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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한 미국소녀에 관한 짧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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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소녀에 관한 짧은 기억
배태순 (경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미국 유학시절 나는 어느 시작장애 소녀를 통해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은 비록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따뜻한 인간애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항상 내 뇌리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시각장애 탓인지 내가 장애인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 소녀가 떠오르곤 한다.
 어느 봄날 나는 한적한 대학 캠퍼스에서 생각에 몰두하여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흠칫 놀라며 멈췄는데, 바로 나의 지척인 왼쪽에서 한 십팔구 세쯤 되어 보이는 시각장애 백인소녀가 머뭇거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왼편에서 서쪽으로 걸어오다가 내가 그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채고 서로 부딪치지 않기 위해 먼저 멈춰 섰던 것이다.
 나는 거의 부딪칠 뻔한 것에 당황해했다. 또한 잘 보이는 내가 그녀의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지 못한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어 “오 익스큐즈 미!” 하면서 미안함을 표시하고 그 교차점에 서서 그녀가 내 앞을 먼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시각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시각장애가 없는 내가 양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녀는 놀랍게도 내게 “아임 소리”하면서 “고 어 헤드”라고 가십시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에프터 유”하면서 그녀에게 먼저 교차점을 통과하라는 뜻을 전했다. 그때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내게 다시 “고 어 헤드” 라고 하면서 먼저 가라는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내게 준 맑고 아름다운 숭고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미소에는 자기를 생각해주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며 또 그것에 고마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더 버티지 않고 “땡큐”하면서 그녀 앞을 먼저 통과했다.
 그때 나는 시각장애를 가진 한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보여준 그 친절과 여유에서 인간의 무한한 존엄성을 느끼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장애인들이 자신의 신체장애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위축됨이 없이 밝게 살아가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그 사회에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모두가 예비장애인들이라고 얘기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진정 깊이 깨닫고나 있는가? ‘장애’에 대해서 마음 속 깊은 공감을 갖고 있는 비장애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요소를 꼽는다면 끈끈한 혈연의식을 꼽을 수 있다. 오랜 유교의 영향을 받아온 우리는 혈연으로 연관되지 않은 타인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특히 타인의 아픔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더 무심할 때가 많다. 오로지 나와 연관되는 부모, 친척, 친지에게만 관대하다. 나와 연관되는 사람이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보았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 태도는 아직 심각한 상태다.
 민주 복지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하지 않는가. 이 말은 사회의 구성원이 오로지 내 아픔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만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타인의 아픔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장애’에서 오는 삶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도 이제 좁은 혈연의식에서 헤어나야 한다. 그리고 선진국의 태도를 배울 필요성도 있다. 나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태도를 배워야 하겠다.
 친부모를 잃었거나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가정이 없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제공해주는 마음도 본받으면 좋겠다. 한족 팔목이 절단된 세 살난 남자아이나,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다섯 살난 소년, 여러차례 교정을 요하는 언청이 여자 아기를 입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모습에서 타인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는 선진적인 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사호ㅟ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다. 건강한 신생아일 경우에만 입양이 잘되지, 장애아 입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늘 장애아 입양은 해외입양으로만 이루어져왔다. 굳이 해외입양 문제만을 갖고 따질 생각은 없지만 이제 우리 사회도 좁은 혈연의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성자배태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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