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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사라지는 것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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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이 그립다
김종철/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올해 첫 새벽은 유난히도 춥다. 딱히 자연의 추위탓이라기보다는 지난해가 저물기 전에 불어닥친 쌀과 농산물개방의 찬바람이 농민들은 물론이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10년 유예"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는 미국을 비롯해서 중국과 동남아 여러 나라의 값싼 쌀이 야금야금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농민들은 농사지을 의욕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쌀에 버금가는 농가수입원인 소는 이미 개방된지 오래인데, 멀지 않아 완전히 서양소들에 대문을 열어준다고 하니 소 팔아 자녀 공부시키고 용체도 마련하던 농민들의 시름은 갈수록 깊어질 것이다.
어디 쌀과 소뿐인가. 무너지는 하늘을 피할 생각도 않고 넋을 놓고 있는 데가 제주도이다.
 왕조시대에 "원악도"나 귀양살이섬으로 불리던 그곳 농민들은 감귤 덕분에 꽤 높은 소득을 올려왔는데 이제는ㄴ 귤농사를 직파할 수밖에 없는 벼랑에 몰려있다. 60년대에 "감귤나무 한 그루면 자식 대학 보낸다"고 하던 말은 첫사랑을 하던 때의 달콤한 밀어처럼 생산비도 훨씬 싼 외국 감귤에 "싹쓸이"를 당할 것이 뻔하다. 제주 농민들은 몇해 전 바나나에서 이런 경험을 했지만 바나나와 감귤은 그 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감귤은 다른 작목으로 바꾸려면 나무를 갈아엎어야 하는데 제주섬의 쓸만한 땅을 덮다시피한 그 나무들을 어떻게 모조리 뽑아버릴 수 있겠는가? 시술을 개발하고 기업농을 육성해서 외국 감귤에 맞서면 된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준비도 모자란다.
 돼지, 닭, 고추, 마늘, 참께, 보리, 감자, 옥수수, 콩, 고구마, 양파 그리고 유제품이 "개방"의 단두대에 올라 있다. 많은 농민들이 이 위기와 시련을 이겨내면 다행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미 서양것에 밀려 사라진 밀밭을 보면서 어릴 적에 맡던 밀내음과 불에 볶아먹던 밀알의 추억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그런데 이제 밀뿐이 아니라 우리의 농촌공동체를 지탱해오면서 겨레의 먹을 거리가 되어주던 짐승과 알곡과 채소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땅은 삶의 터전이고 농업은 모든 산업의 그루터기이다. 역사 속의 그 어느나라도 농업과 농민을 업신여기거나 밟고 서서 경제와 정치의 발전을 이룬 적이 없다. 20세기 초까지도 "해가지지 않는 제국"임을 자랑하던 영국이 저렇게 시들어서 경제의 2류국으로 전락한 원인도 농업을 살리지 못하고 먹을 거리를 외국에 기댄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우리나라 농촌을 하루 아침에 황무지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농민들이 모두 괴나라봇짐을 싸고 도시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잖아도 젊은이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이런저런 도시로 떠나서 총각은 보기 드물고 처녀는 가뭄의 콩보다 더 귀하게 눈에 뜨이는 농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녀자들까지 줄을 이어 대이동을 한다면 농촌사회는 뿌리부터 뒤흔들릴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농촌의 붕괴는 그 사회의 파멸을 뜻한다. 나는 "경제성장"과 과학화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본성을 뒤틀고 오그라뜨리는 요즈음의 "문명"을 보면서, 땅에 안기고 농민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 사회는 삭막한 정신적 폐허가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나는 열댓살 때까지 농촌인 고향에서 고향에서 살던 기억과 요즈음 청소년들의 생활을 비교해보면서 그런 위기의식을 더 절실히 느낀다. 6·25전쟁이 터진 이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우리 또래는 참으로 고달프고 쓰라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벽이 날아간 교실은 거적으로 창을 삼았고 책상이나 걸상은 아예 없었다. 볼펜은 커녕 몽당연필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겨울철에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언 몸을 녹이려고 담벼락에 늘어서서 "기름짜기"를 했다. 밀려나는 아이가 꼴찌가 되는 그 놀이를 하다보면 어느 새 몸이 후끈거린다. 그것이 난로였던 셈이다. 도시락은 사치품이었다. 4학년 때이던가, 점심시간에 집에 갔다온 한 아이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술냄새를 확 풍기는 그 아이는 당연히 선생님에게 호되게 매를 맞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끼니를 떼이지 못하던 그 아이의 집에서 양조장에서 얻어온 술지게미를 점심으로 먹여보냈다는 것이다. 요새는 돼지도 안먹을 그 "음식"을.
 이렇게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그때의 아이들은 신명나고 재미가 넘치는 삶을 살았다. 여름이면 마을 앞의 개천에서 알몸으로 헤엄을 치면서 물장구를 쳤다. 지금 아이들처럼 체육센터에 다니면서 수영 강습을 받는 것도 아닌데 물에 빠지면 제 한목숨 구할 실력은 모두 갖추었다. 겨울이면 그 개천은 썰매장으로 변한다. 널빤지에 각목을 대고 철사로 "스케이트 날"을 삼은 썰매를 타면서 아이들은 요즈음보다 지독했던 그 시절의 강추위 속에서 온종일 신바람을 냈다.
 어디 헤엄과 썰매뿐인가. 연날리기, 제기차기, 고기잡이, 씨름, 그네 , 구슬치기, 사방치기, 둘싸움, 철 따라 다양한 놀이와 "생활체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아이들은 어떤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김치보다 햄버거와 피자를 좋아하고, 마음껏 뛰어놀 터가 없어서 방안이나 오락실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오락"을 하거나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음악·미술·체육학원에 다녀야 한다. 거기에 어디 자연 속에서 우러나는 즐거움과 신명이 있겠는가. 그래서 영양은 좋아 덩치는 크지만 턱걸이 한번 하려면 발버둥을 치는 아이가 적지 않고, 벗과 어울려서 노는 즐거움보다 남을 누르는 데서 쾌감을 맛보는 청소년도 많다.
 어디 아이들만 그런가.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어른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마음놓고 마실 물도 공기도 없어서 출처가 아리송한 "생수"를 사서 마시고, 마음 먹고 등산이나 낚시나 골프를 가야 신선한 공기를 들여마실 수 있다.
 이 모든 비극은 우리에게서 농촌과 농민적 삶이 사라져가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농촌을 지키고 농민을 살리지 않으면 도시문화와 과학문명이라는 허깨비는 날이 갈수록 우리의 목을 더 거세게 조를 것이다.
 공룡처럼 다가오는 이 괴물 앞에서 나는 사라지는 땅의 숨결과 농민의 생명력 넘치는 문화를 새삼 그리워 한다.

작성자김종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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