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칼럼]굶주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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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에 대하여
김종철 (언론인)
요즈음 온 세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두 나라가 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카리브해의 쿠바가 바로 그 나라들이다. 르완다 사람들은 피가 피를 부르는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상을 당하거나 피난길에 한데 잠을 자며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원수처럼 맞서 싸우는 두 파 가운데 한쪽이 세력을 잡으면 다른 쪽은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리고 반대파가 득세하면 형세가 역전된다. 난민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뼈만 남은 어린이들이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먹을 것을 구걸하는 모습은 참담함을 넘어 절망을 느끼게 한다.
쿠바는 르완다처럼 끔찍하지는 않지만 가난에 짓눌린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미국 땅을 찾아가는 사진을 보면 저 나라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솟는다.
일찍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미국의 지배를 당하던 끝에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해서 미국의 발치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버티고 있던 쿠바. "들어라, 양키들아."를 외치며 그 나라를 매춘과 가난과 착취의 소굴로 만들었던 미국인들을 질타하던 나라. 쿠바는 옛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사탕수수를 주종으로 하는 농산물을 수출해서 그럭저럭 나라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옐친이 집권한 뒤 원유를 포함한 수입품에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게 높아진데다 미국의 경제 봉쇄까지 강화되어 카스트로 정권은 날로 심각해지는 가난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요즈음 하루에도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뗏목에 몸을 신고, 코앞에 있지만 그 원시적 항해수단으로는 멀고 먼 미국의 플로리다를 향해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르완다와 쿠바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특히 "신세대"라는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가난이 강요하는 굶주림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들과 이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보면 굶주림에 관해 마음도 몸도 무감각에 가까울 정도이다. 우리 사회에는 수는 적지만 아직 초등학교에 결식아동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굶주려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노동 능력이나 부양자가 없는 사람 말고는 라면으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배고픔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몸소 겪어 본 세대이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쇠는 나이로 일곱 살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해였던 것이다.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충남의 한 소읍에 살던 우리 집의 남자 어른들은 남쪽 어딘가로 피난했고, 어머니와 숙모와 나와 어린 누이동생은 30리쯤 떨어진 먼 일갓집을 찾아갔다. 실개천이 흐르는 깊은 산골의 그 마을에는 보리밥도 귀했다.
나는 퉁퉁 불어터진 보리밥 몇 숟가락과 노랑내 나는 간장이 전부인 끼니를 하루에 두 번 먹기도 어려웠다.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허기를 못 이겨 밤톨만한 땡감을 따 먹다가 속이 뒤집히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오누이를 껴안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피난 간 지 한 달 보름쯤 지났을 때이던가. 7월 하순 어느 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산길을 걷는데 갑자기 "쌕쌕이"라고 부르던 제트기가 머리 위를 나르면 소스라치게 놀라 땅에 엎드렸다가 허위적 허위적 거리면서 우리 마을로 들어섰다. 집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땅에 내려앉은 초가지붕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폭격을 맞은 모양이었다.
나는 없어진 집이 안타깝기보다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찾아야 할지 눈앞이 아득했다. 우리는 한 마을에 살던 "두부집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 분은 우리 할머니의 수양 동생이었다. 나는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인민군 1개 중대인가가 본부로 삼고 있는 그 집 대청에는 광주리에 하얀 쌀밥이 그득 그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사발에 밥을 채우기도 전에 미친 듯이 달려들어 손이 안보일 정도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깃국도 있었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나니 거기에 낙원이 보였다. 아 그때 그 쌀밥과 고깃국의 맛이라니! 꼭 4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그 행복한 기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마 인민군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징발한 먹을거리로 그런 음식을 장만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 집에 얹혀살던 덕에 한 달 남짓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나 9월 하순 들어 인민군이 물러가면서 우리는 다시 보리밥도 먹기 어려워졌다. 명절 때나 어쩌다 흰 밥 구경을 할까, 웬만큼 산다는 집도 보리밥을 하루 세끼 먹으면 흡족해 했다. 끝도 없는 그 굶주림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춘삼월 보릿고개가 오면 아이들은 쑥에다 밀가루를 버무린 쑥떡이나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랬다.
우리 세대는 60년대 말까지도 온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다. 배고픔은 그대로 삶의 일부였다. 요즈음 아이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라거나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그랬어."라고 쏘아붙인다고 한다.
그들은 철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굶주림의 체험이 없이 그 아픔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런 것을 걱정한다. 이 지구 위에는 먹고 입는데 근심거리가 없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우리가 막연히 인류애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이나 먼 나라 사람의 굶주림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를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평등은 이루려는 자세를 가질 수가 없다.
"나와 가족만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곳에는 사랑과 동정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저 젖빛 얼굴을 하고 비만증까지 앓는 어린이들이나 이른바"신세대"를 바라보면서 "자기중심주의의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황량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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