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 폐지 이후의 삶이 그려지지 않는다 > 대학생 기자단

장애계의 최대 관심사인 장애등급제 폐지 여부가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채 좀처럼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일단 정책 결정권자인 보건복지부의 계획에 따르면, 현 의학적 손상 여부를 기초로 한 장애등급제는 폐지하고 새롭게 장애종합판정체계를 도입해 운영하는데, 종합판정도구에는 장애우의 의료적 요인, 기초근로능력 요인, 복지욕구 요인을 조사하는 항목이 들어가고, 이 조사 결과를 종합점수로 환산해 장애 판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장애등급제 대신 이 장애종합판정체계를 통해 장애우에게 사회·환경적 요인과 욕구 등을 반영한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복지부의 이 계획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다.

무엇보다 복지부 계획은 현 장애등급제가 폐지된 후 장애우들이 어떤 변화를 맞게 될지,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열악한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어 장애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반발의 이면에는 정부가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로 했으면 그 후 장애우들에게 어떤 복지서비스를 제공할지, 소득은 어떻게 보장하고, 또 일자리 지원은 어떻게 할지에 대한 개략적인 대안이라도 마련하고 우선 시행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복지부 계획에는 이 지원 방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장애종합판정체계로 장애우 개인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복지부 얘기는 말 그대로 립서비스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많은 장애우들 주장이다.

이런 장애우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건, 이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위한 장애등급제 폐지인지에 대한 질문에 정부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등급제 폐지로 그동안 장애우를 옥죄었던 등급이라는 낙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하라는 건지, 아니면 앞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질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는 건지, 도대체 복지부 계획이 장애우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다. 현실을 보면 활동보조인지원서비스는 따로 인정조사표가 마련돼 있다. 인정조사표로 장애우에게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공할지 말지 판단하기 때문에 종합판정체계는 큰 의미가 없다.

장애 연금 지급도 기초생활수급 중증장애우와 차상위계층 중증장애우, 그리고 거주시설에 있는 중증장애우만 받을 수 있게 설계돼 있기 때문에 역시 종합판정체계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면 남는 건 철도요금 등의 공공 서비스 이용요금 감면 혜택을 받고 있는 장애우들뿐이다. 지원으로 이용요금 감면을 받고 있는 게 전부인 장애우들에게 등급제 폐지 후 종합판정체계가 어떤 새로운 지원을 할지에 대한 정부의 청사진이 없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결론은 장애등급제 폐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하겠다는 ICF(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 WHO의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표)는 기본적으로 신체 손상 여부로 장애 판정을 하는 게 아니라 장애우들의 빈곤, 노동 능력, 주거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장애 판정을 하고, 장애 판정을 한 후에는 장애우에게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러면 ICF 원칙에 충실해서 우리나라도 장애 판정을 했으면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면 된다. 예를 들어 장애우가 장애 때문에 일자리가 없으면 일자리를 주선해 주고, 장애가 이유가 돼 소득이 없으면 소득보장을 해주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기본이 우선되지 않고 대만의 예처럼 압력에 못 이겨 장애등급제를 폐지한 후 복지서비스간의 이동 밖에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복지부 계획은 장애우 입장에서는 백 번 양보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판정체계인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한 정부 입장은 보나마나 예산 마련의 어려움을 내세운 난색 표명일 것이다. 더해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경제가 저성장・저소비・고실업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며 장애우들의 이해를 구한다고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장애우들의 어려운 삶을 그나마 나은 삶으로 이끌 열쇠는 입만 열면 어려운 경제 상황을 얘기하는 정부가 쥐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우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정부는 지금이라도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장애우들 삶이 어떻게 변할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계획을 우선 수립해주길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