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장애인 기념일과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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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기념일과 장애인
박재순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장애인운동위원회 위원)
4월은 부활절과 4·19기념일이 겹쳐서 자연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함께 경험할 수 있고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젊은이들의 민족정기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복된 절기이다. 이런 시기에 장애인의 날을 제정해서 장애인의 삶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장애인은 누구인가? 장애인은 말 그대로 사고나 질병으로 정신이나 신체에 장애를 지닌 사람이다. 대략 전체인구의 10분의 1이 장애인이라니까 남한사회에는 4백만 명 정도가 장애인이라고 생각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산다. 장애인도 사람인데, 단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차별과 편견 속에서 무시당하며 소외당하고 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서 박대를 받고 수치스런 존재로 갇혀 지내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은 비정상인이고 비장애인은 정상인이라는 편견이 사회를 지배한다.
장애인은 결코 비정상이 아니다. 보장구를 통해 제거하면 장애인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장애인은 결코 무능력자가 아니다. 장애인은 ‘다른 방식으로 능력있는 존재’이다. 장애인도 사랑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와 과학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복지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어느 수준에 이르렀나? 먼저 선진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다리가 불편한 2급 장애인인데, 미국의 뉴용에서 1년간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과 서울은 인구수로 보나 도시의 성격으로 보나 비슷한 도시이다. 그런데 서울거리는 걷는 것과 뉴용거리를 걷는 것은 너무나 달랐다. 우선 뉴욕에서는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도로가 반듯하고 도로의 턱을 깎아서 걷기에 편했다. 나는 또한 뉴욕에서 육교를 본 일이 없다. 지하철 때문에 지하도가 있지만 지하도는 결코 길을 건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하도가 있는 위로 건널목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를 타기도 쉬웠다. 안전운행을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장애인이 버스를 탈 수 있다. 또한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계단을 오르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는 휠체어를 올릴 수 있는 장치와 보조계단이 버스 출입구에 부착되어 있어서 언제나 이용할 수 있다.
뉴욕에서 3층 정도의 건물들에는 대부분 승강기가 있다. 거의 모든 건물에는 장애인이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에는 장애인 전용주차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에서는 장애인이 장애 때문에 교육을 받는데 지장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모든 분야에서 장애인 우선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
국민 1인당 소득이 7천불에 이르고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 나라의 장애인복지 수준은 후진국 수준이다. 교통환경만을 보더라도 장애인에게는 지옥이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은 엉망이다. 보도블럭이 반듯이 깔려 있는 곳이 드물고 도로의 턱이 높고 육교도 많고 지하도도 많은 나라이다. 많은 장애인은 버스와 지하철을 탈수 없다. 교회도 학교도 공공건물도 장애인을 배려한 건물은 드물다. 또한 특수학교가 모자라 1백명 당 85명의 장애어린이가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집에서 갇혀 지내는 현실이다.
그러면 그동안 왜 이렇게 장애인을 외면했나? 가부장제적인 유교문화와 군사문화에 젖어서 장애인을 생각하지 못했다. 유교문화는 어른, 남성, 높은 사람 중심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강요했고 장애인과 같은 약자를 무시하고 외면하게 했다. 일제 때부터 80여년 동안 우리를 지배한 군사문화는 철저히 강자 중심의 사고를 강요하고 약자를 무시하고 짓밟는 삶을 정당화했다. 고통당하는 약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여기에다 경제 성장위주의 정책과 자본주의적 생존경쟁 원리는 장애인을 쓸모없는 존재, 무능한 존재, 수치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게 했다.
선진국의 대열에 끼겠다는 문민정부의 장애인복지정책은 어떤 수준인가? 정통성이 없는 군부정권에서는 사회복지국가를 표어로 내세우고 복지정책을 강조하는 편이었는데 문민정부를 자처하는 현정권은 국가경쟁력을 앞세우고 장애인복지정책을 뒷전에 밀어 놓았다.
정부의 일반예산이 43조를 넘는데 장애인을 위한 예산은 0.1%에 해당하는 520억에 불과하다. 일반 예산 외에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을 포함하면 장애인을 위한 예산은 총 예산의 0.05%밖에 안된다. 그 예산의 80%는 장애인 수용시설 인건비와 운영비로 사용한다. 장애인을 위한 예산이 절대 부족하다. 장애인이 인구의 10%라면 예산도 거기에 걸맞게 책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말고도 장애인정책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정부는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 확충에 힘쓰고 있다. 장애인을 수용하는 복지시설은 장애인을 비사회화 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이것은 바람직한 장애인복지정책이 아니다. 장애인이 사회속에 통합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이 사회속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비장애인들의 주거지역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장애인들의 공동생활을 추구한다.
선진적인 장애인복지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발상과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장애인을 귀찮은 존재로, 마지못해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가련한 존재로 보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장애인의 삶에서 배우고 장애인과 더불어 공동체 세상을 이루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강인한 투쟁에서 배워야 한다. 절망과 죽음을 이기고 끊임없이 일어서는 장애인의 믿음과 삶에서 부활의 생명, 삶의 기적을 본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버리고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처럼, 장애인을 버려두고는 온전한 공동체, 성숙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장애인이 사회적 건강과선진화의 척도이다. 그 사회의 바닥에서 고통받는 장애인이 기쁘게 사는 사회가 참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이다. 현대사회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었기 때문에 인간성과 공동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에 빠져서 편리와 쾌락을 추구하다 보니, 고난을 외면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성이 파괴되고 공동체의 기초가 무너진다. 고통을 딛고 삶의 승리를 이루는 장애인을 통해 고통의 감수성을 회복하자. 장애인의 아픔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참된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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