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줄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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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와 침구시술은 이 땅 15만 시각장애우들의 대표적인 직업이다. 아니 "대표적"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부적합한 듯 하다. 그만큼 시각장애우가 현재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우의 다양한 직업 세계로의 진출이 원천 봉쇄되어 있는 열악한 복지현실 속에서 침구시술 행위를 둘러싼 대한안마사협회(회장 지영관)와 대한한의사협회(회장 안학수)의 오랜 줄다리기가 계속 되고 있다.
지난 1월 25일 서울고등법원 특별 4부(재판장 최공응 판사)는 안마사에 관한 규칙 제2조(안마사의 업무한계)중 기타의 자극요법으로 시각장애우의 침구시술 행위를 인정한 88년 2월의 보사부 유권해석이 무효라며 이를 철폐해야 한다는 한의협의 행정소송을 각하 했다.
한의협이 지난 89년 보사부를 상대로 제기한 시각장애우 안마사의 침구시술 행위에 대한 무효 확인청구소송이 소송청구의 제기요건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각하 된 것이다.
소송을 제기했던 한의협은 "침구시술이 사람의 생명이나 인체 또는 공중위생에 위해를 발생케할 수 있는 것으로 엄격한 자격을 갖춘 한방의료인만이 시술할 수 있는 것"이라며 "법적 규정은 물론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법률해석은 무효 처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에 나오는 "확대 해석한 법률"은 무엇인가. 보사부는 88년 2월 안마사의 업무범위를 "안마, 마시지, 지압 외에 전기기구의 사용과 그 밖의 자극요법에 의하여 물리적 시술행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안마사에 관한 규칙 제2조 중 "그 밖의 자극 요법으로 침술을 인정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이는 안마사의 침구시술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시각장애우들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의협은 "그 밖의 자극요법"이란 용어를 확대 해석한다면 안마사의 업무에 침사의 업무가 포함된다는 기이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므로 이런 모순된 해석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의료행위를 하려면 의료법 규정에 의한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을 얻고 그 영업을 하려면 면허를 얻어야 하는데, 맹학교에서 해부, 침구, 한방, 의료임상을 배운다고 해서 이로 인해 즉시 그와 같은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극요법"을 확대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의협의 이 같은 주장은 결국 침술을 의료법에 근거한 의료행위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사부는 "그 밖의 자극요법에 침구시술 행위가 포함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의료 정책적인 판단의 문제"라며, "안마사의 업무 한계에 대한 유권해석은 적법 타당하다"고 한의협 소송의 각하를 주장했다.
보사부는 또한 "83년부터 안마사의 생계 및 복지의 측면에서 침구시술이 허용될 수 있도록 의료정책을 전환했다"며 "안마사가 지금까지 생계수단으로 침구시술을 이용해 왔던 현실을 그대로 유권 해석함으로써 장애우 복지 측면에서 안정된 안마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한방의료행위인 침구시술 행위와 안마사의 유사의료행위의 침술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덧붙였다.
결국 한의협이 안마사의 침술행위를 의료법상의 의료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사부는 이를 유사의료행위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사부의 각하주장을 받아들인 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은 침구시술에 대한 의료행위의 여부를 판가름한 것이 아니라, 유권해석이 행정소송의 구성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행정소송을 하기 위해서는 행정처분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행정처분이란 법규에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관한 권리를 설정하고 의무를 명하여 기타 법률상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법률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권해석은 행정처분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는 곧 보사부의 유권해석이 법률적인 효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고법의 이번 판결은 한의협의 패소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나, "안마사의 침구시술 행위를 뒷받침하고 있는 보사부의 유권해석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한의협측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판결이 침구시술논쟁을 완전히 종결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의협이 이번 판결을 근거로 시각장애우의 침구시술 행위를 형사상으로 문제삼을 수도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판결이 침구시술의 의료행위 여부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유권해석의 법적인 효력 여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안마사의 침구시술은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한편 시각장애우측의 주장도 결코 만만치 않다. 시각 장애우들은 촉각이 발달해 침 놓을 자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맹학교 교과과정을 통해 충분한 지식 및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며, 시각장애우의 침술이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난 2월 4일 안마사협 회원 200여명은 한의협 중앙회와 전국 15개시도 지부를 일제히 점거 농성함으로써 그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날 "한의협이 시각장애우의 유일한 직업인 안마업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등법원에 위헌재청신청서를 제출했다가 각하 되었는데 이번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기 위한 획책을 꾸미고 있다"며 헌법소원청구의 철회를 주장했다. 이와 함께 안마사의 침구시술 행위를 불법행위로 간주하지 말며, 앞으로 시각장애우들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우와 한의사와 보사부. 이들간의 침시술 논쟁은 현재 법률적, 의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한편엔 장애우 복지정책의 부재라는 측면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시각 장애우의 생존권 보장 및 직종 개발에 대한 국가적 정책이 거의 전무하다보니 보사부는 이들이 오래 전부터 직업으로 삼아왔던 침구시술의 기득권을 인정해서라도 불만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침구시술 논쟁은 결국 복지정책의 부재가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직종개발 등으로 시각장애우의 복지정책이 올바르게 전개된다면 침구시술 논쟁이 계속 지루하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글/이행진(장애인 복지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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