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네 개의 이름을 가진 여인 > 대학생 기자단


[단편소설]네 개의 이름을 가진 여인

본문

바이올린 선율이 나른한 공간을 뚫고 화려하고도 날카롭게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희뿌연 쪽 유리창 밖으로 재빠르게 흘러가는 검은 구름이 후덥지근한 오후 나절을 한층 북돋우고 있었다. 지영은 눈을 감은 채 피곤에 찌든 몸을 빗물에 얼룩진 벽에 기댔다. 낡은 카세트녹음기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린 선율은 궁기로 찌든 공간 속에 청명한 물방울을 뿌리는 듯했다.

 사라 장, 장영주라 했던가. 아직 아홉 살의 나이에 지나지 않은 소녀, 그 나이에 대가들이 평생을 바쳐도 이루기 힘든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아이였다. 비록 낡은 녹음기에서 나오는 3/4 크기의 바이올린 선율이지만 아홉 살 연주로는 곧이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살갗을 칼로 베었을 때의 선혈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다고… 이 아이는 그와는 달랐다. 강렬한 힘, 나이답지 않은 여유와 화려함…그녀의 테크닉은 이미 완벽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사치스런 짓거리람. 아직도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지영은 보고 있었다. 이미 흘러간 강물이었다. 지영의 가족이 이 토방 동네로 흘러들어온 지도 벌써 일 년이었다. 그때 그 사고만 없었어도 아니 그 후 아버지 회사만이라도 부도가 나지 않았던들 우리 가족이 이 시궁창내 나는 서울의 외곽으로 밀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방동네는 당시 철거를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으로서 이 사회의 가장 최하층들이 살고 있는 말하자면 게토와 같은 땅이었다. 당연히 상당수의 주민들은 병자이거나 장애인이다. 지영은 자신이 장애를 입고서야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직업조차도 이 땅에선 주어지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난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우리 가족이 공교롭게도 이 지옥 같은 땅에 처박히게 되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한때 지영은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의 성장을 보장받은 재원이었다. 그런데, 지영은 노래를 무척 잘했다. 그녀의 음성은 무게를 느낄 수 없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런 노래 실력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지영은 재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지영은 대학에 휴학계를 냈다. 지영의 재즈가수로의 꿈은 부모님과 전면적인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뿐인 한 살 아래 남동생 수영의 정신적인 후원도 역부족이었다. 지영은 결국 집을 나왔다.

 지영은 아픈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지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내 선택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결정되었어, 그 선택이 잘못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일종의 운명이었으니까…"

 재즈가수로서의 출발은 화려했다. 재즈인들은 모처럼만에 대가수가 나왔다는 찬사를 보냈다. 국내 최고의 재즈뮤지션 모임인 딕시랜드 클럽에서 그녀는 질베르토 정으로 불렀다. 속삭이는 듯 애잔한 목소리가 전설적인 여가수 에스트라도 질베르토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일찍이 전설적인 섹소폰 주자 스탄게츠와 짝을 이뤄 영화 남과 여의 주제가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질베르토와 비교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재즈가수가 국내에서는 돈 잘 버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런 터에 지영 아니, 질베르토 정은 빠른 시일 내에 재즈 매니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다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부모와 수영에 대한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느덧 집을 나온 지 3년이었다. 당장에 부모님은 만나 뵙지 못하더라도 수영하고만이라도 연락을 취해 두고 싶었다. 그런 계기가 곧 마련되었다. 그 계기는 동시에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영은 그때 명문 S대학의 공학도였다. 수영은 미국 M.I.T 공대로의 유학을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사소한 이유로 수영과 지수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연인의 지난 우정을 잘 아는 지영은 어떻게 해서든 화해의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영이니, 잘 있었어?"
 지영은 수영의 기숙사에 전화를 했다.
 "누나! 어떻게 지냈어. 부모님이 누나 얼마나 걱정하는지 몰라."
 "난 잘 지내고 있어. 곧 부모님 찾아 뵐 생각이야."
 "음악이 좋아하는 친구녀석들 통해 누나 소식은 대강 듣고 있어. 누나 굉장히 유명한 가수라면서."
 "그건 그렇고, 수영아 한번 만나자."
 지영은 지수에게도 전화를 했다.
 "지수 잘 있었니? 나 지영이야."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통 소식도 없고."
 "그보다 너 수영이하고 어떻게 할래? 너희 둘이 어떤 사이였는데 그렇게 되었어?"
 "어떻게 되긴, 이젠 끝났어요. 더 이상 그 얘긴 하지 말았으면 해요."
 지수의 음성은 싸늘했다.
 "지수야. 너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자. 대신에 너 아주 예쁘게 꾸미고 나와야 해."
 지영은 큰 맘 먹고 장만한 빨간 스쿠프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갔다.

 지수가 진작에 알아보고 유리문을 두드렸다. 지수는 화사한 노란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아래에 선 지수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랄하고 아름다웠다. 수영은 나타난 석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수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삐 뛰어왔다.

 "누나, 미안 미안, 좀 늦었어…"
 수영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너 애인 생겼냐? 그 옷차림 그게 뭐냐?"
 수영은 지수에게 부러 짜증을 부려보았다.
 "내가 애인 생기믄, 니가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 내 옷차림에 대해 참견 마."
 "자, 자, 아저씨 아가씨 이러지들 말고, 차들이나 타라고."
 지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을 뒷좌석에 몰아넣었다. 지영은 자동차 키를 넣으며 말했다.
 "장흥 어때, 우리 오랜만에 장흥 가자."

 백미러를 통해 여전히 서먹한 모습의 두 사람이 비춰지고 있었다. 어느덧 차는 교외로 빠지고 있었다. 장흥이 가까이 오면서 행군하는 일군의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행락지답게 기묘한 모습들의 유흥업소들이 다투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지영은 미리내로 차를 몰았다. 미리내는 숨겨진 실력자들이 종종 모여 작은 콘서트를 하는 업소였다. 지영도 몇 번 이 무대에 선 일이 있었다.

 지영은 영수와 지수를 데리고 통나무집 건물로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장식물들이 친근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영은 딕랜드 클럽 친구들과 아무 스스럼없이 껴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들은 대개 지영보다 나이가 많고 심지어는 턱수염이 덥수룩한 50대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모두들 친구로 통했다.

 지영은 수영과 지수 둘만을 위한 연주회를 꾸며놓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가 윤기 있게 한바탕 재주를 부론 후에 첼로의 굵직한 울림이 애무하듯이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여기에 끈적끈적한 테너 섹소폰이 꿈꾸듯이 울리며 서로의 영역을 해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어나갔다. 질베르토 정은 가벼운 손과 발놀림으로 장단을 맞추며 기회를 엿보다 끼어들었다. 질베르토를 연상시키는 새털처럼 다롬한 음성이었다. 가슴이 깊게 패인 흰 이브닝드레서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수영과 지수는 전혀 예측치 못한 일이 지영에 의해 연출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졸리는 듯 가물가물하는 조명 아래 이따금씩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들이 고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들은 때론 심각해지기도 하고 때론 배꼽을 쥐면서 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무슨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수영과 지수들을 끌어들인 건 두 연인을 위한 지영의 최대한의 애정이랄 수 있었다. 지영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듯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부드러워져 갔다.

 "제가 오늘 특별히 제 아는 두 연인을 위해 준비한 곡이 있습니다. 두 연인은 흔히들 겪을 수 있는 사랑의 의심에 빠져 있습니다. 두 연인이 다시 가까워질 수 있도록… 남과여의 주제가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질베르토 정은 윤기 있는 목소리로 곡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질베르토 정은 구렛나루가 인상적인 남자가수와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속삭이듯 노래했다. 수영과 지수는 이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모든 시공이 두 사람을 위해 정지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어둔 창밖으로 낮게 깔리는 짙은 안개를 뚫고 아련한 강물소리만이 고요를 다독이고 있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안개였다. 지영은 근래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 지영의 의도대로 수영과 지수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운전에 어지간히 까다로운 안개였지만 연인을 가깝게 하는 데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흐느끼는 빠트리샤 카스의 "나의 연인"이 나직이 흐르고 있었다. 두 연인을 위한 지영의 계속되는 배려였다.

 지영은 백밀러를 흘낏 쳐다보았다. 지수는 수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지영은 은근히 질투가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푸훗, 하고 저절로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이것은 지영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강변도로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비가 듣기 시작했다. 지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빗물이 거침없이 앞 유리창을 범접해 시야를 가렸다. 앞 차량들의 후미등이 일그러졌다.

지영은 잔뜩 긴장을  하고 운전대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영과 지수는 미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휙휙 소리를 내며 옆의 차들이 급히 지나갔다. 차 밖의 공간은 일순간에 뒤죽박죽이 되었다. 마음들이 다들 급해졌다.

 지영의 눈앞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밝은 빛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 빛은 점점 면적이 넓어졌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끼익, 하는 비명소리를 냄과 동시에 빛은 지영의 시야를 덮쳤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끝이었다.
 지영은 눈물을 목으로 삼키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이후는 온통 혼돈 투성이었다. 이상하게도 지영은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이 편안했다. 결과의 심각성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생각만 했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지영은 두 사람보다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그 둘에 비하면 경미하다는 것이지만 지영은 다리 근육에 치명상을 입었다. 수영은 불행히도 목뼈를 다쳤다. 전신마비였다. 그런데, 지수는… 지수는… 지영에게 가슴 저미는 슬픔이 엄습했다.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던 두 남녀, 미래의 삶을 보장받은 두 연인이 자신의 잘못으로 이제 더 이상 지상에서는 만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후의 집안은 태풍이 쓸고 간 폐허와 다름없었다. 수영의 눈물겨운 재활치료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수영은 비록 평생 장애를 갖고 살게 되었지만 비교적 큰 어려움은 없는 듯 보였다. 수영에게 들어가는 치료비와 재활비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생활형편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수영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아버지께서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박이사란 자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박이사란 사람의 농간으로 아버지 회사는 부도를 내고 철저하게 쓰러졌다. 그나마 호전되어 가던 수영의 치료를 계속할 수 없었다. 수영은 어쩔 수 없이 충청도 어디에 있다는 장애인 수용시설에 수용되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이사란 자를 당신께서 직접 붙잡아 혼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이상씩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이 토방동네로 옮겨온 이후에도 아버지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팔자에도 없는 파출부 일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자상했던 아버지의 인격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갔다. 전에 없던 쌍소리를 어머니와 지영에게 퍼부어대는가 하면 폭행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지영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고 이후 딕시랜드 클럽 사람들과도 소식이 끊어졌다. 재즈가수의 수입으로서는 쓰러진 집안을 되살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은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굴뚝같았지만 가족을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쪽유리창 밖의 검은 구름의 흐름이 더욱 빨라졌다. 한층 거칠어진 바람소리가 유리창을 들볶았다. 바람은 엉성하게 판자로 짜여진 지붕을 날려 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콰당, 하고 낡은 철대문이 열어젖혀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퉁명한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은 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끄댕이를 끌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년아, 나 우습게 보지 마. 그 박이산가 그 자식 붙잡으면 네년한테 받은 수모를 곱으로 갚아줄 테니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려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냅다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수영 아버지,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어요. 그 놈에 술 좀 그만 마시고… 수영이, 지영이도 생각해야 할 거 아녜요?"
 어머니는 차라리 울고 있었다.
 "뭐! 이년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저년 저 지영이년만 없었어도 수영이가 저렇게 되지는 않았어. 저년이 다니라는 대학이나 착실히 다녔으면, 그놈에 가수질을 하느라 나가지만 않았으면, 수영이가 저리 되지는 않았어."

 지영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지영은 울먹였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렇게 자상하시던 아버지가 왜 이렇게 변하셨어요. 저도 이렇게 된 것은 괴로워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셔야 우리집안도 다시 일어설 게 아녜요.

 "그래 너 마침 잘 나왔다. 네년이 아직도 그렇게 할말이 많다 이거지. 그래 말해 봐. 말해 보라구.."
 아버지는 지영을 거칠게 끌었다. 그 서슬에 지영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싸가지 없는 것이 공부 잘하는 애를 끌어내 이 모양으로 만들어! 넌 우리 집안 망쳐 논 망종이야."

 지영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버지 너무 하세요. 차라리 제가 이 집을 나가 버리면 될 거 아녜요!"

 지영은 설움에 북받쳐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영은 지팡이를 서둘러 찍으며 어디론가 정신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서서히 어둑해져가는 공간을 헤집고 들어왔다. 오늘따라 그 빛이 그렇게 유혹적일 수 없었다. 지영은 차라리 뛰어들까 생각을 했다. 갑자기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영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파란색 신호등이 급하게 깜빡거렸다. 지영은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지영은 가족을 놔두고선 아직은 죽을 수 없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선 지영의 울적한 마음 같은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 세 시였다. 형준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모니터 앞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조용했다. 컴컴한 방안에 존재하는 것은 형준과 활자로 가득 채워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뿐이었다.

 난생 처음 써보는 소설이었다. 삼류 잡지사의 평범한 기자로서 연예기사 나부랭이 따위 기사들이나 써왔지만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글에 손댄 것은 처음이었다. 소설이란 것이 심심풀이 기사와는 달리 사람을 긴장시키는 작업이란 것을 형준은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막혔다. 그래도 이 밤 안에는 마치리라 다짐했다. 형준이 익숙치 않은 일에 손을 대개 된 까닭은 질베르토 정이란 재즈가수 때문이었다. 이 한 여성이 과거에 무어라고 불리웠던 간에 형준에게는 질베르토 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형준은 한때 마일즈 데이비스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이 흔한 대중가요에 빠져있을 때 형준은 아웃사이더처럼 재즈 연주가 있는 곳을 즐겨 찾아 다녔다. 형준은 자연스럽게 질베르토 정이란 재즈가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질베르토 정은 영문도 없이 증발했다.

대략 5년 전의 이야기다. 주목받던 재즈가수의  돌연한 실종은 그야말로 미스테리적이었다. 그 후로 형준은 질베르토 정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풍문에 의하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도 하고 심한 장애를 입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느 업소에선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형준은 책상에서 일어서서 달빛이 비치는 베란다로 걸어갔다. 소아마비로 인한 경미한 장애가 형준을 약간 흔들리게 했다. 형준은 질베르토 정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생각했다. 형준은 얼마 전 일간지 구석기사의 미담 주인공과 질베르토 정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실제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준은 담배연기를 덤덤하게 허공에 내뿜었다. 한층 깊어진 가을을 느끼게 하는 바람이 허허로이 불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영은 개의치 않았다. 지영은 목적지없이 거리를 걸었다. 빗물이 얇은 브라우스를 스며들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길이 점점 무거워졌다. 밤도 어지간히 깊은 듯해서 빗발이 부쩍 잦아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베르토의 노래였다. 지영은 자신이 질베르토 정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던 시절이 아득한 옛날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다르게 변한 때문이었다. 질베르토의 달콤한 음성이 가까운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영은 추억을 훑듯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영은 자신이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유리창으로 언뜻 그림자가 비치는 듯하더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공교롭게도 지영의 지팡이를 슬쩍 건드렸다. 지영은 순간 현기증을 일으키며 비틀거렸다. 지영은 그만 빗물이 괴어있는 보도블럭으로 쓰러졌다.

 "이봐요. 아가씨! 다치지 않았어요."
 젊은 청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지영은 억센 힘에 이끌렸다. 청년은 지영을 부축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날씨도 좋지 않은데, 흠뻑 젖도록 어디를 다니는 거요."
 지영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지영은 지쳐 있었다.
 "근데, 아가씨를 어디서 봤더라. 기억에 많이 익은데… 그건 그렇고, 지쳤을 텐데 잠시 방에 들어가 쉬어요."
 
청년은 무척 인정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청년은 자신 때문에 지영이 넘어진 것에 자책감을 느꼈던지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될 친절까지 베풀었다. 지영은 온몸에 오한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운밥 찬밥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청년은 한동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아, 아가씨 혹시 질베르토 정이라고 아세요? 아가씨 질베르토 정하고 무척이나 닮았어요."
 지영은 순간 당황했다. 지영은 그동안 부쩍 야위었고 사고로 인해 볼에 가벼운 흉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자신이 한동안 질베르토 정을 흠모하던 팬이었다는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묻지도 않은 말들을 주절이 풀어내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이 엄습해 왔다.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청년이 뭐라고 또 한마디 했다. 아마도 청년은 자신이 나갈 일이 있는데 깜박 잊었다며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지영은 화사한 의상을 입고 눈에 익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졸리는 듯 가물가물한 조명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장식물들이 보이고 이따금씩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고혹스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여기저기 쌍쌍이 앉아 있는 연인들 사이로 수영과 지수의 행복해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 사방이 안개로 뒤덮이고 빠뜨리샤 카스의 탁한 노래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것도 잠깐, 순식간에 빗방울이 후두룩, 듣기 시작하였다. 지영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갑자기 눈앞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밝은 빛이 다가오더니 지영을 덮쳤다. 끼이익. 하는 금속성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지영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껴안고 쓰러져 있는 수영과 지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영은 아악! 소리를 지르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갑자기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어지며 지영을 결박했다.

 지영은 번적 눈을 떴다. 억센 힘이 지영을 누르고 있었다. 지영은 비명을 지르며 그 억센 힘을 밀쳤다. 모든 것이 청년의 의도에 따라 끝난 후였다. 지영은 경황없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려했다. 억센 힘이 재차 지영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아가씨 어딜 나가요. 저렇게 비가 오는데…"
 지영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아가씨, 정말 미안해요. 내 욕심에 본의 아니게… 울지 말고, 보아하니 어디 갈 만한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나도 알고 보면 좋은 놈이요. 그리고 아직 결혼도 못했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나하고 여기서 삽시다."

 지영은 맥이 탁 풀렸다. 지영 자신으로서는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지금 지영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부모님과 수영을 생각하면 자신의 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잘 생각했어요. 난 첨부터 아가씨가 질베르토 정과 너무도 닮아 첫눈에 반했어요."
 청년은 호탕하게 웃으며 기꺼워했다. 청년은 거친 외모와는 달리 무척 자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지영은 질베르토 정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한 듯했다. 지영은 당분간은 집에 연락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더럽혀진 자신의 몸을 생각하면 부모님을 뵐 면목이 안 섰다.

 지영은 청년을 도와 점원노릇을 충분히 했다. 청년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늘 싱글벙글했다.
 청년은 보기와는 달리 예술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변두리 레코드가게지만 이름있는 대중음악인들이 들러 청년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영은 종종 보았다.

 지영은 어느 날 망설이며 청년에게 부탁을 청했다.
 "서용씨, 저 노래를 하고 싶은데 좋은 작곡가를 소개해 줄 수 있으세요?"
 "아가씨가 노래를?"
 "저 밤업소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꽤 인기 있었어요."
 "그래요! 그야 노래만 잘한다면 내 친구 중에도 쓸 만한 놈들은 많은데, 아가씨의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청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꼭이에요 서용씨. 기회만 마련해줘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한때 음악적 자부심이 다분했던 지영은 이제 대중가요라도 기꺼이 해볼 생각이었다.
 "뭐, 그래요. 굳이 아가씨가 원한다면야 내 곧 기회를 마련해 볼께요."

 지영은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청년은 그것이 기뻤다. 서로 스스럼없이 농담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그 이후로 청년은 더 이상 지영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지영씨, 준비해요. 날 따라와요."
 "무슨 일인데요. 서용씨?"
 "글쎄 따라오면 알아요. 좋은 일이 있어요."

 밖에는 낡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청년이 급히 빌려온 것이었다. 차는 압구정동 번화가에 들어섰다. 골목을 몇 번 꼬불꼬불 돌더니 마치 피아노를 연상시키는 듯한 현대식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금진홍 연예센터라는 활자가 선명히 들어왔다. 스타제조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엇, 서용이 웬일이야. 여기까지 왕림을 다 하시구. 오훙 이 아가씨가 네가 소개하려는 그 아가씨야? 자네의 감각은 인정하지만 이번만은 헛짚은 게 아닐런지?"
 금진홍 사장은 의심 많은 눈으로 지영을 위아래로 흝어봤다. 지영은 불쾌했다. 금진홍씨는 마치 유도 선수처럼 풍채가 대단했고, 얼굴은 마치 술 마신 사람처럼 불쾌했다. 한마디로 첫인상이 나빴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지영으로서는 가수되는 것이 최우선의 꿈이었다.

 "서용이가 소개하는 건데 어련하려고, 좋았어. 노래부터 들어보자고."
 금사장은 다혈질이었다. 피아노 반주는 서용이 손수 맡았다. 지영의 적성을 보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최신 유행가요를 선곡했다. 지영의 노래가 시작되면서 함께 입회한 여러 음악인들은 긴장했다.

 서용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영이 교묘하게 목소리를 변형시키고 있지만 전형적인 재즈 목소리였다. 목소리도 질베르토 정과 너무 닮아 있었다. 서용은 혼동을 일으켰다. 그 화려한 질베르토 정과 그날의 초라한 형색의 다리 저는 지영과의 연관성은 너무도 없었다. 서용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놀란 것은 서용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아무 무리없이 처리하는 지영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금사장은 시종일관 팔장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세계에서 닳고 닳은 인물이었다. 결코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어도 특유의 감각은 자타가 인정했다. 특히 물건을 만드는 데는 탁월했다.

 "좋았어, 됐어, 됐다고."
 금사장은 쩌렁쩌렁 울리게 손뼉을 몇 번 쳤다.
 "트로트야, 트로트, 트로트로 미는 거야."

 서용은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전에 들은 지영의 트로트가 남다른 감칠맛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영의 목소리는 트로트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금사장의 영향력을 익히 아는 터라 감히 반박할 엄두가 안났다.

 "가창력이 대단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창력만 가지고는 먹히지가 않아.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쩔뚝거리는 다리로 댄스뮤직을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트로트가 안성맞춤이지. 마침 트로트 여가수의 명맥도 끊긴 상태고. 분명히 주현미를 능가하는 물건이 될거야. 그럼, 이름부터 고쳐야 하는데… 올커니 조미자, 조미자가 어때. 이미자의 대를 잇는다는 뜻으로.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괜찮은데, 거 얼굴의 상처가 걸리는구만. 그리고 아가씨는 성적인 매력이 부족해. 얼굴을 좀 뜯어고쳐야겠어. 그리고 그 지팡이도 좀 집어치우고."

 일사천리였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끼어들을 여지는 없었다. 금사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가수의 의상까지 직접 챙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자 그럼 당장 착수하자고. 우선 밤업소 몇 군데에 세우고 반응을 보자고. 잘만 되면 한 달 내에 방송출연도 가능할 거야. 그보다 우선 얼굴부터 뜯어고치라고." 금사장은 돈 한 다발을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서용은 혹 지영이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지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가족을 살릴 수만 있다면, 철저하게 트로트 가수로 변신하리라 다짐했다. 물론 고칠 수 있다면 얼굴도 뜯어 고칠 생각이었다.

 금사장의 의도대로 밤업소에서 반응이 좋았다. 금사장은 행여나 지영의 장애가 인기에 영향을 끼칠까봐 철저하게 장애를 숨기기 위한 무대연출을 했다. 심지어 얼굴까지 드러내지지 않았다. 대부분 지영은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했고 때로는 지팡이 없이 서 있어야 했다. 얼굴 없는 가수로서의 전략은 성공이었다. 금사장이 동시에 추진한 것은 트로트 메들리 음반제작이었다. 이것도 대성공이었다. 업소마다 조미자의 트로트 메들리를 틀었고 리어카마다 조미자의 불법복사 테잎이 범람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안달이 난 것은 연예부 기자들이었다. 금사장은 철저히 기자와의 인터뷰를 차단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행여 조미자의 장애가 알려지면 흥행에 도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영은 나름대로 금사장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금사장의 모든 지시에 따랐다. 지영은 철저하게 조미자로 변신하기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얼굴을 뜯어고쳤다. 그녀는 노래에 관한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재즈가수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철저하게 트로트 창법을 구사했다. 서용은 그녀의 이런 능력에 놀라고 있었다.

 금사장은 조미자의 첫 앨범이 성공을 거두자 유능한 작곡가에 의뢰해 두 번째 앨범을 제작했다. 신세대트로트라는 부제를 달았다. 메들리만으로는 방송을 뚫기는 어려웠다. 조미자만의 노래가 필요했다. 이것도 방송에 진출하기 위한 금사장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8월에 접어들면서 A방송사에 조미자의 장애를 철저히 감추는 연출을 요구했다. 조미자의 모습이나 심지어는 얼굴을 제대로 본 대중은 없었다. 조미자의 모습을 부각시키기보다는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연출에 주력했다. 심지어 앨범 자켓에 실린 조미자의 얼굴조차도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그에 따라 대중의 궁금증은 높아만 갔다. 방송사마다 조미자의 얼굴을 보기 원하는 팬들의 전화가 쇄도했고 대부분의 팬레터도 그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미자의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단번에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상위권에 진입했다. 지영 자신도 본궤도에 올랐음을 비로소 실감 할 수 있었다.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수중에 거금의 돈이 들어왔다. 지영은 우선 집에 그 돈을 부쳤다. 그 돈이면 당분간 부모님은 생계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영은 차마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지금 이대로 차라리 좋았다.

 9월 첫째주에 조미자의 노래는 마침내 국영방송사 D프로그램 가요 베스트 10의 1위에 올랐다. 이제 더 이상 조미자의 실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금사장은 인터뷰 금지를 과감히 풀었다. 금사장은 조미자가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꾸며댔다. 조미자는 가요 베스트 10, 1위 첫 공개녹화 때 지팡이를 짚고 나갔다. 20대 중반의 고혹적인 조미자의 외모와 지팡이라는 묘한 조화가 대중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조미자는 10월 첫째주 5주 우승으로 국내 최고 가수의 상징인 다이아몬드컵을 수유하게 되었다. 도하 일간지 잡지마다 트로트계의 진주가 나왔다고 온통 조미자의 기사로 도배했다. 금사장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금사장은 그날 밤 금진홍 연예센터에 방송관계자들과 연예인들을 대거 불러 모아 축하 만찬을 벌였다. 금사장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내노라하는 스타들을 일시에 불러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의 소유자다.

 금사장은 그날 흔쾌히 취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조미자와 서용, 금사장 세 사람만 남았다.
 "아 서용군, 오늘은 먼저 돌아가게. 오늘만은 미자하고 단 둘이만 있고 싶어. 앞으로 사업구상도 좀 할 게 있고 말야."
 "사장님 오늘 너무 취하셨습니다. 내일 아침 의논해도 될 텐데…"
 "사람, 걱정은, 이까짓 술쯤 아무것도 아닌데 뭘."

 서용은 불쾌했다. 지영의 인기가 높아감에 따라 가뜩이나 지영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불만이었다. 금사장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종종 있어온 터에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인기관리 문제도 있고 지영이 한창 급상승 중인데 별 일이야 있으랴 싶었다.

 "미자, 요즘 어때 인기를 실감할 만하지."
 금사장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예, 다 사장님 덕분인 걸 잘 알고 있어요."
 지영은 예의를 다해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에이, 공치사는. 나야 사람을 잘 발견했고, 미자가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지. 이제 미자는 신데렐라야. 암 신데렐라고 말고. 너는 내 보물이야."

 금사장은 지영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지영은 금사장의 급작스런 태도에 당황했다.
 "미자, 너 오늘 따라 유난히 이쁘구나."
 금사장의 손이 거침없이 지영의 허벅지로 파고들었다. 지영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그렇다고 물러설 금사장이 아니었다.
 "앞으로 너는 내 말만 잘 따르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위대한 가수가 될 거야. 암, 너는 틀림없이 내게 행운을 안겨다 줄 거라고."

 금사장은 껄껄 웃으며 지영을 덮쳤다. 지영은 조롱 속에 갇힌 작은 카나리아에 불과했다. 지영은 허탈해졌다. 이것이 국내 최고의 가수가 되고서 얻은 대가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해온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았다. 지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장과 전속가수라는 관계로 돌아갔다. 조미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금사장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지영에게 돌아가는 개런티에 대해 깐깐하게 참견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지명도에 금사장의 뛰어난 비즈니스에 힘입은 바 컸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불미한 일만 빼면 아무 문제 가 없었다. 조미자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조미자는 그해 연말에 각 방송사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지영에겐 너무도 가슴 아팠던 한 해가 가고 해가 바뀌었다. 그런데, 서서히 지영의 신체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2월에 이르자 그 변화는 명백하게 드러났다. 금사장의 애 였다. 지영은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전에 아무 미련없이 애를 지워버렸다. 서용만은 낌새를 첼 수 있었다. 서용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연예계는 민감했다. 조미자가 애를 뱄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유력인사의 이이일 거라는 주장이 강력했다. 지영은 끈덕진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거리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조미자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지팡이에 관한 것이었다. 조미자가 처음부터 자신의 장애를 철저히 은폐했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부상이었다면 지금껏 지팡이에 의지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사장은 무관심한 듯 태연을 가장했지만 내심으론 불안했다. 금사장은 한 술을 더 떴다. 금사장은 조미자를 버리기로 했다. 조미자에게 내연의 애인이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조미자는 원래부터 장애인이었다는데 교묘하게 은폐했다는 사실을 흘렸다.

 지영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매장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자들은 당연히 서용에게 눈길을 돌렸다. 서용은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서용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기자를 폭행했다.
 "금사장 이 개자식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

 서용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비밀에 대한 폭로가 잇따르자 신경과민이 되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간 지영은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들었다. 오늘도 조미자에 관한 기사는 줄을 이었다. 지영은 머리가 지끈 아팠다. 페이지를 다른 곳으로 넘겼다. 사회면에 눈길이 머물자 지영은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금진홍 사장 지난밤 무참히 살해!"
 지영은 재차 기사를 읽었다. 범인은 김서용으로 밝혀졌다. 지영은 현기증을 느꼈다. 지영은 억지로 방안으로 들어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그때 아파트 현관문을 급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미자씨! 조미자씨! 집에 있는 거 알고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시죠."
 기자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지영은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모든 것을 사실 대로 밝히기로 했다. 지영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10여명의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기자들이 소파에 둘러앉은 가운데 지영은 담담히 앉았다. 모든 것을 밝히기로 했는데도 테이블위에 얹은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조미자씨! 애를 베었었다는데 금진홍사장의 애가 맞죠?"
 "조미자씨! 자신의 장애를 숨긴 이유가 뭐죠?"
 "김서용씨가 조미자씨의 내연의 남편이 맞죠?"
 "금진홍 사장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앞으로 가수활동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는데 거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쉴새없이 터지는 카메라 조명이 지영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기자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사건이 터지기를 바라는 족속들 같았다. 지영은 모든 것을 담담히 시인하고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꼈다. 지영은 늦추지 않고 지영의 등 뒤에다 질문을 쉴새없이 내뱉었다. 지영은 이제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기자들은 모든 볼일이 끝났다는 듯 웅성대며 썰물처럼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지영은 무엇을 잘 못 해왔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온통 혼돈뿐이었다. 지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일요일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형준은 막 스스로 소설이라고 명명한 낯선 글을 탈고했다. 삼류잡지사의 평범한 기자에게 이 일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한 여성의 고난에 대해 파해 치려는 열정이 없었다면 이 글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중앙일간지 한 모퉁이에 미담 기사가 실렸었다. 정연숙이라는 장애를 가진 27세의 여인이 장애 여성을 위해 써달라면서 거금의 성금을 기탁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서울 인근의 T시에서 석류촌이라는 조그마한 술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석류촌이라면 형준이 풍문에 들은 바 있었다. 술집작부에 지나지 않는 여성이 손님을 상대로 이따금 그럴 듯한 재즈를 불러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한다하는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는 소문난 집이었다.

 형준은 재즈를 잘 부른다는 얘기와 그녀가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에 질베르토 정을 쉽게 떠올렸다. 비록 평범한 기자였지만 기자로의 특유한 감이 형준에게 있었다. 마침 형준이 근무하는 K잡지사에서도 이 미담의 기사는 화제가 되어 있었다.

 "김기자 이거 한 번 취재해 보지 그래. 나이도 많지 않은 여성이 거액을 쾌척한 것도 특이하고 게다가 취지가 장애를 가진 여성을 위한 것이라니 특이하지 않은가.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다른 잡지사서 이 여자를 취재하려고 그렇게 애들을 썼는데 번번이 거절당했다지 뭔가. 자네라면 취재에 성공할 런지도 모르겠는데."

 신부장이 형준에게 취재할 것을 권했다. 자네도 장애가 있으니까 서로 말이 잘 통할 거라는 뜻이었다. 형준은 관심이 있던 차에 마침 잘됐다. 싶었다. 형준은 날을 잡아 모처럼 교외로 나갔다. T시는 인적 드문 비교적 쾌적한 도시였다. 가을의 바람에 가로변의 코스모스들이 가벼운 율동을 맞추었다. 형준은 약도를 비교해가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통나무를 잘라 흰색 면에 석류촌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아름답지 않게 허름한 술집이었다. 형준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대체 재즈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술집이었다. 그런데 손님들은 비교적 점잖은 편인 것 같았다. 앳된 소녀가 반갑게 맞았다. 도마의 칼질 소리가 분주했다.

 "혹시 여기가 정연숙씨라고 계십니까?"
 그때 왼편의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정연숙은 짙은 화장에 단정한 한복차림이었다.
 "누구시죠?"
 정연숙은 다리를 절며 다가오는 형준을 보더니 서로 같은 처지를 이해하겠다는 듯이 친근한 미소를 보였다.
 "무슨 일로 저에게 용건이 있으시죠. 혹 기자시라면 돌아가 주세요."
 "아 아닙니다. 정연숙시께서 재즈를 잘 하신단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정연숙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한때 재즈를 좋아했거든요. 재즈를 잘 하신다니 혹 질베르토 정이란 여가수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순간 정연숙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보였다.
 "그래요? 흥미있는 양반이군요. 그럼 잠깐 들어와 봐요."

 비록 외모는 변했지만 형준은 연숙에게서 질베르토 정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전 이렇게 젊은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큰 돈을 여성장애인을 위해 내놓았는지 궁금하군요?"

 "지금 취재하는 건 아니겠지요. 뭐 특별한 일이라고 볼 수 있나요. 거기도 잘 알 거 아녜요. 이 땅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특히 장애여성의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주니 저같이 미천한 여자라도 나서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형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질베르토 정이란 가수의 불행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한때 전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증발을 해버렸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죽었다고도 하고 장애를 입고 어디론가 숨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런데요?"
 연숙은 흥미없다는 투로 대꾸를 했다.
 "최근에 우연히 그녀의 가족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었어요."
 순간 연숙의 얼굴에 흔들리는 빛이 스쳐갔다.

 "그래요. 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죠?"
 "서울 M동인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집주인께서 알콜 중독으로 돌아가신 후 홀어머니와 아들 단 둘이 산다던데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입었다더군요."

 연숙의 눈에 언뜻 비친 눈물을 형준은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그것 참 슬픈 일이군요. 실은 저에게도 그것 비슷한 사연은 있지요."
 "맞아요. 연숙씨, 연숙씨에게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겁니다. 그런 느낌이 저를 여기로 끌어들인 겁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질베르토 정하고 무척 닮았습니다. 아니 전 당신이 질베르토 정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형준은 연숙의 말을 가로챘다. 연숙의 눈에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거기가 그렇게 뛰어난 통찰역을 가졌으니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겠군요."
 "연숙씨,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흥분을 했군요. 이 땅의 장애인으로서 한 여성의 불행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울분이 맺혔습니다. 무리한 부탁 같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숙은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말해 주었다. 음악도로서의 지영의 삶, 재즈가수로서의 질베르토 정의 삶, 그리고 기억하기 조차 싫은 사고, 그리고 트로트 가수로서의 조미자의 삶에 대해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질베르토 정이 조미자라는 사실에 형준은 놀랐다. 형준은 순간 특종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기에 여간 세심한 주의가 아니고서는 조미자라는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의 인기였죠. 조미자 스캔들도 벌써 3년 전의 일이죠. 그 이후 저는 몇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얼마간의 돈을 남기고 나머지 돈은 모두 가족에게 보내고 여기로 떠나온 거지요. 짧은 기간에 스쳐간 사람이어서인지 다행히도 저를 조미자로 알아보는 사람은 없더군요."

 형준은 연숙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는 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어차피 철저히 파괴된 인생인데. 도저히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지영이란 이름으로는 존재하는 것조차 죄스러웠어요. 전 이대로 정연숙이란 이름으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얻어낸 특종이었지만 형준은 지영의 비밀에 대해 기사화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만이 그녀의 마지막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중하게 얻어 들은 한 여인에 대한 얘기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형준은 소설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이봐 김기자, 정연숙에 대해 뭐 좀 얻어낸 거 없나."
 신부장이 형준의 등을 치며 말했다.
 "예, 없습니다. 별로 기사거리가 못되던데요."
 "사람두 참 기사거리가 아닌 걸 기사로 만드는게 기자의 능력 아닌가? 그러니 평범한 기자를 못 면하지."
 형준은 웃으며 제대로 쓰여졌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원고를 다시 살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