의 자유와 열린 연대를 향하여"에서는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의 기본 방향과 성격을 모색하면서 "자기존중 운동", "연대 운동", "문화생활 운동", "종교생활 운동" 등을 "사회 운동으로서" 제안하였다. 여기서는 봉사운동과 관련하여 잠시 이야기해 보겠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봉사운동은 자신의 높은 자아실현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아 실현 조건을 개선해가는 적극적인 휴머니즘 운동이다.
봉사운동에서 타인의 자아실현을 돕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향이다. 봉사자는 봉사행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좋은, 보다 많은 자아실현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편 봉사행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또한 그 봉사행위를 제공한 사람에게 보다 높은 자아실현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사정은 물론 새로운 휴머니즘운동에서 일체 사람의 행위와 의식, 감정을 바라보는 데서 주된 관심을 "자아실현"에 둘 때 가능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탁발이 중생에게 공덕을 쌓게 하는 보리행(菩提行)이라고 말하는 불가(佛家)주변의 능청 같은 이야기를 그 기본에서 수용할 수 있다.
봉사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어떤 수준, 어떤 형태든지 상호 자아실현을 북돋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는 연대감이 높게 살아날 수 있고, 열린 연대의식이 잘 자랄 수 있다.
봉사운동과 관련해서 특별히 두 가지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로 봉사운동은 문제를 구조적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서, 소용이 그때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봉사운동은 그 성격상 조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자의적이라는 지적도 있어 왔다. 이와 같은 지적들은 모두 봉사운동이 해방운동의 내용으로서는 적절하지 않으며, 의미가 없다는 무시나 업신여김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난날 어떤 사회유물론자들은 봉사활동이 오히려 해방을 위한 사회혁명을 지연시키는 구실을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른바 구조개혁운동도 따지고 들자면 유동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어떤 구조도 사회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으며, 구조는 끊임없이 이리저리 변하여 왔다. 봉사운동이 굳이 비조직적인 것이라고 할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수녀들의 봉사활동은 높은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다.
둘째로 이상한 봉사우월주의도 있다. 봉사운동을 무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봉사활동을 하려면 우월감이나 베푸는 마음 따위는 온전히 비워야 하며, 봉사행위를 제공받는 사람과 완전한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자 중에 가장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된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물론 애당초 선한 뜻에서 출발했겠지만, 마침내는 또 다른 우월주의로 흐른다. 왜냐하면 각고의 인내와 자기 반성. 그리고 거듭 남을 거친 이들만이 봉사운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제 봉사운동은 편안할 것을 제안한다. 종교적 이유에서든, 자기 수양을 위해서든, 그냥 하고 싶어서든, 심지어 시혜심리가 있어서든, 하고 싶어서 하는 운동이라면 좋은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에서라도 상관없다. 봉사경험을 통해서 자아실현감을 맛보거나, 아니라도 자아에 조금이라도 더 풍부함을 얻었다면 좋은 것이다. 봉사자들이 그렇게 주의없이 막되게 굴지만 않는다면, 봉사자의 동기 때문에 봉사행위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자아실현이 뒤틀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꾸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아실현에 도움을 준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는 폐쇄적인 봉사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막상 봉사 행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함께 하는 걸음을 기대하며
필자는 인간의 의식이 성장하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된 상황에서, 미래 사회운동 또는 대안적인 사회체제와 관련하여 정치경제영역과 문화영역, 봉사영역, 종교영역의 통합이 중요한 개념적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따뜻한 분들과 "보다 인간적인 사회"와 이를 위한 운동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책 속의 한 구절을 직접 이용해 볼까 한다.
"… 우리는 어떤 특정 분야에서 봉사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천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 특정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천사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측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봉사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 봉사 활동을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성인이 될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쪽이나 사람으로서는 다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든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서 다 서로 다른 점이 있듯이, 그들 간에도 다만 한쪽에서는 그 봉사행위를 제공할 수 있고, 다른 쪽에서는 그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그 측면에서 다른 점이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은 바로 그런 차이들을 다만 차이로 인정하면서 모든 이들의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저자 이형용 씨는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도산사상연구회 총무로 일하다가 최근까지 장애인먼저실천중앙협의회 책임간사로 일한 바 있다.
글/ 이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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