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첫 단추를 잘 끼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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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이 거의 끝날갈 무렵이면 이 땅에는 새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씨는 정통성 시비가 늘 문제되곤 했던 지난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와는 달리 야당 후보들의 승복과 축하를 받았고 지지율 또한 언론에서 "압도적"이라고 표현될 만큼 높았다.
그러나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보다는 여전히 다른 후보들을 선택했던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대통령이란, 그가 이끄는 정부란,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하며 국민 전체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순간부터 그에게는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국민을 상대로 선거 과정에서 했던 약속들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정치사는 이 문제에 관한한 결코 순진한 낙관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제까지 이 땅에 존재했던 역대 정권들의 경우는 어김없이 그랬다. 국민은 늘 속고 당하는 입장이었으며 정권을 쥔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만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할 때는 국민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말 안 듣고 이 요구, 저 요구를 계속하는 눈치없는 사람들에게는 "응분"의 제재와 때로는 보복까지도 가해졌다. "탄압"이라는 말이 어느샌가 우리 귀에 무척 익숙해져 버린 연유이다.
이제 그 "탄압"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국민들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올려지곤 했던 안기부와 기무사를 차기 대통령이 개혁하겠다고 나섰다. 아마 야당시절, 나아가 여당인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된 후까지 사찰을 당해온 당사자로서 이들 두 기구의 개혁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달 19일 김영삼 차기대통령에게 안기부의 국내정치사찰기능을 폐지하고 대신 해외정보수집과 대공분야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구를 개편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보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또 통일분야 역시 이제까지 사실상 안기부가 주도해 오던 것을 고쳐 통일원을 대북정책의 명실상부한 주무부처로 활성화시키데 안기부는 북한관련 정보수집을 측면 지원기관으로 기능을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보고도 했다.
다음날인 20일에는 김영삼 차기 대통령의 한 측근을 통해 국군기무사의 정치개입을 막기 위한 제도개편안이 마련되고 있다는 소식도 흘러나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 측근은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을 근원적으로 막겠다는 것이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분명한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움직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영삼씨가 줄곧 내걸어 온 "신한국 창조"라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의욕을 담고 있을 법한 구호와 그의 수많은 정책 공약 속에 담긴 개혁, 그리고 정치의 문민화라는 대 국민 약속의 실행 여부를 가늠해 볼 첫 걸음걸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기부와 기무사라는 정치사찰을 담당했던 기구가 개편돼 더 이상은 무시무신한 국민 탄압이란 연상작용을 이들 두 기구와 관련해서 떠올리지 않아도 좋을 만큼 충분한 변화가 온다해도 그것만으로도 다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 이후부터 보다 본격적인 개혁, 각 분야별 대 국민약속을 이행하고 민주적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국민의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는 일이 과제로 남게 된다. 그러나 "탄압"이란 말을 그토록 쉽게도 연상시켜온 이들 두 기구를 개혁하겠다는 공언조차 헛말로 끝나버린다면 그 다음 일은 불보듯 뻔해진다.
이들 기구의 정치사찰-말이 정치사찰이지 정치분야뿐 아닌 모든 국민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찰-기능이 또다시 공공연히 계속된다면 쥐꼬리 만큼의 개혁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협박당하고 탄압받는 국민에게 고통의 분담을 설득할 수도, 함께 뛸 것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 두 기구의 개혁약속이 용두사미로 끝난 "사기"의 경험을 이미 우리 국민은 갖고 있다. 한 번은 5공화국 때, 또 한번은 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 정부 아래서였다. 원래 중앙정보부였던 이름이 안기부로 바뀌었을 뿐, 그리고 뒤에는 보안사라는 이름이 기무사로 바뀌었을 뿐 변화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기구는 해마다 커지고 강해졌을 뿐 국민이 안심할 만한 모습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근본적인 변화는커녕 국민에게 깊은 좌절과 정치적 냉소주의만을 선사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민자당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승리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면 반 이상의 유권자를 생각해 보도록 권하고자 한다. 반 이상의 국민이 지금도 그동안 숱하게 당해왔던 정치적 배신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말기를 권하고자 한다. 한국에 정치범이 한 사람도 없다는 새빨간 거짓말, 언론자유가 완전히 보장돼서 정부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못한다던 너스레를 낯 뜨거운 줄도 모르고 해대지 않을 수 없었던 전임자의 전철을 되밟지 않기를 권한다.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대통령의 처신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나를 기억하도록 간곡히 부탁하고자 한다.
첫 단추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신뢰란 잃고 나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5년의 임기 동안 몇 차례의 작은 실수라면 국민들로 이해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처럼 정치적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국민도 드물다고 하니까. 그러나 시작부터 국민을 속인다면, 또 다시 이름만 바꾸던 식의 껍데기 변화만으로 안기부, 기무사의 제도개편이 마무리된다면, 국민은 다시 정부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김영삼씨의 개혁이란 용두사미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될 것이다.
애당초부터 용두사미의 개혁, 웃음거리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내 놓은 공언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글/한국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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