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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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라
십수년 전 공옥진의 심청전 공연을 감상하던 중 그 유명한 "병신춤"을 구경한 적이 있다. "춤은 오장육부로 추는 법이여, 누구든지 오장육부가 있으면 춤을 출 수 있는 것이여"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에 대처하기라도 하듯이 공옥진은 그때 이런 사설로 "병신춤"의 서막을 장식했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었다. 그렇다. 오장육부가 있어서 희로애락을 겪는데 너 나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장애의 유무에 따른 차이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주위의 가족이나 친지, 또는 이웃의 경우를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족이나 친지 중 장애우가 한 사람도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내 경우는 친척 중에 정신지체아동이 둘, 뇌성마비아동이 하나 있다. 더욱이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내 이웃은 백수십명의 뇌성마비 기타 중증장애아동들을 돌보는 대표적 복지시설이다. 이웃의 이들 천사들을 일상적으로 접해서 그런지 내게는 이들 장애아동들의 표정이나 동작이 전혀 낯설거나 어색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벌써 십수년을 이웃으로 살며 낯을 익힌 탓에 어디에서 마주쳐도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는 아이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점점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우, 특히 정도가 심한 중복장애우를 보면 마치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 슬며시 피하며 불안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못된 차별과 구별 짓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많은 이들은 심지어 장애우 시설이 동네에 들어서는 것도 결사반대란다. 또한 "뭔가 잘못된 구석이 있지 않고야 저렇게 불행을 당할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마저 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성경에도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마주친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 사람이 소경된 것이 본인 탓인지 아니면 조상 탓인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적잖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단호한 어조로 그 사람의 소경된 것은 본인의 잘못도, 조상의 잘못도 아니며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 대답에 따른다 할지라도 장애를 입고 있는 본인의 경우에는 하느님에게 "왜 나를 선택하셨느냐"고 항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아니다. 그저 서로가 부족한 것을 덮어주고 채워주며 어려움을 나눠 메는 등 한 형제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힘써 하느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낼 책무만 있을 뿐이다.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사실 발톱의 끝만 아파도 가장 우선적으로 그것을 치료하는데 매달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바로 설려면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는 점을 깨닫고 "덜 귀하게 보이는 지체에게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는" 사랑과 지혜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서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할 때야만 비로소 몸 가운데 분쟁이 없이 여러 지체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돌아보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장애우 문제, 기타 복지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이 소박하지만 나의 굳은 믿음이다.
사실 이러한 사랑과 공동체의 원칙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게 되면 사람들이 위선과 무관심은 무서울 정도다.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며"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늘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하여도 그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리라"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다시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이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며",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는 공동체와 연대의 법칙을 일깨워준다.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금식과 경건의 모양보다 백배 낫다고 되풀이 강조하며 사랑의 실천을 권면한다.
사실 이렇게만 되면 박두진이 "해"에서 노래한 것처럼 "노루를 만나면 노루와 놀고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노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듯하다. 물론 이러한 세상은 단순히 염원으로만 달성 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하고, 실현가능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나아가 그와 같은 소망과 믿음 가운데 필요한 사랑의 실천을 꾸준히 해나갈 때 비로소 우리 곁에 성큼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단순한 동정이나 시혜의 차원을 넘는 형제애와 연대감에 바탕한 사회복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이러한 소망, 믿음, 그리고 사랑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교수로 제직하고 있으며,
현재 민주주의 법학회와 인권운동사랑방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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