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공동운동체임을 잊지 마라.
본문
신체적 정상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외관적 정상이고, 다른 하나는 외관상으로 판별할 수 없는 병리학적 정상이다. 나는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RP)이란 안과질환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질환은 우성, 열성, 그리고 반성유전이란 세 가지 유전 경로를 모두 취하고 있는 까닭에 각 개인에 있어 정확한 유전경로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나 자신도 양친 중 어느 분의 가계에서 이 질환이 유전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양친도 정상이고 내 형제자매도 모두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망막색소변성증은 복병처럼 어느 가계에 숨어 있다가 한 개인을 공격한다. 나는 외관상으론 정상인으로 보인다. 조금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 외에는 실명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누구도 눈치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듯 실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하수를 보았던 기억은 이미 까마득하고, 이제는 샛별조차도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달은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한다. 인간이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말 놀랍다. 내 어린 시절의 모든 경험들이 그러했고, 책을 읽지 못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그렇다. 처음에는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느덧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산을 보고 섬뜩해진다.
"망막색소변성증"이란 유전적 안과질환으로서 최초의 자각증상은 야맹증이다. 그리고 차츰 시력이 떨어지고 시야가 좁아져서 궁극에는 작은 원통 속을 통해 보는 것 같이 되어 버린다. 이병의 진행 양상은 매우 다양해서 유년기에 급속히 진행하는가 하면 노년기까지도 상당한 시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까닭으로 모든 환자들은 자신이 어느 시점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진행성인 이 질환은 그만큼 예측하기가 힘든 것이다. 나는 이미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악화되었지만 아직도 실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번도 받아들이고 살아 온 적이 없다. 설령 내가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이라 해도 끝까지 언덕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올리고 할 것이다.
이런 끈질긴 내 투병의 보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9월 25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는 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기사는 동경의 한 제일교포 의사를 다루었는데 몇 년 전부터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을 치료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일본에 계신 선생님과 교신하였고 사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해온 사실과 치료에 상당한 개가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즉시 모든 일을 유보하고 일본에 갈 준비를 하였다.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나는 동경에 입성하여 현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물론 일년이 될지 이년이 될지 모르는 장기 치료였지만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치료를 받았다. 침술과 한약을 병행하는 이 치료는 전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정신적 부담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의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어서 나는 늘 지출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던 중 나는 또 한 사람의 제일교포와 알게 되었다. 그는 현우향 선생 병원에서 침구사로 근무하는 김희중 선생이다.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한국의 모든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이 모두 일본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협회를 설립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게 의견의 일치였다. 현선생의 배려로 김희중 선생과 함께 귀국하여 협회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김영인이라는 내 누이동생의 후배인 한의사에게 치료법을 전수해 주었고 그 한의원에서 환자들의 치료를 하게 되었다.
몇 개월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한국RP협회"라는 현판을 걸고 협회사무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많은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열심히 뛰어주었다. 일천구백십일년 오월 이일은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한국RP협회"라는 배는 겨우 진수되었지만 앞으로 부딪칠 수많은 격랑을 생각하면 진수의 기쁨도 잠깐이고, 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우리는 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운명에 맞서서 싸우는데 능하지 못하다. 대부분 혼자만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벗어난 후에는 자신이 처해 있었던 운명과 함께 고통받던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암울했던 한국의 현대사에서 종종 보아왔다. 우리 회원들은 모두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함정에 빠진 공동운명체이다. 모든 회원들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을 잊지 말고 함께 이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자기 혼자만 살아 남겠다는 것은 하잘 것 없는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우리 모두 함께 서로 도와가며 이 깊은 함정에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며,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길이다.
글/이영호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