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어느 봄날의 대화
본문
그 날의 버스는 별로 붐비지는 않았으나 좌석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가 올라서자마자, 빈 승강구 바로 옆 좌석이 있어서 감지덕지하고 앉았다. 그래서 나의 시야엔, 교통체증에 만성이 된 느릿한 차들의 물결과 운전석만 들어오게 되었다.
운전수 아저씬 키가 몹시 작아서 좌석에 푹 파묻히다시피 했다. "키가 작아도 운전에는 별 지장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으로 더 자세히 보니, 그는 등도 굽었고 목도 붙어있었다. 거기까지를 본의 아니게 발견하게 되자, 나는 그에게 존경심마저 일어났다.
"저런 체구로 대형버스를 움직일 수 있다니…… 많은 장애인들이 용기를 가질만 하구나." 그랬는데, 조금 지나자 조용한 편이던 버스 속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여자아이의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니, 초등학교 상급생쯤 되는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한 명의 대화였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그러나 분명 높낮이가 있고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 말을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며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얼마나 즐거우면 버스간에서까지 움직여가며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얼마나 즐거우면 버스간에서까지 못 참고서 떠들까? 아니, 버스에서 내리면 곧장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기 때문에 오붓이 붙어 선 버스 속에서 기회다! 화고 떠드는 지도 말랐다. 그런데, 한 여자아이는 앉아서 말을 하므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데, 두 아이는 서 있는 상태라 그렇지가 못했다. 둘은 때때로 손잡이를 놓고 위태위태한 몸을 가누며 떠들었다. 그 모양을 거울로 지켜본 운전수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질렀다.
"시끄러 이것들아! 못 앉겠어? 못 붙잡어!?"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꽥꽥 지른 것까진 그래도 들어 주겠는데, 뒤미처 보통의 톤으로 소리 치는 건 듣기가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그 말인 것이다. 그 말속엔 아이들을 밟아 문질러 버리는 멸시와, "그렇찮소?"하고 다른 승객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튼, 농아학교에서 하교중일 것이 틀림없는 그들은, 봄날의 모든 즐거운 일들을 거리낌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그 내용은 개나리 줄기에서 연두빛 작은 알갱이가 꽃피울 그 날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더라. 아니면, 겨울내내 방에만 들어오려던 우리집 예삐가 봄이 되니까 밖에서만 뛰어 놀려고 하더라, 또는, 누구가 오늘 점심도시락에 나물무침을 가져왔더라. 맛보았더니 기차더라. 등등, 밝은 이야깃거리 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운전수의 악다구니를 듣고 기분이 어두워졌을 태지만 그 순간만은 귀가 안 들리는 것이 큰 다행이다라고 어겨졌다. 왜냐하면, 운전수는 그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자꾸 고함을 질렸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해! 입 다물어!"
그러고선 꼭 부언을 달았다.
"듣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떤 승객이 맞장구를 쳤다.
"허허 그래요. 벙어리니까요."
아니, 듣지도 못하는데 누구 들으라고 큰 소리치냐? 소리치길! 나는 오만상이 찡그러졌지만 주름살만 생기겠기에 마음을 누그러드렸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리자 운전수는 결국, "에이 재수없어!" 하고 툴툴거리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그가 불쌍하단 마음마저 들었다. 자기도 시원찮은 주제에 누굴 멸시해? 누굴 창피하게 여겨? 그 애들이 장래에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 줄 알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나는 운전수에게 핀잔대신 깎듯한 인사를 차렸다.
"수고하세요 아저씨!"
그러자 그는 머리까지 조아리며
"네네, 안녕히 가세요." 그랬다.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수고하세요"란 말은 아랫말이나 동등한 위치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치맛속에 감춰진 못난 다리를 보았더라면, 과연 그러고서도 내 인사를 곱게 받아줬을까? 싶은 생각이 머릴 스쳤기 때문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는 내 절뚝거리는 진짜모습은 모르고서, 그저 곱게 화장하고 치장한 내 상큼한 컽 모습만 보고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재수 없다던 기분을 싸악 바꿨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영과 육을 함께 지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따라서 둘 중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해도 모자라는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이 둘을 나란히 갖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은 인간답지가 않으며, 또, 그런 완전한 인간도 이 지구상엔 거의 없다고 본다. 거창하게 영육간이라 칭하지 말고, 마음과 몸이라고 칭해보자. 정말 나 자산의 마음과 몸이 완전한가?……. 그리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들이 아닌가? 부족한 면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그러셨다. "죄 없는 자가 나와서 저 여자를 쳐라!" 부처님도 그러셨다. "가엾은 중생들아! 인생은 일장춘몽이니라." ……그렇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도 있다. 큰 불편이 없어도 당연히 고생스런 이 인생을, 뚜렷한 장애마저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장애우들에겐 더욱 더 고해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살이의 대열에서 용케 이탈하지 말고 잘 극복해 나가는 사람은, 그 장애가 있음으로써 푯대나는 훌륭한 인간도 될 수 있고, 행복한 사람도 될 수 있다. 장애우들이 뭔가를 이루었을 때, 다른 장애우들의 뭔가를 이루었을 때, 다른 장애우들에겐 용기를 심어주는 결과가 되지만, 소위 비 장애우들에겐 "나는 멀쩡하면서도 뭘 했단 말인가?" 하는 비관심과 부러움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신체에 특징이 없는, 그래서 <인생이 고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해서 덜 진보된 비장애우들을 가엾이 여기자." 고통을 인내 극복하고 사는 장애우들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싶은 거다. 그리하여, 가만있어도 흘러가는 내 인생의 시간대를 붙잡아, 긍정하고 순응하며, 될 수만 있으면 작은 행복이나마 찾아 즐기며 시간을 요리해야 한다고. <인생은 헛되도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을 말 그대로 해석해선 허무주의밖엔 안 된다. 불교식으로 하면 억겁년만에 한번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일 수도 있고 인연일 수도 있다. 이 얼마나 귀한 인생인가? 그런데 이 인간이, 갖은 욕망에 얽매여 인생을 마구 낭비하였을 때, 그리고 무덤으로 향할 무렵에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헛되고 헛되도다!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 헛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애우이든 비장애우이든 그 진리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특징이 있어서 더 진지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장애우들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비장애우들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랑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내어줘야겠다. 그들에게 좀 더 보람 있는(우리는 장애가 있기에 작은 성취로도 보람을 자주 만끽한다.) 인생을 꾸릴 수 있도록, 장애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도와주자는 말이다. 적어도, 장애우가 장애우를 비웃기 위하여 비장애우의 동조를 구하는 언행만은 절대로 삼갔으면 싶다.
글/주영숙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