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칼럼]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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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김종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요즘 서울 거리에서는 거지를 보기 어렵다. 더러 지하철역이나 육교 위에서 동냥그릇 하나를 덩그라니 놓고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사람들이나 거리의 ‘장님가수들’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재래식’ 거지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가 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대 초의 명물은 거지였다. 내가 자라난 충청도의 소읍에는 닷새마다 한번씩 서는 장날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거지들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곤 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로 시작되는 타령을 부르며 그들이 깡통을 두들기고 춤을 추어대면 아이들은 덩달아 신명이 나서 어깨를 들먹거렸다. 그렇게 몇 집을 돌고 나면 그들의 큼지막한 깡통에는 밥과 국이 그득 담겼다. 6. 25 전쟁을 치르고 난 그 무렵에는 밥도 반찬도 아주 귀했다. 웬만하게 산다는 집도 쌀에 보리를 섞어 끼니를 때웠고, 없는 사람들은 아예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지들을 푸대접하지 않았다. 모자란 밥상에서 음식을 여투어 깡통에 부어주곤 했던 것이다.
내가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는 일이 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그 어머니인 외증조모가 계셨는데 거지들의 각설이 타령만 들리면 어김없이 대문간으로 나가서 사랑 툇마루로 맞아들였다. 거기에는 비록 개다리소반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위한 밥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외증조모와 할머니는 거지들이 둘러 앉아 부지런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는 밥상머리에서 “많이 자시라”고 경어로 권하곤 했다. 다 해어진 잠뱅이를 입거나 벙거지 모자를 쓴 그 거지들이 풍기는 악취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우환으로 우리집 살림이 아주 기울어버린 뒤에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인심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한 그림으로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우리집뿐 아니라 그 마을에는 거지들을 그렇게 대접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요즘은 어떤가? 만약 서울의 어느 부자촌, 예를 들어 성북동 ‘성낙원’이나 강남의 호화주택가 아니면 평창동의 으리으리한 집 문간에 거지가 찾아왔다 하자. 그 거지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최첨단 전자장치를 통해 주인을 불러야 할 것이다.
“누구세요?” “네, 지나가던 각설입니다. 밥 한 술 줍쇼.” “누구라고요?” “거지인뎁쇼.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요. 먹다 남은 밥이나 반찬 있으면 좀 주십시오.” “그런 거 없어.” 찰카닥 소리와 함께 수화기는 거칠게 내려질 것이다. 어디 고급주택가뿐이랴. 어느 아파트에 가더라도 경비원부터 거지가 못 들어가게 막을 것이고, 어쩌다 아파트 문간까지 올라가도 말대꾸나마 하는 집이 있을까? 그나마 어느 달동네에서 그 거지가 식은 밥이나 라면 한 그릇을 얻어먹을 수 있을는지.
나는 이런 현상만을 보고 1950년대는 인심이 좋고 인정의 샘이 흐르던 시절이었고 90년대는 몰인정하기 짝이 없는 비인간의 시대라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험하게 된 데는 단순히 인간의 잘못만을 따질 수 없는 정치·사회·경제 문화적 원인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사회의 인간 파편화와 핵가족 제도, 극심한 생존경쟁이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독재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가 정치윤리와 사회정의를 갉아먹으면서 권력과 돈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도 좋다는 풍조를 만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를 뒤엎은 4월 혁명은 민주화의 꿈과 민족통일의 염원이 꽃으로 피어날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나 5.17 쿠데타라는 반동에 부탁쳐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씨와 김종필씨가 뿌린 쿠데타의 씨앗은 그 제자들이 전두환·노태우씨에 이르러서 악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 80년 5월 광주에서는 동족상잔의 전쟁 못지않은 살상의 참극을, 삼청교육에서는 야만의 극을 달리는 ‘수용소의인간백정질’을 빚어냈다. 그들이 자신의 인간됨을 부정하면서 민족공동체에서 일으킨 갈등과 분열을 어찌 다 적을 수 있겠는가?
군사정권과는 달리 ‘문민’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김영삼 정권은 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를 도덕적 혼돈과 몰인정과 자기중심주의의 바다로 표류시키고 있다. 나는 이 정권의 본질적 모순은 ‘30년 정통야당’을 표방하던 정치지도자가 어느날 갑자기 ‘타도의 대상’이라던 군사정권의 우산 아래로 들어간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출발이 그러했으니 합법적 절차를 거친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군사정권의 인맥과 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아 권력을 지탱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정권이 부닥쳐 있는 개혁의 장벽은 바로 그래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집권세력이 그렇다면 야당이나 재야가 강력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수권태세를 가주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가. 제일야당인 민주당은 지도부가 약하고 우리나라 정치의 최대 모순인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어서 집권하기에는 힘이 부친다는 인상을 준다. 전통적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재야세력 역시 확실한 구심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 시대의 대중적 지지와 실천력을 복원하려고 애쓰고 있다.
재야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나는 일인데 최근에는 직업적 운동가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고, 기왕에 재야운동에 몸을 담은 이들도 옛날처럼 의욕이 솟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 그들만을 탓할 일이겠는가. 사회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나 혼자, 내 가족만 잘 살자는 심리가 팽배해 있고, 이웃의 아픔에는 먼산바래기를 하는 것이 풍토병이 되어 있는 땅에서 재야운동이나 어느 특정한 부문의 사람들에게만 헌신과 우애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나는 재야에 관해서도 아름답고 흐뭇하고 짜릿한 추억이 많다.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70년대 후반에 감옥에 갔다 나온 학생이나 노동자나 농민이나 민주인사는 그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환대를 받았다. 하물며 옥살이를 하는 정치범과 그 가족들은 따뜻한 보살핌과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그들이 영웅이 되기를 바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이루는 일에 몸 바치는 것을 가장 높은 명예로 여기는 시대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사랑과 인정의 지도는 삭막하기만 하다. 이런 사막에서 아무리 권력을 잡고 재산을 쌓고 이름을 얻는다 해도 무엇이 그리 행복하겠는가? 나는 이 야멸찬 세태가 참말로 싫다. 나 자신도 그렇게 동화되고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옆 사람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향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의 노래를 불러준다.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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