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편견과 차별의 사회적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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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
편견과 차별의 사회적 구조
두말할 것도 없이 장애의 극복은 사회적인 책임이다. 차별은 이 책임을 은폐하고 유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우들의 인간선언이야말로 편견과 차별로 일관해온 힘의 문화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경험이 각각 다르고 문화적, 종교적 분위기가 다른 배경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편견은 단순히 편견 그 자체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장으로 강조되어 사회적으로 차별을 구조화한다. 경제적 계층간의 구분과 대립은 비교적 많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인종간의 편견이나 남녀간의차별,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은 아직도 뿌리깊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경험에 입각한 적대감, 또 종교적 신앙에 근거하여 속된 것을 배척하는 태도 등은 앞으로도 쉽게 변화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편견과 제도화된 차별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연계되고 이념화되었다. 국가는 "중심"을 항하여 달려갔고 중심에 집중하는 것이 곧 힘이었다. 이 중심에 대한 집착은 모든 편견을 정당화하고 차별을 미화했다.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척된다. 중심은 동질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동질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표준이 설정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표준(또는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춰왔다. 역사를 두들겨 맞추고 국론을 통일해서 이념체계를 일사불란하게 만들며 사회생활의 규범과 문화와 가치를 정립했다. 종교는 그것대로 정통성을 세워서 다른 입장이나 해석을 배척했다. 자연히 중심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흠이 없으며 거룩한 것으로 승화되었다. 반면 중심이 아닌, 중심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더럽고 추하며 흠이 많고 속된 것으로 여겨졌다.
중심을 이루는 것은 힘이었다. 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동족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이렇듯 모든 경쟁에서 상대방을 꺾는 자는 미화되고 영웅시되었다. 중심은 영웅들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중심의 행태를 문화라 했고, 중심을 흠모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과정들을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 했다. 사회의 기강과 정치의 틀은 이 길과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다. 바로 여기에 편견의 고착화와 차별의 제도화가 근거한다.
그러나 이렇게 빈틈없이 짜여진 문맹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심에 끼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힘으로 하면 보잘 것 없고 자산으로 치면 중심의 부담만 되는 사람들. 그들의 호소와 주장과 운동이 이제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들의 인간선언과 사회 문화적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은 편견과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분한 종교의 성역에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가 중심과 표준을 향한 구심력 운동에서 변두리로, 잊혀진 생명체를 찾아 나서는 원심력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전환은 과거 반세기에 걸쳐서 또 짧게는 지난 20여년간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힘은 생명을 파괴하는 데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는데서 나타난다고 믿게 되었다. 약한 자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 약자 우선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질서와 제도, 그리고 스스로의 표준을 깨고 다른 것을 관용하는 도랑이야말로 한 집단이나 사회가 갖는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배타적인 중심, 나와 다른 것은 밀어내고 거부했던 중심은 그 기초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국민국가의 이념적 기초가 흔들리게 된 내부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편견과 차별의 직접적이고 또 가장 오래 남을 희생자는 장애우들이다. 장애가 눈에 띄고, 장애우들의 능력과 사회적 기능이 표준에 못 미치며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려면 사회적 부담이 커진다는 등의 시각들이 편견의 근거들이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장애는 사회문화적인 후천적 원인에 의해서 생긴다고 한다. 함께 살아가기 보다는 끝없는 생존경쟁 속에서 생명을 파괴하고 경시하는 등, 이러한 모습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통념이 장애우를 만들고 그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장애의 극복은 사회적인 책임이다. 차별은 이 책임을 은폐하고 유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우들의 인간선언이야말로 편견과 차별로 일관해온 힘의 문화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사회의 고정성(공정성)과 개방성을 측정하는 척도 중의 하나는 장애우가 얼마나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정의는 저변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가늠된다"고 말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사회 정의, 인간화의 정책과 시행은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국가는 그들이 국민으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시설과 장치를 마련하고 배려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장애우와 저변층의 사람들이 스스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이기고 공동체의 떳떳한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명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한 그루의 나무라도 정복하고 제압하려는 힘의 문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관용을 배울 수 있을까.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영감이 아니겠는가. 무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힘의 문명을 이기는 관용이 우리 모두를 구제할 에너지가 아니겠는가. 편견과 차별의 희생자들. 이제 그들이 앞장서야 한다.
글 / 오재식(한국사회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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