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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남겨두지 않아야 할 사람들

[우리가 손 잡을 때]

본문

 
‘숫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책을 아시나요? 1970~80년대, 부랑아 선도라는 명목 하에 마구잡이로 아동들을 수용했던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인 형제복지원의 참상, 그리고 그 폭력의 피해로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피해생존자들의 갈등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 책을 덮었다가도, 이 일을 기억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의 마땅한 할 일이라는 생각에 다시 갈피를 찾아 펴게 되는 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고 또 이 역사를 잘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숫자로 남기면 안 되는 이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피해생존자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형제복지원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형제복지원에 입소하면서 받아든 등록번호이기도 했고, 두 당 얼마씩의 ‘몸값(정부 보조금)’이기도 했으며, 그들을 잡아다 형제복지원에 넘긴 경찰에게 주어진 평가점수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 안에서 인간 아무개가 아니라 숫자로 존재했고, 이로 인해 그들에 대한 감금과 폭력, 강제노동도 정당화되었습니다. 고유성과 존엄성을 가진 한 존재를 향한 폭력이 아니라 ‘부랑아 3000명’에 대한 ‘교화’였으니까요.
‘숫자가 된다는 것’은 숫자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버린다는 것, 숫자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우리 앞에 어떤 통계나 수치가 드러났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주의 깊게 읽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존재들을 숫자에 가둬버리고 말게 되겠죠. 형제복지원에서 사망한 513명의 사람들(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증언이 있지만, 공식 통계를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설 안에 수용되어 있던 3000명의 사람들. 이 숫자가 의미하는 집단 수용의 폭력성과 권력관계, 정부시설 법인간의 카르텔을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기민하게 읽어냈더라면.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아쉬움에 공감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숫자로 존재하는 오늘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움이 무색하게, 2021년에도 사람들은 숫자가 되고 있습니다. 2020년을 기억하는 키워드가 될 ‘코로나19’는 전 세계에서 20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망자 절반 가량이 시설 거주인이라는, 믿기 어려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유엔인권고등사무소(UN OHCHR)가 2020년 4월 29일 발표한 ‘코로나19와 장애인 권리(COVID-19 and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지침은 코로나19 사망자 중 요양시설(장애인 거주시설, 요양원, 요양병원 등) 거주인 비율이 국가별로 42%~57%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벨기에의 코로나19 사망자 중 47%가 시설 거주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코로나19 사망자의 50%가 요양시설 거주인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감염/사망자가 폭증해 직원들이 떠난 요양시설에 군인들이 들어가 사망자를 수습해야 했습니다. 캐나다의 한 시설에서는 거주인의 코로나19 감염 비율이 95%에 달했으며, 2020년 5월 기준 캐나다 코로나19 사망자의 무려 82%가 시설 거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 앞에, 사회는 너무나 침착하고, 조용했습니다.
지난 2020년 12월 2일, 한국장애포럼은 UN 장애인권리협약(CRPD) 당사국회의 부대행사로 ‘코로나19와 CRPD 19조-긴급탈시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온라인 간담회를 진행했습니다. 간담회에는 UN CRPD 위원을 비롯해 유럽·아프리카·북미 그리고 한국장애계가 모여 코로나19로 인한 시설 내 피해 사례들을 공유하고, 전 세계 정부에 ‘긴급 탈시설’을 요구했습니다.
이 간담회에 참석한 질리안 파렉 박사(캐나다 요크대학)는 시설 거주인의 감염/사망을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라고 여기는 사회의 차별적 인식이 여전히 시설을 향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엄청난 규모의 집단 감염과 사망자가 시설에서 발생하고 나서, 거주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조치들이 취해졌으나, ‘경제적 피해가 너무 크다’는 반발로 인해 이러한 조치들은 곧 해제되었다고 합니다.
감염 확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집단 거주 형태의 시설에서, 피할 수도 없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야 했던 수천 명의 장애인과 노인의 죽음은 그저 숫자에 박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숫자의 언저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왜 이 숫자들의 의미를 읽지 않습니까? 경악하고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아직도 그 숫자 뒤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여전히 ‘시설 거주인'이라는 그룹으로 묶어 ‘어쩔 수 없음'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숫자에 가두지 않길
얼마 전, 장애인 거주시설 신아재활원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56명의 장애인이 비확진자 거주인 58명과 함께 시설에 ‘코호트 격리'되어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WHO·UN 등 국제기구와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코로나19 초기부터 줄기차게 강조해 온 시설 내 확진자 발생시 원칙은 ’감염자의 빠른 이송 및 시설 내 거주인 감원’입니다. UN CRPD 위원장과 장애인 접근권에 관한 유엔 사무총장 특보는 4월 1일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시설 거주 장애인은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높은 만큼, 탈시설 정책을 가속화함으로써 장애인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국내 장애계 역시 청도대남병원 사태 이후 지속적으로 ‘긴급 탈시설’을 촉구해 왔지요.
그러나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숱한 권고와 제안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근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단 거주 시설에 대해 ‘코호트 격리’ 원칙을 고수해 왔다는 점에 허탈감 마저 느꼈습니다. 이미 다른 국가에서 넘치도록 나온 숫자의 의미를, 우리 정부는 끝내 읽어내지 않았다는 허탈감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숫자가 되고 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만 아직도 3만의 장애인이 시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누구도 숫자에 가두지 말기를,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작성자최한별/한국장애포럼 간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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