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꽃을 대하듯 사람을 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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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꽃을 대하듯 사람을 대해야죠"
사회복지법인 해남희망원 임숙재 원장
▲해남희망원장임숙재씨 |
토말탑으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남도의 끝, 전라남도 해남에는 부랑인시설로서 국내 등록 1호를 기록하고 있는 희망원이라는 시설이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53년부터 부랑인, 고아, 노인들을 돌봐온 천사회에서 출발하여 현재 해남희망원과 신혜정신요양원, 선희노인요양원을 거느린 대형 복지법인으로 성장해 온 희망원,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과 함께 40여 년을 헌신해온 김정길 임숙재 이사장 부부가 그간의 공로로 세계평화봉사단에서 수여하는 세계평화상 열매상을 수상했다.
유부도의 장항수심원 사건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면서 전체 정신요양원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모아지고 연말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될 부랑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지는 요즈음, 희망원 임숙재 원장을 만나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없는지 들어보았다.
해남고속터미널에서 두륜산 쪽으로 향해 가는 도로, 그 길의 한 중간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곳이 바로 희망원이다. 이 겨울에도 수많은 푸른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희망원의 본 건물은 조금은 웅장한 감마저 들게 하는 빨간 벽돌과 파란 지붕이 조화를 이룬 깔끔한 예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임숙재 원장을 만났다.
우선 세계평화상 열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부군이신 김정길 이사장님과 함께 해남희망원의 오늘을 있게 하기까지 참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오셨을텐데요. 특히 원장님은 희망원에서 자원활동자로 활동하다가 김 이사장님과 부부의 인연까지 맺어지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원장님은 경남 통영 출신이고, 희망원은 전남의 끝인 해남에 있었는데, 애초에 희망원에 자원활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때 60년도쯤 동아일보에 53년부터 불우한 노인, 고아, 부랑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는 김정길이라는 청년과 희망원에 대한 기사가 났어요. 그때 저는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가정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가워서 편지를 썼어요. 그것을 계기로 김 이사장님과 펜팔을 하기 시작했는데 편지가 몇 번 오고 가다가 제가 한 번 가서 돕고 싶다고 했더니 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얼마 못 버틸 거라구요.
결국 방학을 이용해서 한 번 둘러보러 왔는데, 특히 제 눈에는 학교를 가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어요. 다른 나이 많은 사람들도 먹을 것도 없는데 이 나이에 공부는 해서 뭐하냐고 그래요. 그래도 배워야 한다고 제가 설득해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방학이 끝나도 이곳이야말로 나를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결국 사직서를 내고 여기에서 계속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리고 얼마 후에 저랑 이사장을 오랜 기간 눈여겨보신 도지사 분이 중간에서 강력하게 권하셔서 결혼을 하게 됐고요.
이곳 희망원의 입구뿐만 아니라 잠시 둘러보니 자립작업장이나 치료장에서도 국화기르기나 나무가꾸기 같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던데요.
최근에 국화같이 향이 강한 꽃을 이용한 후각치료법이 도입되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냥 제가 꽃을 좋아하고 여기 오신 분들한테도 심리적으로 좋을 것 같아 생활 곳곳에 직접 활용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신병원은 다 흰색으로만 칠하는데, 저는 되도록 녹색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처음에 여기 오신 분들 마음이나 입을 열게 하는 일이 참 힘듭니다. 그런데 저는 상담을 할 때도 실내 책상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게 씨 나 좀 도와주세요, 하고 같이 나무를 가꾸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죠. 무심한 듯 집이 어디세요, 형제는 몇이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셨어요, 하고 물어보면 말이 금방 통하거든요. 특히 치료실이나 작업장에서 주로 키우고 있는 국화들은 간단한 손질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늘 가꾸고 돌보게 하는 대상으로 삼도록 하는데 제격이죠. 한 때 배추가 6천원씩 할 때는 그 땅에 차라리 배추를 심으라고 주위에서 권해서 잠시 갈등이 생기기도 하더라구요. 그래도 꽃이 사람들의 심리적인 안정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 안했죠.
꽃가꾸기 외에 오랜 기간 시설을 운영해오시면서 철칙으로 지키고 계신 어떤 원칙이 또 있습니까.
맨 처음 김 이사장이 처음에 희망원의 전신인 천사회를 만들 당시 나이가 고등학생이었다고 하고 저도 스물세 살 정말 젊었을 때 이분들이랑 같이 지내기 시작했잖아요. 그때 노인이랑 고아들이 함께 살고 있으니까 연령대별로 대가족과 같은 애정과 위계질서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었어요.
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자립을 하려고 해왔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아직 후원회라는 게 따로 없습니다. 물론 꽃동네같은 시설은 후원금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대신 규모 있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처음 설립 이후에 30년만인 83년에 정부인가를 받고 지원을 받기 시작했지만 뭐 당시에 소금값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적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해결되지를 않았어요. 그래도 또 이사장님이나 제가 남들 한 시간 일 할 때 10시간 일하는 것으로 보충하면서 기본적인 먹을 것은 자급하면서 공평하게 나누면서 살자고 했죠. 또 먹고살기 어려울 때에도 얼마 되지 않더라도 각자 노동한 대가는 꼭 개인통장에 넣어 줍니다. 원생의 통장이 1백18개 정도 되는데 몇 백만원을 모으신 분이 많아요. 그렇게 돈이 있어야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늘 가르치려고 하죠.
대다수의 시설 운영자들은 정부지원만으로는 시설 운영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재원의 상당 부분을 후원에 의존한다고 토로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는데요, 희망원에는 후원회가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과연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운영이 가능하시던가요.
물론 정말 어려운 날이 많았죠. 아침 먹으면 점심 걱정, 점심 먹으면 저녁을 걱정해야 하는 나날이었으니까요. 남의 도움은 안받으려고 했지만 한 번은 너무 먹고살기 어려워서 이사장님이 차를 타고 지나가는 도지사의 길을 막고 읍소를 해서 그 분이 병아리 5백 마리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사상 유례없이 강한 태풍이 불어서 병아리랑 천막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걸 울면서 붙잡다가 나무판에 얼굴을 맞아 사흘동안 실신해 있었는데 그 때 상처가 지금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먹고사는 일에도 매순간 고비가 있었지만 이사장님 말씀은 정부에서 1백만원이 나온다면 정성으로 1백만원을 보태서 운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만 직원들의 처우를 마음만큼 잘 해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규정 보수 외에 법인에서 배려를 더 해줘야 하는데 넉넉히 못해 드리고 있거든요. 복지관 같은 경우에는 급여를 거의 행정 공무원같이 해주지만 사실 수용시설 종사자들이 보수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복지사라도 복지관으로 가려고 하지 이런 수용시설로는 안오려고 하거든요.
저희 함께걸음에서도 지난 4월호에 부랑인, 그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거리의 부랑인들의 생활과 그들을 위한 사회시설, 또 그곳에서 호적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도한 적이 있는데요, 오랜 세월 부랑시설을 운영하면서 지켜보면 계속적으로 부랑인들이 생겨나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되시던가요.
예정에는 그야말로 못 배우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가난 때문에 부랑인이 됐다면 요즈음은 인텔리들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선진국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전에 부랑인시설협회에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너무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대낮에 라디오를 듣거나 책 읽으면서 신문지 깔고 그냥 길거리 벤치에서 먹고 자더라구요.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생겼다면 지금은 미혼모한테서 생기는 고아들도 정말 많아요. 높아지는 이혼율로 가정 파탄이 나서 부랑인이 되는 사람도 많구요. 먹고살기는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렇게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니까 부랑인이 줄어들지를 않네요.
그렇다면 부랑시설인 희망원의 역할도 시대적으로 많이 변해왔을텐데요.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해서 부랑인이 됐기 때문에 저희는 단순히 의식주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적절히 재활훈련이나 치료를 하도록 해서 사회로 다시 나가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사람들마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씩 있잖아요. 그것을 발견해서 사회에 나가서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끈과 같은 역할을 저희가 해야죠. 저희가 원생들한테 꽃이나 나무를 돌보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끈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신앙도 갖게 하고 싶은데, 저희 부부는 불교신자지만 자유신앙을 갖도록 하고 있죠. 앞으로 이곳에다가 불당도 짓고 교회당이나 성당을 지어서 신앙을 더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꿈입니다.
법인 안에 신혜정신요양원을 운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유부도의 수심원이라는 정신요양원의 인권탄압 사례가 또 다시 방영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요.
최근에 문제가 된 유부도의 정신요양원의 모습을 보고 제가 한 10일 정도를 말을 안하고 살았어요. 당시 평화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었는데 그냥 너무너무 화가 나고 말도 하기 싫어서 저는 다 거부했었어요. 일반적으로 정신요양원에 어떤 사람이 들어가려면 다 행정적인 채널을 통해서 받게 되는 것이지 저희들이 받고 싶다고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수심원이 어떻게 그렇게 운영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돼요.
저희는 진단서를 반드시 받고 하자가 있으면 다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자기 가족을 맡기면서도 햇빛도 안 비치는 곳에 넣어주세요. 운동도 시키지 말아주세요. 이런 주문을 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다시 데려가라고 그래요. 햇빛이 안 비치는 곳에서는 식물도 못사는데 어떻게 사람이 삽니까. 저희야 이번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방송에 저희 내부까지 모두 공개가 돼서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없습니다만 다른 시설에서는 많은 곤란이 있나봐요.
그렇게 잘못한 몇몇 분 때문에 전체가 의심을 받아서는 안돼죠.
오랜 세월 이곳에서 생활을 잘 하고 자립할 만한 상황이 되어서 나갔던 사람들이 사회의 엄혹한 현실이나 박약한 자립의식 때문에 금방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럴 때는 일에 대한 허무감이 느껴질 때도 있으시겠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결혼도 시켜서 내보내고 지역 내 아는 분들한테 취직알선도 합니다만 잘 생활하는 분들도 있지만 정착을 못하고 취직했다가도 금방 그만 두고 나가버리는 분도 있죠.
여기서 깨끗하게 옷 입고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하고 나갔던 분이 며칠 되지도 않아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다시 슬그머니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직원들한테 화내지 말고 가서 잘 돌봐주라고 넌지시 일러주지만 제 맘속으로는 많은 자책을 하게 되죠. "무엇인가 부족했다, 무엇인가 부족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대형시설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회복지법인 산하 3개 시설에 8백여 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는 법인을 운영하시고 있는 입장에서 그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 그런 문제제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단순한 규모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과연 운여자가 시설 생활자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과 책임을 가지고 일하느냐가 문제죠. 저희 해남희망원 법인 아래 3개 시설에 거의 8백여 분이 있는데 저는 이름을 거의 외웁니다. 제가 정확하게 이름을 불러주면 “제 이름도 알아요?”하면서 참 좋아라해요.
그런데 이떤 곳은 원생이 70~80명밖에 안되는데 방들마다 역한냄새가 심하고 완전히 난장판이에요. 그 숫자의 인원 조차 그렇게 관리가 안된다면 문제죠. 물론 법인이 관리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운영을 하되 한가지 시설로만 너무 커지면 안된다고 봐요. 저희는 세 개 시설에 원장이 따로 있어 기능별로 세분화가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많습니다만 원장님은 희망원이 개방된 시설이라고 자부하셨는데요. 특별히 원생들의 외출이라든지 지역 주민이나 다른 기관들과 어떻게 연계를 해나가고 계십니까.
이 곳이 농촌지역이라 사실 일손이 부족한 가구들이 많습니다. 자식들은 많아도 거의 대도시로 나가버려서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의 일손이 없는 가구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특히 연로하신 노인이나 부녀자 가구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식구들이 나가서 무보수로 일을 해 줍니다. 물론 원 내에도 할 일은 많지만 봉사하는 걸 배우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곳에서 일하게 하는 거죠. 또 앞으로 사회에 나갈 사람들인데 일반 사회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대신 담배는 물론 끓인 물까지 차로 챙겨 가서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죠. 그러면 고맙다고 팔고 남은 배추나 감자라도 조금씩 보내주시고 그러세요. 그래서 해남희망원의 지역내 이미지는 아주 좋습니다.
최근에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저희 법인에서 병원을 짓는데 그 지역 주민들이 처음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해요. 그러다가 우리 지역 동네 분들한테 그 시설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더래요. 여기분들이 희망원 때문에 자신들이 도움받고 산다고, 좋은 시설이라고 잘 설명하니까 반대가 쉽게 사그러들었지요.
방금 병원건립 계획을 말씀하셨는데요. 병원 뿐만 아니라 치매노인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계신데, 법인에서 거기까지 사업을 확장을 하게 된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에는 아직도 부랑인 특히 호적이 없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병원 치료 받으려면 특히 의료보호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일도 많았죠. 아픈 분들이 오면 옛날에 그때 차도 없을 때 업어서라도 병원에 달려가는데 병원에서는 안받아주는 거에요.
그럼 막 울고 돌아올 때도 많았어요. 그때부터 아, 정말 이 사람들이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왔어요. 이제는 해남종합병원 60개 병상을 우리 시설 전용으로 사용하도록 협조를 얻었죠. 그래서 여기 해남지역도 그렇고 저희 시설도 여전히 병상이 부족하니까 내과, 정신과, 응급치료 기능까지 갖춘 병원을 만들려고 합니다. 정부에서 융자를 받아 올해말까지 준공을 마치려고 추진중에 있습니다.
부군이신 이사장님과 함께 부랑자보호법 제정 운동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부랑인들이라면 사회 하층계층으로 그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인권보호가 사실 문제입니다만, 평소 어떤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오셨습니까.
정신보건법이나 사회복지사업법이 있지만 그것으로 이 사회 부랑인들의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잖아요. 법인에서 세 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지만 부랑인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이 제일 적어요. 몇 개월 째 그 법안 제정을 위해서 시간나는 대로 복지부와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조만간 제정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설 운영이라는 게 할수록 힘이 들어요. 여기 올 때 관청에서 수갑을 채워 오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서류 작성보다 먼저 수갑을 풀라고 하고 씻겨 드립니다. 이곳에 인생에 대해 자포자기한 상태로 오시는 분들이 차츰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사회에서 더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됩니다. 이곳 희망원의 제일 큰 행사가 정월 보름전 쯤에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합동 위령제예요. 살아있을 때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편안히 계셨으면 합니다.
글/ 대담 및 정리 한혜영 기자
사진/ 곽성호
[약력]
40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희망원 임숙재 원장은 부산대를 나와 부산 한산중학교에서 가정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60년경 해남희망원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희망원은 임 원장의 부군인 김정길 이사장이 53년부터 전남지역의 부랑인, 고아, 정신장애우를 위해 세운 천사회를 모태로 하고 있다.
김 이사장과의 결혼과 함께 희망원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임 부원장은 시설 밖의 인근 농촌지역 여성들과 아동들에게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교육과 교양강좌를 진행해 왔다. 그 공로로 63년 향토문화공로상인 "살아있는 인간상록수상"을 수상하고 78년 한국상록회 중앙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은 83년부터 원장으로 취임했으며 85년 한국부인회 해남군 회장과 89년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임 원장은 93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김정길 이사장과 함께 지난 11월7일 세계평화봉사단이 수여하는 세계평화상 열매상을 수상해 세계평화회의 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20대 젊은 시절 거지대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김 이사장과 부인 임숙재 씨의 삶은 "청춘을 맨발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저서로 수기집 "준령을 넘고 넘어"("6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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