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개정해야 할 때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정당한 편의제공'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본문
2003년 4월 장애계를 중심으로 한 58개의 시민사회단체가 마음과 뜻을 합하여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연대’를 출범시켰고, 2003년 6월 25일 첫 공청회를 여는 한편 총칙팀·차별연구팀·장애여성팀·권리구제팀으로 4개 분과를 꾸렸다. 수많은 공개토론회와 전국순회간담회, 워크숍을 거쳐 드디어 2007년 3월 6일 국회 본회의에서 출석의원 197명 중 찬성 196명, 기권 1명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인권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제정 과정이나 내용 모두 큰 의미가 있는 소중한 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보지 못했던 것은 아쉽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사건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장애차별사건, 즉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사건이고 또 그간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공익소송도 다수 제기되었고 성과도 있었던 만큼, 그 활용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사건 인용률이 높지 않고, 처리 기간에 많은 시일이 소요된다는 점이나, 장애인차별구제소송이 장애인단체가 아닌 일반시민에게까지 폭넓게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 승소율이 높지 않고 대부분 조정으로 마무리 된다는 점, 차별행위자에 대한 제재가 미약하다는 점 등은 좀 더 개선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과연 장애인의 삶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획기적으로 변화했는가, 과연 장애인차별이 금지되고 평등한 참여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다. 눈에 보이는 이동권이나 접근권 문제만 해도 아직까지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시외버스의 도입은 지지부진하고, 카페·편의점 등 생활편의시설의 98%는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없어 휠체어를 탄 채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 어렵다. 가장 보편적인 문화 활동 중 하나인 영화관람은 시각·청각 장애인에게는 남의 일이고, 여전히 기업들은 의무 고용률을 지키는 대신 고용부담금을 내는 것을 택하고 있다. 직장 내에서는 장애를 고려하여 적절한 직무로 배치하거나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 퇴사를 강요하거나 따돌리고 승진에서 누락시키는 등의 불이익을 겪는 예들이 여전히 많다. 장애학생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며 배우는 대신, 특수학교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예들은 여전히 부모님들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든다.
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차별을 뿌리 뽑지 못하는가? 왜 이렇게 장애차별의 해결은 더디게만 느껴지는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는데도 왜 이런 예들은 여전히 비일비재할까?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그만큼 효과적이거나 강력하지 않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개정하면 될 터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개정해야 하는 것일까?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념하는 토론회가 매년 열리고는 있지만 획기적인 대안이 제시되거나 법 개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 제정 이후 14년이 되어가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
특별히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필자가 문제로 느끼는 부분은 이렇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을 장애를 사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배제·분리·거부 등에 의하여 불리하게 대하는 경우(직접차별), 장애인에 대하여 형식상으로는 제한·배제·분리·거부 등에 의하여 불리하게 대하지 아니하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를 고려하지 아니하는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장애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간접차별),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에 대하여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하는 경우(정당한 편의제공의 거부) 크게 세 가지로 차별행위를 정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법 제4조) 직접차별과 간접차별은 쉽게 말하여 차별행위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므로, 판단하기나 규율하기가 상대적으로 간단할 수 있다. 문제는 ‘정당한 편의제공의 거부’ 인데, 이는 어떠한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을 차별로 규율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무엇이 정당한 편의인가’라는 판단을 수반한다. 우리 법은 그러한 정당성의 판단을 법에서 직접적으로 나열하거나 시행령에 위임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설물의 접근·이용에 있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시설물의 종류와 단계적 범위, 그리고 정당한 편의의 내용을 대통령령으로 위임하고 있고, 대통령령에서는 다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편의증진법) 시행령」을 준용하고 있다. 편의증진법 시행령에서는 법이 적용되는 시설물의 유형을 열거하고 있고, 바닥면적을 기준으로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제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편의의 내용을 열거하고 또 구체적인 내용을 시행령으로 위임하여 시행령에서도 상세한 내용을 열거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법이나 시행령에서 몇 가지로 열거하는 방식으로는 장애인에게 실제로 필요한 편의의 내용들을 전부 충족하기는 어렵다. 복잡하고 다변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다양한 필요와 욕구에 맞는 편의의 종류와 방식 등은 몇 가지로 법에서 열거할 수는 없다. 이렇게 열거적인 규율방식은 법이 정한 몇 가지만 해 두면 실제 장애인에게 필요한 나머지는 제공하지 않아도 ‘할 것 다 했다’는 식의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시행령으로 전부 위임함은 결국 국민의 열망과 국민의 대표자의 결단으로 만들어 놓은 법의 세부적인 내용을 결국 행정부의 입맛이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당한 편의제공의 적용 대상이나 범위, 내용들을 정부에서 마음대로 정하기 나름이라면 그것은 인권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래서 변화는 더디고, 소송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나?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에서 찾았다. 정당한 편의제공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reasonable accommodation’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장애인차별금지법, 나아가 장애인 단체나 전문가조차도 ‘합리적 편의제공’과 ‘접근성(accessibility) 보장 의무’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겪는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한 원인이 이 ’합리적 편의제공‘과 ’접근성‘을 혼동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일반논평에 의하면 접근성 보장의무와 합리적 편의제공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접근성 보장의무는 사전적인 의무인 반면 합리적 편의제공 의무는 필요할 때 즉시 제공되어야 하는 의무이다. 접근성 보장의무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의무인데 반해, 합리적 편의제공은 요청한 사람과 반드시 협의를 해야 하는 ‘개별화 된’ 의무이다. 말하자면 접근성 보장의무는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반드시 마련해 놓아야 하는 정형화·보편화된 것이고, 합리적 편의제공은 편의의 제공이 필요할 때 필요에 따라 장애인 개인과 협의해서 정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은 미국과 영국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장애인법도 ‘reasonable accommod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서 만든 합리적 편의제공 가이드라인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수많은 편의들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합리적 편의제공은 각 개인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있다. 영국은 ‘합리적 편의제공’ 대신 ‘합리적 조정(reasonable adjustment)’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영국 구금시설에 적용되는 구금시설 서비스 지침(PSI, Prison Service Instructions, 32/2011)을 보면, 법률은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판단할 때 고려할 요소를 지정하지 않으며, 법적 조치에 있어 합리성은 개별적으로 법원이 결정한다.(G.2)라고 규정하고 있다.
두 번째, 일반논평에 따르면 합리적 편의제공은 제공하는 측에 ‘과도하거나 부당한 부담‘을 준다면 의무를 면하게 되지만, 접근성 보장의무는 그러한 제한이 인정되지 않는다. 접근성 보장의무는 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는 접근성 보장의무를 합리적(정당한) 편의제공으로 잘못 규정하면서, 합리적(정당한) 편의제공에 인정되는 면책사유를 접근성 보장에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까? 우선 정당한(합리적 편의제공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으나 우리 장애계가 ‘정당한’을 택했다면 굳이 바꿀 필요는 없어 보인다.) 편의제공의무를 일반조항으로 별도로 규정하고, 편의제공의 방식과 절차를 좀 더 세부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정당한 편의의 내용은 지침이나 가이드라인 등으로 예를 드는 것은 좋겠지만, 법에서 일일이 열거하는 방식은 안 된다. 두 번째, 현재 각 절에서 따로 규정하고 있는 정당한 편의의 내용들은 정당한 편의가 아닌 접근성 보장의무로 달리 규정해야 한다. 최소한의 접근성 기준은 법에서 정할 수 있는 사안이나, 이는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으로 면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리고 접근성은 해당 서비스나 프로그램에 완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규율해야지, 형식적인 몇 개 시설물의 설치나 보조기기의 제공을 기준 삼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정당한 편의제공을 개선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선 장애 당사자에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권리가 생긴다. ‘법에 없는 내용이다’라거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듣는 대신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방식으로 제공해 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고, 이 요구에 응하여 협의해야 하는 의무가 편의제공의 의무자에게 발생한다. 물론 그 요구가 과도하거나 부당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의제공의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도하거나 부당하지 않은 다른 방식을 찾아 ‘고민’해야 하고 서로 ‘협의’해야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계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보물을 가지고만 있어서는 빛나지 않는다. 갈고 닦아야 하고 또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거창하지만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나아갈 다음 걸음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규정하고 있는 구체적인 권리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 걸음으로 ‘접근권’과 ‘정당한 편의제공’을 좀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작성자김강원/연구소 인권정책국 국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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