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고운산 군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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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운산 군에 대한 추억
처음 고운산 군을 맞았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다. 교수생활 15년 동안 그런 심한 중증장애학생의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한 학생이 우리 학교를 거쳐 현 모 지방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제자가 프랑스 유학을 가서 역시 그곳에서 동양미술을 강의하는 훌륭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고 군을 보면서 나는 과연 그러한 선례들처럼 또 하나의 훌륭한 학생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회의(懷疑)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전의 두 차례에 비해 고운산 군은 신체의 부자유 정도가 훨씬 심한데다 경제적 여건 또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해를 함께 보내는 동안 나는 고 군에 대한 우려를 깨끗이 불식시킬 수 있었다.
중증의 장애우라는 사실을 거의 망각하고 지내게 될 만치 매사에 그는 적극적이었고 활동적이었다. 학업과 취미생활, 교우관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는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했을 만치 열심이었고 능동적이었다.
그래서 지도교수인 나마저 그가 이번에 서울대를 수석 졸업하는 바람에 그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장애가 대단히 새삼스러운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세간에서는 그의 장애문제가 화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 자신은 고 군의 신체적 장애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 군을 보면서 나는 신체적 장애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사실 한 인간의 참된 성장에 있어서는 거의 혹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력과 영혼의 힘, 그리고 긍정적 세계관이야말로 위대한 것임을 아울러 느낄 수 있게도 되었다.
평소 나는 그의 얼굴에서 그늘이나 어두움 혹은 절망의 기색 같은 것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신체적 악조건과 집안 경제의 어려움, 병석(病席)의 부친 문제 등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늘 웃는 얼굴이었으며 시종일관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나이 어린 급우들을 챙기고 충고해주기도 하였다.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나와 함께 졸업 여행을 떠났을 때는 노래방에서 함께 최신 유행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번에 서울대의 영예로운 수석 졸업자가 되어 교문을 나서게 되었지만 나는 그의 두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거나 재능이 탁월했다기보다 그의 노력하는 자세가 남달랐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모든 학생들의 귀감이 될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즈음 일부 젊은 청년들의 정기(精氣)를 잃고 안일무사하며 나태한 모습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나친 과보호 속에서 생의 의욕과 열기가 부족한 경우 또한 많이 보게 된다.
사치와 방종의 풍조 속에서 젊은이들이 비틀거릴 때 민족과 나라의 밝은 내일은 그려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운산 군의 승리는 개인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많은 청년 학도들에게 질책과 귀감이 될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많은 장애우들에게는 불끈 힘을 솟게 하는 쾌거일 것이다.
글/ 김병종 (동양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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