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아직도 펄럭이는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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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도 일왕과 미야자와 수상은 희생당사자에게 직접 공식 사죄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라"
"강제연행자 생사확인 및 그 명단을 공개하라"
"종군위안부 생존자를 직접 만나 위로하고 현실적 대책을 세우라"
지난 1월 16일 오전11시 한국일보사 뒷골목 일본대사관앞.
불과 열두 살 철부지 어린 나이에 황국신민의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대에 끌려갔던 우리 할머니, 이름 모를 낮선 땅에서 총알받이로 스러져간 우리 할아버지의 피맺힌 한처럼 내리 퍼붓는 눈발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구호를 외치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들의 갈라진 함성은 뜨겁다 못해 처절했다.
이날 미야자와 일본 수상의 방한을 계기로 그동안 한국, 일본 두 나라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던 이들의 절규는 속속 밝혀지는 일제의 만행과 더불어 우리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을 함께 질타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설과 이중 삼중 철통같은 경계망을 펴고 있는 전투경찰의 장벽 너머로 펄럭이는 일장기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쥔 채 구호를 외치는 칠순의 조인.
"내가 전남 장흥에서 올라왔는디 너무 억울해 싸서……"
"일본 수상 만나기 전에는 얼어죽더라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어."
그러나 47년이라는 시간은 이제 그 치욕의 역사마저 모조리 먹어버린 것일까.
불과 50여명 홍건하게 젖은 현수막과 쏟아지는 눈을 피해 신문지를 뒤집어 쓴 이들 유족회 회원들은 때마침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온 주변 빌딩 직장인들의 말쑥한 모습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뭐하는 사람들이야?"
"어머, 저 할아버지 좀 봐."
같은 시간 이곳에서 50여미터 떨어진 일본대사관 정문 앞.
하얀 소복에 징용에 끌려간 남편의 빛바랜 사진을 목에 걸고 태극기를 앞세운 채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또다른 유족회 회원들 뒤로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전투경찰의 무표정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여기는 도대체 어느 나라이며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사코 이들 유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유족들의 절규와 함께 대사관에서는 여전히 일본행 비자를 받아들고 흐뭇해하는 우리 세대 "젊은 친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나 얼굴 안나오게 해주세요."
장난기 어린 그들의 어깨 너머로 일장기는 여전히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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