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불편해서 사라지는가, 불편한 사람을 배제하는가
기획 / 현금 없는 사회
본문
“현금이 있어야 내가 얼마를 썼는지 알아요”
발달장애인에게 현금은 ‘불편한 결제수단’이 아니라 소비를 조절하는 방법
“저는 현금만 써요. 카드 쓰면은 내가 막 쓰게 되거든요.”
발달장애인 당사자 길서운 씨(52세) 지갑에는 현금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는 카드 대신 오직 현금만 사용하는 이유를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눈에 바로 보이니까’라고 설명한다.
서운 씨는 일주일 사이 쓰는 돈을 활동지원사와 함께 ATM 기계에서 찾아 직접 세어보고, 필요한 만큼 쓰면서 자신의 지출을 조절한다. 현금을 사용하면 서운 씨는 자신이 보유한 현금이 얼마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 과정에서도 서운 씨는 지갑 안 지폐를 꺼내 금액을 확인했다.
“제가 지금 만 원짜리 두 장 있으니까 2만 원 하고.. 천 원짜리 한 장 있네요. 2만 천 원!”
서운 씨는 과거에 카드를 사용해 보기도 했지만 “카드를 쓰면 내가 막 쓰게 돼요”라며 일주일 치 용돈을 하루 만에 다 써버린 경험을 들려주었다.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현금처럼 즉각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온라인 뱅킹 접근도 쉽지 않았다.
카드가 현금보다 가볍고 편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서운 씨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돈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고 다음 소비를 결정하기 위해 현금을 사용하는 생활을 선택했다. 이러한 물리적인 과정은 서운 씨가 자신의 소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페를 갔는데 현금이 안된대요”
‘현금 없는 매장’과 ‘네모 기계’가 지워버린 선택권
현금만 사용하기로 결정한 서운 씨는 한 달 전, 집 앞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 카페에 갔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평소에 사회복지사나 이웃들과 함께 카페에서 음료 대접하는 것을 즐기는 서운 씨는 언제나처럼 음료를 주문하고 현금을 내밀었지만 카페 점원은 현금 결제를 거부했다.
“우리 동네에 스타벅스가 생겨 가지고 제가 선생님 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간 건데 현금이 안된다는 거예요, 거기 직원이. 이유는 모르겠어요.”
결국 서운 씨는 동료들을 위한 음료를 주문하지 못했다. 함께 있던 사회복지사가 대신 결제를 해야만 했다. 이 상황을 떠올리며 서운 씨는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너무 미안하잖아요. 제가 사드리려고 같이 간 건데.. 몰랐어요 저는. 현금이 안되는지”
스타벅스 측은 2018년 ‘현금 없는 매장’ 도입 당시, 현금만 소지한 고객에게 현금으로 스타벅스 무기명 카드를 최초 충전해 결제할 수 있도록 안내해 고객 불편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서운 씨가 받은 안내는 단순한 ‘결제 거부’뿐이었다.

▲스타벅스 현금 없는 매장 안내문
이후 서운 씨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에게 현금 사용 가능 여부부터 물어보는 것이다. 서운 씨가 ‘네모 기계’라 부르는 키오스크 역시 큰 장벽이다.
“그 네모 기계 있잖아요. 거기에는 현금을 못내요. 그래서 카페 가면 사람한테 가서 현금 쓸 거다, 현금되냐 이렇게 물어봐요.”
최근 확산하는 24시간 무인 매장은 출입문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대야만 문이 열린다. 결제 수단으로 현금을 쥐고 있음에도 소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카드를 돈으로 인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소비의 직관성과 데이터 인권의 문제
서운 씨의 지인 연희 씨(63세)는 발달장애와 언어장애를 갖고 있다. 연희 씨도 주로 현금만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조금 다르다.
연희 씨의 통장을 언니가 개설해 주고 카드를 주었기 때문에 그 카드를 자신의 것이 아닌 ‘언니의 돈’으로 인식한다. 또한 카드 사용 내역이 언니에게 문자로 전달돼 어디서 무엇을 사 먹었는지 모두 언니가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도 드러냈다. 그렇게 연희 씨도 카드보다 현금을 사용하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서운 씨와 연희 씨를 지원하는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조미연 사회복지사는 “발달장애인 분들 중에서 카드는 구체적인 현금으로 인식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현금을 사용하려는 경우도 생겨요”라고 말했다. 그만큼 발달장애 당사자들은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미연 사회복지사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당사자들끼리 식사하고 각자 비용을 나눠 내는 상황에서도 어려움이 생긴다고 전했다.
“저희가 당사자 분이랑 식사하거나 당사자 분들끼리 식사했을 때 더치페이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 분들이 카카오페이나 계좌이체 이런 것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난감한 상황들도 생겨요. 그래서 당사자 분들이 현금을 더 선호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현금 교육은 자기 결정권의 시작
긴 시간 동안 직관적 감각으로 익히는 ‘돈의 무게’
현장에서 발달장애인 대상 화폐 교육 및 일상생활 훈련을 진행하는 장애인복지관과 직업훈련센터 관계자 역시 현금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발달장애인 경제교육을 담당하는 영등포장애인복지관 사람중심실천팀 사회복지사는 “카드를 사용하더라도 그 이전에 화폐의 기본 개념과 0단위부터의 단위 체계를 알고 있어야 자신이 쓰는 돈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며 “7천 원짜리 음료를 사고 만 원을 내어 얼마를 거슬러 받아야 하는지 차근차근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발달장애인 직업재활을 하는 내일로직업훈련센터 관계자 역시 현금을 활용한 실물 교육 중요성을 강조했다. “급여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고 자립생활을 위해서는 올바른 지출 훈련이 필수적”이라며 “1,000원이라는 ‘숫자’ 자체는 관념적이어서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실제 현금 모형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며 화폐 단위를 구분하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체크카드는 잔액 개념을 인지하기 어려워 통장 잔액을 한 번에 다 써버릴 위험이 크다. 반면 현금은 지갑에 남은 잔량이 눈으로 즉시 확인되기 때문에, 스스로 금액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감각을 키우려면 현금 사용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또 “비장애인에 비해 학습이 느릴 수도 있어서, 스스로 거스름돈을 계산하고 물건을 사기까지 빠른 분들은 1년 안에도 되지만 평균 2~3년 동안 꾸준히 반복 학습을 이어간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화폐교육 담당 사회복지사는 현금 없는 사회의 확산에 대해 “당사자들이 몇 년에 걸쳐 어렵게 익힌 현금 결제가 매장에서 전면 거부되는 환경은 자립 훈련 과정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고, 어렵게 쌓아온 교육의 기회와 효과를 모두 박탈하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법화의 ‘강제통용력’은 어디로 갔나
처벌 규정 없는 법률과 상업적 합의의 맹점
현금을 거부하는 업계 행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한국은행법 제48조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法貨)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라고 규정한다. 이를 ‘법화의 강제통용력’이라 부른다.
다만 이것이 모든 사업자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현금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하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거래 당사자가 사전에 현금이 아닌 다른 지급수단으로 거래하기로 합의할 수 있다는 법적 쟁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금 없는 매장’ 매장 입구나 계산대 등에 명확하게 고지했다면 소비자가 그 조건을 알고 거래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는지, 그렇다면 한국은행법상 현금의 강제통용력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매장 입구에 ‘현금 없는 매장’이라는 공지를 붙여놓은 것만으로 소비자가 현금 거부에 합의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법적 이견이 있다.
국회 차원의 법제화 시도도 이어졌다. 20대 국회에서「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김두관 의원 대표발의), 21대 국회에서 「소비자기본법」 개정안(이인선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되었으나 법 체계상의 적절성과 과도한 제재 문제 등을 이유로 각 법안 모두 폐기됐다.
기업의 ‘효율’이 지워버린 사회적 약자의 자리
해외는 ‘현금 수취 의무화’로 안전망 구축
기업이 현금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랜차이즈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최연주 씨(가명, 31세)는 “어르신 분들은 거의 현금만 사용하셔서 현금을 받고 있다”면서도 “현금이 들어오면 거스름돈도 챙겨놔야 하고 입금도 해야 하고, 또 매장을 열거나 마감할 때 현금시재가 안 맞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진다”며 애초에 현금을 받지 않는 것이 매장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훨씬 편리하다고 이야기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현금 관리로 인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자 2018년 현금 없는 매장을 시범 도입한 후 현재까지 ‘현금 없는 매장’을 확대해 오고 있다. 스타벅스코리아 측은 ‘현금 정산 시간이 하루 평균 50분(월 25시간)가량 줄어 매장 내 청결 관리 및 고객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정산 오류나 도난 위험도 완화되었다’고 밝혔다.
2021년 기준으로 서울에 위치한 총 555개의 스타벅스 매장 중 72%에 달하는 402개 매장이 현금 없는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당시 현금만 가지고 온 고객에게 현금으로 스타벅스 카드를 충전해 결제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앞서 서운 씨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실제 현장에서는 대체 수단이 작동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고지되지 않아 결국 결제에 실패했다.
더구나 스타벅스 카드의 최소 충전 금액은 5천 원이며 재충전 시 1만 원 이상의 단위로 충전할 수 있어, 현금으로 커피 한 잔만 구매하려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소비를 요구하는 ‘불완전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디지털 전환이지만, 그 효율성의 대가는 사회적 약자의 ‘소비 배제’로 돌아온 것은 아닐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금 없는 사회’의 영향은 사회적 약자의 소비 배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이웃을 돕는 기부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장 모금 단체들 역시 탈현금화에 따른 모금 환경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구세군자선냄비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시민들의 현금 소지가 줄어들면서 주머니 속 잔돈이나 동전을 냄비에 넣는 일상적이고 즉흥적인 현장 기부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전했다. 이에 대응해 구세군은 최근 NFC(스마트폰 태그)를 활용한 스마트 자선냄비를 도입하며 모금 방식을 다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결제 수단이 나눔의 편의성을 높였더라도 지폐나 동전을 직접 자선냄비에 넣으며 체감하던 직관적인 나눔의 감각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평소 기부활동에 관심이 있는 김윤영 씨(45세)는 “예전에는 동사무소나 공공기관 가면 항상 모금함이 있었고 동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동전도, 현금도 잘 안 가지고 다니니까 아예 그런 모금통이 보이질 않는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현금 사용 감소로 즉각적인 거리 기부의 문턱이 높아지고, 이는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돌아가는 모금 재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구세군 자선냄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현금 사용 감소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현금 사용이 훨씬 빠르게 감소한 국가에서는 현금 사용자를 위한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사례도 있다.
덴마크는 디지털 결제가 활성화된 국가이지만 특수 환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오프라인 매장이 현금 결제를 받아야 하는 ‘현금 수취 의무(cash obligation)’를 시행하고 있다. 특히 식료품점이나 약국 등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은 현금 이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현금 없는 사회에 진입했던 스웨덴은 고령층의 소외와 통신 장애로 인한 결제 마비 등을 경험한 뒤 방향을 틀었다. ‘지급결제서비스법’을 개정해 일정 규모 이상의 상업은행에 현금 입출금 서비스 제공을 의무화했다. 영국 역시 지역 사회의 ATM 및 현금 창구 수를 일정 기준 이상 유지하도록 금융 감독을 대폭 강화했다.
미국에서도 매사추세츠주가 소매상 거래에서 현금 결제 거부를 금지했으며, 필라델피아와 뉴욕시 등 주요 도시들도 현금 거부 매장에 벌금을 물리는 개정안을 발효했다. 현금을 받지 않는 것은 저소득층과 인종적 마이너리티, 장애인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들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현금 사용 선택권 보장(Cash Acceptance Mandatory)’이다. 디지털 결제가 확산하더라도 현금이 필요한 소비자가 실물 현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선택지를 제도적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한국은행, ‘현금사용 선택권 보장’ 대국민 홍보
위축되는 화폐 유통 인프라 대응 및 민·관 협력 강화
우리나라에서 현금을 발행할 법적 권한을 가진 한국은행 역시 ‘현금 사용 선택권 보장’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대중교통 및 지자체, 주요 프랜차이즈 기업들을 상대로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한 대국민 홍보와 협조 요청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은행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고령층·저소득층의 디지털 정보격차와 대부업 이용자 등 금융 소외 계층은 현금 없는 매장이 확산될 경우 소비 시장에서 배제될 위험이 크다.
한국은행의 「2025년 경제주체별 화폐사용현황 종합조사」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개인(39.1%)과 기업(53.9%) 모두 ‘금융약자의 거래 불편’을 1위로 꼽았다.
현금 사용 감소는 현금 인프라의 위축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현금수송업체와 ATM 운영업체의 수익성이 악화돼 기기가 철수되면 국민의 현금 접근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이에 중앙은행과 금융권, 유통업계는 소규모 금융서비스 제공과 배리어프리 ATM 도입 등 현금 유통 안전망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은행 분배국민소득팀 박진 과장은 “현재까지 뚜렷한 법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한국은행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현금 사용 선택권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맞닥뜨릴 위험
프라이버시 침해와 사이버 재난
현금 없는 사회로의 이행은 거래 편의성 증대, 금융범죄 감소, 화폐 제조·유통 비용 절감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결제가 디지털화될 때 발생하는 위험도 있다. 대표적으로 프라이버시 침해와 사이버 재난, 네트워크 마비에 따른 결제 시스템 중단 등이 꼽힌다.
그러나 현금은 전력이나 통신망, 금융기관의 승인 없이 거래 당사자 간에 직접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정전이나 통신장애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기능할 수 있다.
해외 연구와 중앙은행의 정책 논의에서도 이러한 현금의 기능이 다뤄지고 있다. 자연재해나 정전 상황에서 현금 접근성이 거래의 완료 가능성을 높이고 소비 활동의 급격한 위축을 완화할 수 있다는 연구가 발표됐으며(알바레즈(Alvarez et al., 2026)),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베리아반도 대정전, 그리스 재정위기 등 위기 사례를 분석하며 현금이 비상시 핵심 지급수단으로 기능한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같이 대지진이나 쓰나미 등으로 전력과 통신이 중단될 수 있는 환경에서도 현금의 역할은 중요하다.
또한 앞서 연희 씨의 사례처럼 카드 사용은 소비활동과 소비동선 등 위치 정보 뿐 아니라 의료·식품 구입과 같은 민감한 개인 정보를 디지털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금융 거래 기록이 기업의 데이터로 활용되는 시대인 만큼 결제 데이터 유출이나 오남용 가능성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발달장애인의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카드 사용을 유도하고, 카드 결제 내역이나 이동 동선을 통해 당사자 소비와 생활을 관리하려는 경우에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결제 기록에는 단순히 얼마를 썼는지만 남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구매했는지와 같은 개인 생활 정보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물론 보호자나 지원자가 당사자의 안전과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러한 정보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원과 통제의 경계는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소비 내역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거나, 현금보다 카드 사용이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결제 수단을 사실상 제한한다면 이는 경제활동을 돕는 것을 넘어 당사자 자기결정권과 경제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경제활동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돈을 확인하고, 무엇을 살지 결정하고, 지출한 뒤 남은 돈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상생활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는 존엄한 소비주체이자 동등한 경제 관계를 영위하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금 접근성을 지키는 것은 금융 약자를 배려 차원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재난에 대비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유지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현금 없는 사회,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현금 없는 사회로의 변화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디지털 결제로의 전환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누구도 결제 수단의 변화 때문에 소비와 경제활동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결제 환경에 단순히 적응하도록 요구하기보다, 당사자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의 간편결제나 모바일뱅킹은 빠르고 편리한 거래를 전제로 만들어져 있지만, 발달장애인에게는 복잡한 메뉴와 추상적인 숫자, 작은 글씨, 짧은 인증 시간 등이 장벽이 될 수 있다. 잔액과 결제 금액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하거나 결제 전후의 금액 변화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 복잡한 금융 용어 대신 쉬운 표현을 사용하는 방식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기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실제 사용자로 참여해야 한다. 장애인의 접근성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 초기부터 당사자의 경험과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현금 없는 매장에 관한 정보 제공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현금 결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이용 가능한 대체 수단을 소비자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발달장애인처럼 갑작스러운 결제수단 변경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이용자에게는 매장에 들어간 뒤가 아니라 방문 전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대체수단이 존재하는가’뿐 아니라 ‘그 대체수단을 실제 이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가’까지 살펴야 한다. 디지털 결제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또 다른 디지털 결제수단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제는 매장뿐 아니라 금융기관과 플랫폼 기업에도 해당한다. 금융서비스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이용자에게 어떤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는지 사전에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쉬운 금융서비스나 이용 지원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경제교육의 영역이다. 현금 사용이 줄어든다고 해서 지금까지 현금을 통해 이루어져 온 경제교육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현금을 만지고, 금액을 세고, 물건을 구매하고, 거스름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돈의 가치와 소비의 개념을 익혀 온 당사자에게 현금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생활 학습 도구다.
따라서 앞으로의 경제교육은 현금 사용과 디지털 금융을 서로 대립시키기보다, 현금에서 디지털 결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복지 현장만의 과제로 남겨두어서도 안 된다. 한국은행과 같은 금융기관과 결제서비스 제공 기업 등, 장애인복지기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발달장애인의 금융생활과 경제교육에 필요한 기준과 지원 방식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현금 없는 사회를 둘러싼 논의는 ‘현금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디지털 결제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으로 풀기 어렵다. 디지털 결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누구도 결제수단의 빠른 변화 때문에 소비와 경제활동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사회적 숙의와 시스템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현금 사용이 필요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선택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와 현금 유통 인프라를 점검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은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이용자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결제 환경과 실질적인 대체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장애계와 복지 현장 역시 당사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교육과 금융 접근성에 필요한 기준을 함께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피할 수 없다면, 현금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적응만을 요구하기보다 현금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누가 배제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디지털 전환과 함께 현금을 필요한 사람을 위한 선택지이자 비상수단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누구도 결제수단 때문에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기업, 장애계 등 사회 각 주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작성자글과 사진. 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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