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칼럼]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 > 대학생 기자단


[김종철 칼럼]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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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
김종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사람들은 무엇이든 크고 높고 넓은 것을 좋아하거나 숭배한다. 산으로 말하면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것을 산악인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태평양을 조각배로 건넌 사람을 높이 평가하며, 키나 몸집이 큰 사람을 우러러본다. 작고 낮고 좁은 것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기독교 찬송가 중에서 아주 널리 불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노래는 ‘높은 데 계신’ 하느님을 향해 가려는 인간의 소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곳을 가장 높은 데로 여기는 것일까? 천국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바로 그곳이다. 천국은 물리학적 우주의 어느 한 지역은 물론 아니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예수를 본받으려고 애쓴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불교에는 극락이 있다. 아주 낮은 데 있는 지옥과 달리 높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극락은 기독교의 천국과 닮은 데일 것이다. 어떤 종교건 천국과 지옥을 갖고 있다. 딱히 종교라고 말할 수 없는 유교에만 그런 관념 또는 ‘실재’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요즘 지난 4월 한 달 나라 안을 뒤엎다시피 하면서 온 국민의 눈길을 끈 불교 조계종 사태를 보면서 종교는 과연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았다. 인간세상에 죽음도 병도 고뇌도 슬픔도 없다면 사람들은 교회나 절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즐겁고 기쁘고 신명나는 일들만 기다리고 있다면,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누가 하느님에게 기대고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할까?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렇게 약한 인간들의 신앙이나 신심을 이용해서 권세와 영화를 누리거나 축재를 하는 일부 ‘성직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알기로 한국의 교회와 사찰은 헌금이나 시주의 규모에서 세계제일임이 분명하다. 기독교에서는 십일조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는데,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교회들 가운데 한 주일에 수억원이나 되는 현금을 받는 단일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서양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 ‘배냇신자’지만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또는 사교를 위해 교회에 나간다. 우리나라처럼 ‘은혜받기 위해’ ‘복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헌금도 액수가 적다. 미국에서 큰 기금을 모으는 기독교인이나 단체는 텔레비전이나 다른 전파매체를 이용하는 쪽이다. 독일에는 아예 종교세가 있어서 교회가 헌금에 크게 기대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돈과 떼어놓고 종교를 생각할 수가 없다.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어느 큰 절은 시주돈의 규모가 엄청나서 몇 해 전에는 주지 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적도 있다. 북한산이나 관악산 같은 명산에 있는 절들도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공개된 적이 없다. 입학시험 철이면 애가 타는 부모들이 뭉치돈을 부처님 앞에 바치며 손이 닳도록 ‘합격 기원’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절에 시주나 공양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이태 전인가, 나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방도시에 있는 한 유명사찰의 주지스님께 놀러갔다가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분은 아주 대범하고 소탈해서 술도 잘하고 잡기에도 능하다. 그날이 마침 주지스님의 생일이어서 나와 함께 간 대여섯 명이 주지실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도박판이 벌어지면 재미삼아 구경을 하는 나는 스님과 속인들이 어우러져 ‘피박’ ‘설사’ ‘독박’ ‘쇼당’ 같은 소리를 하면서 열을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스톱판에 한참 열이 오를 무렵 밖에서 스님을 부르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마침 그날이 주지스님의 생일이었다.
 “좀 기다리세요.”스님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들은 “빨리 나오시라.”고 아우성을 쳐대는 것이었다. 그래도 스님이 나가지 않자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사랑하는 주지스님/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을 막았다. 그래도 스님이 화투장만 ‘쪼고’ 있자 아낙네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 한 사람씩 ‘축 생일’이라고 쓰인 봉투를 방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여인들이 물러가고 고스톱도 끝난 뒤 스님은 봉투들을 책상에 쌓는다. “스님, 안 열어보십니까?” 내가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한 십만원씩 들어 있겠지요.”
 아주 솔직한 그 스님은 “사월 초파일이 대목인데, 그때 한해 ‘김장’을 담가야 한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때 2∼3억원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담백한 편인 그가 그 정도이니 다른 큰 절들의 살림살이가 어떨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종교와 성직자들이 하나같이 돈과 권력에 집착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가 20여년 가까이 사귀어온 분들 중에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목사님과 신부님, 스님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도시에 촘촘히 박혀 있는 저 교회당의 십자가들 아래서 기도하고 있는 성직자나 목회자들, 저 우람히 솟아 있는 대웅전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는 스님들 가운데 참으로 낮은 데 있는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피면서 슬픔과 아픔을 함께 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교회당도 성당도 절도 날이 갈수록 높고 넓어지기만 한다. 서울 어느 교회는 건축비만 2백억원이 넘게 들었다고 한다. 이름난 절들은 마치 관광호텔처럼 단장을 하고 불상의 높이와 대웅전의 크기로 힘자랑을 하려 든다. 예수와 석가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 속에서 먹고 자고 고뇌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석가모니는 한 나라의 왕자라는 자리를 버리고 고행의 길로 나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가르친 대자대비는 바로 기독교의 사랑으로 통한다.
 ‘저 높은 곳’은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예수와 석가의 소리가 살아 움직이는 데이다.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낮은 곳을 보라. 거기서 굶주리고 앓다가 죽어가는 이웃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라. 너희 교회나 절을 높이 세워 나를 섬기기보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

작성자김종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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