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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 베트남의 장애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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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

 


베트남의 장애우들

 

 

인구가 4천5백만여명인 우리나라의 장애우는 4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선천적 장애우와 후천적 장애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함께 사는 사람들" 가운데 10% 가까이가 몸이나 마음의 어딘가에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와 가족이나 친척들이 날마다 피부와 머리로 느끼는 것이지만, 남들에게는 그야말로 강 건너 불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 사는 이들의 장애 같은 것이야 관심이 갈 리 만무하다.

 베트남은 멀다면 먼 나라이다. 그 나라 수도인 호치민시까지 비행기로 다섯 시간가량 날아가야 하니까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가깝지만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훨씬 먼 나라이다. 그러나 베트남을 거리로만 따져서 멀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1965년부터 75년까지 베트남과 전쟁을 치렀다.  미국이 조직한 "연합군"에 참여해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가 하면 양민들에게도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동기는 아주 복잡하다. 1945년에 베트남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물란 뒤 그 나라에는 옛날의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다. 인도차이나라고 부르는 지금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로 두고 한 세기 가까이, 특히 "동양의 진주"라는 베트남에서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면서 갖은 단맛을 보던 프랑스가 승전국이 되자마자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져서 정부 조직을 세워가고 있었다. 호치민 정권은 일제 패잔병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반제 반식민 투쟁을 한 경력 때문에 베트남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프랑스 군데가 들어와서 그 나라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 드니 초치 호치민 정권과 민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군에 맞서 여러 해를 끈질기게 싸웠다. 그 싸움은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낡은 장총과 죽창을 든 베트남군의 대결이었다. 누가보든지 승리는 프랑스의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프랑스군에 밀려 저항도 제대로 못하는 듯이 보이던 베트남군은 1954년 북서부의 변경에 있는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세계 전쟁사상 보기 드문 전과를 올렸다. 베트남군을 완전히 섬멸하려고 병력을 총집결해 공격을 가하던 프랑스군은 어딘가에서 솟아난 베트남 사람들의 무기의 일제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프랑스는 무릎을 꿇고 항복 선언을 한 뒤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명한 장군이 바로 보 구엔 지압이었다. 그는 지금도 살아있다.
 프랑스가 물러난 뒤 베트남은 자연히 독립국가의 지위를 굳히고 자주의 길을 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세계 2차 대전부터 세계 제패를 추구하던 미국의 이익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이웃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이어 타이, 버마, 말레이시아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 "도미노 이론"이었다. 미국의 군부와 우익이 요란하게 선전한 그 이론에 따라 미국 정부는 고 딘 디엠이라는 독재자를 지지하고 비호하면서 남베트남 정권이 월맹(호치민 정권)과 맞서도록 했다. 그러나 식민 세력에 부역한 자들이 주류인데다 부패한 고 딘 디엠 정권과 그 후계자들은 민중의 믿음을 얻지 못했다.
 60년대 초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가 시작한 베트남 전쟁 개입이 존슨 대통령 때 절정에 이르렀다가 70년대 초 "닉슨 독트린"에 따라 평화조약으로 마무리되고, 1975년 봄의 베트콩·월맹군 대공세로 사이공이 함락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 베트남에서는 붉은 바탕에 흰 별이 새겨진 깃발이 사이공에 날리게 된 4월 30일을 해방기념일 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미군은 비행기와 잠수함에 항공모함까지 동원했는가하면 네이팜탄을 무차별로 쏘았다 특히 베트남 여러 곳에 퍼부어댄 고엽제는 그야말로 그 나라를 석기시대로 돌려보내려는 듯한 파괴행위였다.
 베트남이 10년 가까이 그런 공격을 받다 보니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제 지배 때 2백만명 쯤이 살상당하거나 굶어 죽었다는데, 그보다 많은 인구가 다시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엽제의 본래 식물을 말려 죽이는 화학 제품이지만 인간이 접촉하면 목숨을 빼앗기거나 치명적 장애를 받게 된다. 호치민시에 있는 "전쟁범죄 박물관"에 가면 고엽제 피해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신부의 뱃속에 든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숨진 일이 수두룩하고, 온몸의 조직이 망가진 사람도 많다.
 고엽제 피해자는 베트남 전쟁에 나갔던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도 있어서 그들은 지금도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 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는 93년 가을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딛은 이래 열 번 가까이 그 나라에 다녀왔다. 처음에는 베트남의 통일과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갔으나 이제는 한국 남자들이 낳고 버린 한인 2세와 함께 가는 쪽에 치중하고 있다. 그들은 위해 합동결혼식도 주선하고 병원을 세우는 작업을 뜻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는데,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 나라의 장애우들이다. 대도시의 거리나 시장에는 구걸하는 사람들과 장애우들이 득실거린다. 장애우 중에는 팔이나 다리가 아예 잘려나간 사람도 있고, 사지가 붙어 있다 해도 온전하지 못해서 몸통으로 땅바닥을 기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내미는 모자에 5천 통(한국 돈으로 4백원 쯤)을 넣어 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베트남은 국민 연평균 소득이 2백달러를 가까스로 넘어섰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보다 인구와 자연조건이 월등한 데도 그렇게 된 것은 전쟁과 외침 때문이다. 그 전쟁으로 이른바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을 받은 우리나라가 베트남을 외면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 이전의 문제이다. 더구나 "우리의 핏줄"인 2세들을 버려두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장애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린사회와 장애우들은 베트남의 그 가엾은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오늘 한 그릇의 국수로 배를 채우는 일이 지상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트남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라고 권유하다.

 

 

글/ 김종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작성자김종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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