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회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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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月末 한국을 강타한 태풍 쥬디호는 20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많은 재산피해를 남겼다. 이에 정부와 많은 민간인이 물심양면으로 피해복구에 힘을 다했다. 이러한 천재지변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과 범국민적 협조가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이러한 천재지변이 더 이상 개인의 도덕적 과시에 대한 대가나 미신적 징벌로 이해하지 않고 어느 지역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있는 천재의 우발적 현상임을 알게 외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해의 변화가 현대의 복지를 출현시킨 근본적 동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만일 사회라고 하는 존재에 인격을 부여한다고 하면 그 인격체는 필히 자신 속에 가난한자와 약자가 늘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나아가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및 질병 등의 이유로 인해 늘 장애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될 것이고 이 불운을 걸머지게 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 발생적인 현상의 희생이었음도 알게될 것이다. 이렇듯 마구잡이로 닥쳐온 빈곤이나 장애를 그 당사자 홀로 책임지게 하는 비효과적 방식보다는 사회전체가 분산 부담한다는 연대책임이 곧 복지인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사회 연대감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로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와 마땅한 처우를 쟁취하려는 오늘의 우리 노력은 과연 얼마만한 실효를 거두고 있는 것일까.
장애자 올림픽과 떠들썩한 홍보, 장애자복지 대책기구와 법제화의 노력들, 그리고 산발적인 데모와 이런 저런 마찰들, 이러한 일련의 몸부림이 과연 얼마만한 사회변화를 가져왔고 또 가져올 것인가, 복지사회 구현의 시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영국의 비버리지 보고서나 미국의 1935年 사회 보장법 그리고 소련의 레닌에 의한 장애우 복지 정도의 혁신적인 변화가 뒤늦게나마 절실히 요청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정부에서 시도하고 있는 노력들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아직도 경제정책은 사회정책의 우위에 있고 예산 편성 시의 천대를 면치 못하는 장애우 복지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상 한국의 전반적인 잠재력은 어느 모로 보나 장애우가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룩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한다.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전문가와 공무원들의 올바른 이해와 확실한 소신만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지금 당장에라도 복지국가를 인류의 거울 앞에 만들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오늘의 기성세대는 인류의 양심과 역사 앞에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사회에서의 복지구현에 있어 장애가 되어온 요인들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1년 간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무엇보다 자칭 장애우 관련 전문가라는 지도급 인사들이나 정책 결정 자들의 사고 속에 장애우가 "그들"로 표현되는 한 장애우들의 존재는 피동적요보호 대상자로 남을 것이고 장애우에게 쓰여지는 예산은 아깝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장애우에 관한 서비스의 정책들의 "위하여"로 이해되는 한 그것들은 결코 장애자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사회에서의 진정한 장애우 복지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애우는 별 다른 존재가 아닌 "우리"임을 인식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에 관한 행위는 "위하여"가 아닌 "함께"이어야 함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장애우는 결코 자칭 전문가들의 일터를 제공하는 존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라는 허구적 노력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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