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소리]장애우는 어떻게 말하며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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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는 어떻게 말하며 쓰고 있는가?
종종 장애를 지닌 이웃들의 글, 그 중에서도 그들이 써낸 창작품들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문학상 응모작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생각들이 들어 있는 지라 필자는 장애우들이 정성스럽게 써낸 글을 읽으며 장애우 자신은 물론 그들의 이웃 그리고 사회와 세계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느낌이나 관점을 발전하곤 한다. 때론 공감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필자와 그들의 생각의 차이에 놀라기도 하면서 말이다.
물론 다년간에 걸쳐서 장애우들이 써낸 수천편의 글을 읽으며 분석해 본 것은 아니지만 몇 년 동안 그들이 써낸 적잖은 숫자의 글을 읽으면서 거의 직감적으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쓴 글에 등장하는 많은 주인공들이 거의 대부분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장애를 지닌 자들이라는 점이다. 저자 자신이 깊이 절감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나 애환을 다루다보니 그와 유사한 주인공이나 작중인물을 선정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들 주인공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상태이다. 상당수의 주인공들이 건강하지 않은 정신상태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작품의 주인공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 분노와 원망, 의존심리나 기대심리를 매우 강하게 품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를 글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이니까. 뿐만 아니라 사람이란 모두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여건과는 무관하게 피조물로서의 한계와 나약함에 늘상 시달리고 있는 존재니까 말이다.
헌데 정작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장애우들이 쓴 많은 작품 속에는 주인공이 그가 처함 생존과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 사회적인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한 채 패배주의자요 원망하는 자로 남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들 장애우들의 글을 읽으며 안타까운 점은 바로 이들 주인공을 만들어낸 저자의 패배주의적인 삶의 자세이다.
예컨대 신체가 몹시 약한 주인공이 병든 홀어머니를 부양하다가 지쳐서 집을 나가 다른 도시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손위 누나를 찾아가 원망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을 읽다말고는 부아마저 치밀어 올랐다. 누이를 찾기 위해 다른 도시로 혼자 여행할 수 있을 정도라면 자신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홀로 분연히 일어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어쩌면 소수의 장애우가 지니고 있는 패배주의와 그 위해성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 너무나 장황한 서론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장애우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딪혀오는 육체적 고난이나 정신적인 재앙 앞에 보다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이들 고난은 언제나 우리를 공격해 오니까 말이다.
지난 여름, 해맑은 얼굴과 후리후리한 키, 날씬한 두 다리를 자랑했던 교회 주일학교 제자인 고교생이 골육종으로 다리를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착잡한 감회와 함께 다시금 냉엄한 현실을 절감했다.
산업발전과 대기오염 그리고 좁은 국토에서 과밀한 인구밀도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과는 달리 수많은 이웃들이 하루아침에 장애우가 되거나 환자가 되어 쓰러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구촌 모두 생태계의 파괴가 주는 위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총기사고와 마약, 여기에 교통사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허무주의에 시달리기도 하고 에이즈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있다.
오늘 우리는 내가 건강하다고 내일도 건강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자랑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아픔과 재앙 그리고 죽은 마저도 긍정하며 이들의 공세를 맞받아칠 수 있는 강한 의지와 각오, 주어진 모습 그대로 삶의 바다에 뛰어 들 수 있는 강인한 생존력만이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거부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의 상처를 허락한 운명의 주관자 또는 절대자마저 긍정할 수 있는 힘이라면 이러한 생의 도전쯤은 너끈히 넘기고도 남으리라.
이 글을 마감하는 순간 뇌리 가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골육종을 앓는 동안 필자의 문병과 면담마저도 거부했던 그 아이,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퇴원한 후 집으로 찾아갔던 필자에게 질문을 던지던 맑은 눈망울과 여린 미소를 가진 교회 제자의 얼굴이다.
"선생님! 왜 하나님은 제게 이 같은 상처를 주셨을까요? 이 상처 없이도 제가 괜찮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너와 네 이웃의 고통과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발톱 하나 빠진 상처 정도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큰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다리 하나 없이도 네가 완벽하게 건강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겠지."
그 날 필자는 필자의 제자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과 나자신 모두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다.
글/안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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