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칼럼]문익환 목사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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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부활
김종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94년 1월 18일은 우리 겨레의 통일운동사에서 가장 슬프고 암울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아니 통일운동뿐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함께 일하던 민족민주운동가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평범한 사연들이 길이 잊지 못할 날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그날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서울 서교동 홍익대 앞의 어느 술집에 앉아 있었다. 가까운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20년 가까이 같은 길을 걸어온 김학민씨가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문 목사님이 돌아가셨대요." 짧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넋이 나가 있었다. "뭐라고?"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문익환 목사님이 저녁에 돌아가셨다니까요."
그는 분명히 농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얼근하게 올라 있던 술기운이 싹 가셔버린다.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문 목사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백두산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열하루 전인 1월 7일 낙원동의 어느 허름한 건물 6층에 "통일맞이 모임" 사무실이 문을 열던 때 문 목사는 20대 청년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으면서 술잔을 부딪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영원한 청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문 목사는 1918년 6월 1일 만주 북간도 화룡면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문 목사의 할아버지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가 좌절을 겪은 뒤 고향인 함경도에서 동지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넘어갔다고 한다. 시인 윤동주의 집안도 그때 북간도로 들어간 개척자들의 무리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윤동주와 문익환은 소꼽동무로 자랐으며 평양의 숭실중학교 함께 다녔다.
소년 문익환은 이주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목사가 된 아버지 문재린과 애국심이 강하고 활동적인 어머니 김신묵의 영향을 받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할 정도로 기개가 강했다.
이런 성장과정을 거친 청년 문익환은 1947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 뒤 30년 가까이 그는 그야말로 성실하고 진지한 성직자이자 구약연구학자로서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75년 8월 어느 날 그는 오랜 벗 장준하의 죽음에 부딪치면서 그를 에워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다. 또 이보다 넉달 전에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람들 여덟명을 사형한 사건도 문 목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문 목사는 신구교 성서 공동번역 책임자였으며 그 자신의 고백대로 "윤동주에 대한 시적 콤플렉스"를 안고 좋은 시를 써보려고 애쓰던 늦깍이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은 문 목사를 가장 전투적이고 열정적인 민주투사로 변모 시켰다. 그는 76년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3.1 민주구국선언"을 초안함으로써 김대중씨를 비롯한 재야인사들과 함께 투옥되는가 하면 85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으로서 6.25 전쟁 뒤 남한사회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전국적 연합조직을 이끌어나갔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투지와 치열함을 감옥을 드나든 횟수로만 따질 수는 없지만 문 목사는 여섯 번에 걸쳐 10년이 넘는 세월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그것도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시작한 징역살이가 아니라 회갑이 가까운 나이에 "입문"한 것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1973년에 펴낸 "새삼스런 하루"는 그야말로 청순한 문학청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꿈을 비는 마음"(1978년),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년), "한 하늘 두 하늘"(1989년), "옥중일기"(1991년)로 해를 거듭해갈수록 민족·민중문학의 큰 봉우리를 이루어갔다.
문 목사는 또 옥중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인 박용길 장로에게 편지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편지를 묶은 책이 세 권이나 나왔다.
문 목사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89년 3월 하순에 결행한 평양 방문이었다. 그 당시에 집권세력이나 대부분의 언론이 "감상적 통일론자" "치졸한 몽상가"라고 비난했고, 그것이 "공안정국"에 빌미를 주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문 목사는 통일에 물꼬를 트려면 한 몸을 희생하는 획기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평양을 찾아갔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문 목사는 "민중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후반에 옥살이를 하면서 한방의학이 혈에 관한 공부를 한 끝에 "파스요법"이라는 독창적 치료법을 개발했다. 꽂았다가 빼는 침보다는 훨씬 오래 혈을 자극하는 파스쪼가리를 붙임으로써 효력을 높인다는 치료방법이었다. 실제로 문 목사의 파스요법으로 고혈압은 물론이고 지혈압, 불면증, 위장병, 신경통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 목사는 연구와 질료를 바탕으로 건강법에 관한 책을 준비해서 곧 펴낼 계획이었다는데 애통하게도 그것은 유고집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 목사는 정신과 육체가 함께 건강해서 "영원한 청년"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는 분신한 청년들의 병상에 한밤중이라도 달려갔고,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밤을 새우는 모임에서도 꼿꼿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양친이 모두 아흔을 넘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문 목사도 당연히 그렇게 장수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당신이 떠나고 나니/ 당신이 우리의 모든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니/ 나의 꿈 나의 희망, 우리들의 행복이/ 모두 당신을 딛고 서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니/ 우리는 당신이 누워 죽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비로소 알았습니다."
민통련 시절 문 목사를 의장으로 모시고 일하던 김영환씨(지금은 치과의사이며 시인)가 "정세연구" 2월호에 쓴 추모시의 일절이다.
우리는 겨우 이제야 문 목사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쇠는 나이로 일흔일곱이었는데도 젊은이들이 온갖 집회, 갖은 굿판에서 혹사하기를 밥 먹듯 했다는 아픈 반성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문익환 목사는 반드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에 부활하리라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동안 갈라지거나 갈등을 보이던 재야운동권이 "하나 되자"고 소리를 모으는 것이 그 부활의 증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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