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여름 밤 무지개 같은 작업치료사를 만나길 꿈꾼다
본문
길을 떠나가더라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
또는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혼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동반자를 골라서는 안 된다.
- 법구경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작업치료(occupational therapy)’ 표제어 추가가 확정됐다. 대한작업치료사협회는 앞서 올해 초 표준국어대사전 내 ‘작업요법’으로 표기된 부분을 ‘작업치료’로 개정 요청을 한 바 있다.
‘작업치료’는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관련 법률의 법정 용어이며, 통계청의 ‘한국표준직업분류와 국제분류 연계표’에 표기된 단어다. 협회는 이미 의료기관 및 지역사회에서 ‘작업치료’란 용어가 상용화돼 있고 많은 법률에서 ‘작업치료’로 표기돼 있지만, 정작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일본식 표기법인 ‘작업요법(作業療法)’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었다. - 신문기사: 국립국어원, ’작업치료‘ 표제어 추가(2014.7.24.) 중
지난 호에서 저의 반려목(木)인 목발께서는 자기 자랑이 대단하더군요. 물론 목발님은 제게 보다 많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른 사람의 위험도 책임질 수 있는 멋있고 믿음직한 아들, 아버지, 애인, 선배 노릇을 하려면 전 제 목발을 일개 도구가 아닌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숙달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발로 할 수 있는 내 작업의 범위를 내 다리와 발 만큼이나 넓혀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제가 저의 ‘장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저의 장애를 조정·조절해 제 장애에 능숙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우리의 장애를 고려한 무장애 공간, 무장애 환경으로 완전하게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신체의 다른 부분을 저의 장애를 위해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애인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의 장애에 대해 많은 연습을 해 능숙해지도록 하고, 자신이 가진 장애와 환경의 차이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을 의학적으로 ‘작업치료’라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20년 전만 해도 작업치료가 속한 재활의학 자체가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인구의 증가와 사회의 필요에 의해 전문대학 위주로 설치하던 작업치료학과를 4년제 대학으로까지 확대하고 전공자를 다수 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전공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다 보니 폭증하는 수요로 인해 전문가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위기 현상에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는 장애인으로서 ‘목발의 달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작업치료와 작업치료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올해 작업치료학회지에 먼저 짤막하게 실었는데 지면이 못내 아쉬워 다시 충실히 이야기해 보는 것입니다. 자, 이제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작업치료사의 ‘작업’의 무게
<모비딕(Moby Dick)>은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제목이자, 그 소설에 나오는 거대한 흰 향유고래의 이름이다. 고래잡이 사냥에서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의 집요한 복수이야기를 담은 소설. 물론 활동 범위를 목발의 일백만 배로 확대해 준 필자의 자가용 애칭이기도 하다. 이 외다리, 나무다리 에이허브 선장은 한 손이 갈고리(hook)라 후크 선장, 또는 제임스 후크라 불리우는 캡틴 후크의 모델이다. 그에게 갈고리 후크를 달아준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악어가 아니라 그의 손을 잘라 버린 피터팬이었다. 이러한 ‘선장’들은 문학 역사에서는 ‘장애’를 둘러싸고 ‘작업’의 개념을 알려준 가장 대중적인 작품 속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베이거나 먹혀서 사라져 버린 신체, 장애에 대응해 불가항력의 약육강식 논리, 자연과 노화라는 시간에 맞서 싸우려는 선장들의 동기와 트라우마 앞에서 의족과 의수를 운영하는 그들의 ‘선박지휘’라는 작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드러난다. 모비딕의 선장은 소설의 화자 단 한 명만 남겨두고 모두 몰살시키지만 후크는 혼자서 피터팬과 싸우다 악어에게 먹힌다. 나머지 선원들은 그대로 살도록 남겨둔다. 원래 후크 선장과 그 선원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혼자 살아 남으려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참혹한 선장 행위를 외면할 권리조차 없이 목격하게 됐다. 그것에서 우리는 선장이라는 전문성이 어떤 작업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정말 통렬하게 배웠다.
이러한 작업의 양면성을 최근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엑스맨(X-man)’에서는 돌연변이들의 초능력으로 은유하기도 했다. 그 영화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찰스 자비에가 작업치료사로 상징되며 엑스맨의 특이성이 질환이나 두려움이 아닌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초능력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오랜 시간 훈련시키고 연습시킨다. 자신의 능력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그 존재 자체가 박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지배적인 사회통념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돌연변이를 말살하려다 그 돌연변이를 탄생시키는 유전자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까지 몰살하게 된다는 작품의 스토리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가족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까지 들여다보게 한다.
작업치료사들은 정작 당신들의 이름 아래에 있는 ‘작업’이란 말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당신들의 전문성의 날카로운 양날을 느끼고 있는가? ‘작업’과 ‘치료’의 전문성을 고민하고 있는가?
작업치료의 전문성은 누가 인정하는가?
치료 작업의 목표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사회가 변하고 ‘발달’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작업 적응과 발전 속도를 휠씬 추월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뇌병변장애를 가진 필자의 경우를 보아도 과거 신발을 혼자서 신고 끈을 묶는 작업이 가장 큰 개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제는 5백 원짜리 끈조임개가 나왔고 기능성 신발이 나왔다. 2G휴대폰 버튼을 정조준하는 것을 연습하고 나니, 그 사이 스마트폰이 나왔다. 그 후에는 액정 화면을 정확하게 터치하는 것과 덜 민감하면서 반응범위가 넓은 앱을 찾는 데 집중해야 했다.
목발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하기 위해 넘어지지 않고 팔과 다리의 협응 시간을 맞춰야 했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엑셀을 사용할 때 동시에 경직하지 않도록 다리 근육 조정에 집중해야 한다. 토큰이나 회수권을 내고 버스를 탈 때는 목발을 들고 버스 타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지만 버스카드 시스템이 생긴 후로는 2년간의 연습을 통해 카드를 결재하고 다시 목발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더구나 버스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시스템 덕분에 목발을 짚는 타이밍과 버스 도착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출 수 있어서 버스를 따라가다 넘어지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신발장에 모래시계를 세워 두고 운동화 신는 시간을 줄이고자 애쓴다. 넘어지지 않고 샤워하는 것과 혼자 옷 입는 것에 연습과 연습을 거듭한다. 그래야만 내가 내 인생을 살고 소비하고 결정하는 것에 보다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위험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비장애인이 절대 되고 싶지 않다. 장애가 없는 것이 장애가 있는 것보다 절대 우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장애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내 장애를 수용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보다 다양한 인터페이스(Interface: 접속기)를 갖추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작업치료사란 바로 이러한 장애와 질병에 대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에 대한 전문가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치료사들은 작업의 주체에게 이런 수많은 선택을 제공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의사들이 전문가라고 인정받는 이유는 그들의 치료가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다. 의사가 질병과 상해를 개선하거나 치료할 수 없다면 그들은 대번에 돌팔이가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평가는 병이 나아진 사람들의 평가로 완성된다. 치료는 같은 전문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란 뜻이다. 의사들끼리는 그것을 고친 전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하나의 규칙이 될 수 있도록 검증할 뿐이다.
그런데 장애인과 환자를 둘러싼 많은 전문가들은 정작 자신들의 전문성을 작업의 주체에게 인정받기보다, 다른 전문가들이나 사회적 지위로서 정치적으로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객관적인 평가는 직업의 안정성과 발전을 위해 중요하겠지만 당신들의 정체성과 방향을 위해서는 작업의 주체, 치료의 대상자의 평가와 의견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작업치료사의 최우선 지침이자 원칙이어야 한다. 인기에 연연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전문가의 인정이나 사회적인 존재감보다 당신들에게 매일매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인정과 그들로부터의 존재감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치료 현장에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의사보다, 간호사보다 작업치료사를 찾고 당신들을 신뢰하고 자문을 구하고자 할 때, 당신들이 그러한 존재가 되고자 할 때 당신들은 현장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업 주체에 대한 공감 능력
세월호 사건 이후 사회 지도층들이 문제 해결은 하지 않고 의전과 ‘인증샷’에 연연하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은 누구나 화를 내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그런 것을 누구나 함부로 문제 삼지는 못했다. 실제로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권위주의에만 빠진 얼치기의 실체를 직접 보고 나서야 그들의 본질을 이제 우리 모두가 알아버렸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엘리트 계층,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의 권위–인권감수성이 없는-를 이제 더 이상 대중들이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업치료사들과 작업치료협회가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문성의 ‘권위’를 세우고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좀 더 꼼꼼히 살피고 다양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어떤 의사가 의학기술이 뛰어난 수술의 신이라고 해서, 그 의사가 환자의 인권이나 의료적 권리를 잘 알고 구현해주리라 확신할 수 없다. 반대로 인권감수성이 높은 의사가 무조건 우수한 의사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실력이 부족한 의사가 진정한 전문가라면, 정말 환자를 생각한다면, 결단을 내려 더 우수한 의사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작업치료사의 ‘폭풍 권위’는 치료 기술의 전문성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문제 공감 능력이 양쪽의 기차레일처럼 튼튼하게 놓여졌을 때 생겨난다. 그래야 KTX 열차처럼 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균형과 강도를 잃으면 치료사의 권위와 지위는 탈선할 위험이 높고 일단 탈선하면 복구하기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건강을 지키려면 항상성이 중요하듯 이제 개개인과 협회는 작업치료사의 전문성과 인권감수성과의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치료사의 전문성이 이념과 사상과 관계없이 숙련되듯이 치료사들의 인권감수성 역시 누구의 이념과 사상과 관계없이 숙성되고 증진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현장에서 작업치료사들과 협회도 발견돼야 한다. 치료실에 있는 만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의사를 비롯한 각종 치료사들과 학회도 인권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현장에서의 인권 침해 사례를 연구하고 축적해 인권을 옹호하는 매뉴얼을 연구하고 교육을 해가야 한다. 그래야 당신들의 전문성이 당신의 사회적 가치로 검증될 수 있다.
작업치료의 다양한 프리즘 만들길
작업치료의 기술 배움은 속성으로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정하고 신뢰하는 작업치료사가 되는 것은 스킬만으로 이룰 수 없다. 시간과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과 성찰만이 본연의 철학을 형성하고 그 철학이 생겨났을 때 학문과 전문성의 정체성을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작업치료 전공책에 정의한 작업이라는 무한대의 스펙트럼(Spectrum: 범위)만큼 작업치료사 전공자들은 ‘나의 경험과 관점과 가치의 스펙트럼은 다양한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심지어 실천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커밍아웃(Coming-out: 사교계 자리에서 동성애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한 게이 작업치료사를,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저시력을 가진, 청각장애를 가진 작업치료사를 직면할 자신이 있는가?
각 언론사에 의학 전문기자를 하는 의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듯이 기사나 방송을 작업치료의 관점에서 직업으로 하는 작업치료사는 어떠한가? 작업치료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어떠한가? 작업치료를 전공하며 사물 인터넷을 구축하는 엔지니어를 위해 협회지는 어느 꼭지 하나 내줄 수 있을까?
대학시절 수술 여부를 고민하며 불안해 하는 나를 위해 밤 늦게까지 치료실 한귀퉁이에서 내 몸 하나하나 짚어가며 함께 아파해 주었던 그. 강제 철거에 항거해 분신한 장애인 노제에서 분노하며 나와 함께 목발로 대자보 붙이는 법을 연구했던 그. 가로수길에서 목발을 짚으며 땅만 보고 걷는 나와 얼굴을 보며 대화하기 위해 날마다 뒷걸음을 연습하던 그. 장르를 바꿔가며 요리하기를 요구하고 이유식을 만들어 달라면서도 칼질하고 가스불을 다루며 냄비를 나르는 것을 불안해 하지 않았던, 무한 신뢰로 장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일깨워주는 그. 그가 바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실제로 만난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의지하고 함께 하고픈 지켜 주고픈 작업치료사들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작업 치료사라면 어떤 작업치료사인가? 어떤 그가 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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