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에바다사태, 새해에는 꼭 해결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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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27일 에바다 농학교 학생들의 농성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단법인 에바다복지회사태가 아직까지 정상화되지 못한 채 97년 6월 농성장소를 에바다농아원에서 해아래집으로 옮기면서 장애우시설 역사상 가장 길고 험난한 싸움을 계속하고있는 것이 햇수로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함께걸음은 지난 해 마지막 밤과 새해 첫 새벽을 해아래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맞으면서 이들의 새해 소망을 들어보았다.
농성을 시작한 지 7백60여일. 그 시간이 지나도록 정상화되지 않는 에바다사태와는 무관하게 평택시 진위면 봉남1리에 위치한 해아래집의 새해 아침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빼어난 경관과 함께 평온함이 느껴졌다. 이른 아침 강가에 자욱하게 낀 물안개가 해가 뜨면서 서서히 걷히고 간밤에 내린 서리와 강물이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 눈이 부셨다. 또 밤에는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과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밤하늘의 별을 더 투명하게 만들었다.
해아래집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학생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감상하는 것보다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여기 온 뒤부터는 가만히 서서 강물이나 별을 지켜보는 학생들이 많아졌어요. 수화가 단순하다보니 자연의 아름다음을 표현하는 능력도 많이 부족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아름다음이 직접 느껴지니까 어휘력도 많이 좋아졌죠."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들의 경우 농아원에서 단체로 생활하다 보니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해 정서가 많이 메말라있고 농성과정에서 많이 불안해했는데 이 곳에 오고 부터 많이 좋아졌다는 김선옥 선생님의 이야기다. 또 많은 방문객들을 맞다 보니 아이들의 사회성도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 한 예가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해아래집에 들어온 홍 모 학생의 일화다. "그 학생이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온 마을에 비상이 걸릴 정도로 손버릇이 나빴어요.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까지 했는데 굿을 한 결과 조상의 묘를 잘못 쓴 것이 원인이라고 해서 묘를 이장하기까지 했죠. 그런데 그 학생이 해아래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선생님들 지갑에서 자꾸 돈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몇 달 후부터는 아이들 돈도 조금씩 없어졌죠. 그런 일들이 그 학생이 들어온 직후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선생님들이 그 학생을 불러 크게 혼내지는 않았아요. 그 동안 원에서 생활하면서 잘 먹지 못하고 혼도 나면서 욕구불만이 생겨 그런 습관이 든 것 같아서 혼내기 보다 좀 두고 보기로 한 것이죠. 다행이 해아래집에서 생활하면서 차음 나아지더니 어느 샌가 그 버릇이 사라졌어요. 마음 편하게 지내면서 선생님들이 믿어주고 친구들도 잘 대해주니까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그 학생은 그 이후 방학 때면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도 도와드리고 개학할 때 부모님이 용돈으로 돈을 주시면 반은 도로 부모님께 드리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의 낭비벽도 많이 고쳐지고 있다. "시설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누가 뭐를 줘도 고마워하는 마음 없이 마구 쓰는 버릇이 있는데 초기엔 아이들의 그런 태도가 많이 지치게 하기도 했죠.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여학생 한 명이 쪽지와 함께 호일에 뭔가를 꼭꼭 싸서 주더라구요 펼쳐봤더니 "선생님, 이거 드시고 기운내세요"라는 글과 라면을 기름에 튀겨서 설탕을 뿌린 것이 담겨 있더라구요 그 순간 그간의 피곤함이 모두 싹 가셨어요. 또 새해 아침에는 칠판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도 써 놓았더라구요."
그리고 만 1년 6개월 째 해아래집에서 생활하면서 학생들도 차츰 여기가 진짜 그들의 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지금은 물건을 아껴쓰는 습관이 생겼고 지난 번 MBC방송의 "21세기위원회-칭찬합시다"에 이곳 권오일 선생님과 해아래집이 방송되고서 받은 세탁기를 놓고 학생들끼리 회의를 열어 그 전처럼 마구 쓰면 또 얼마 안 가 고장이 나니까 일주일 중 하루는 세탁기 안 쓰는 날로 정하자는 기특한 결론을 내려 실천중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주일 중 수요일은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학생들은 해아래집에서 살면서 절약정신 뿐 아니라 민주적인 생활태도, 사회성도 함께 기르고 있었다.
"사태 해결될 때까지는 절대로 농아원에 돌아가지 않겠다"
그러나 해아래집이 지금의 안정과 평온함을 되찾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6년 11월 27일 에바다농아원에서 농성을 시작한 학생들은 12월 4일 경기도 교육청과 평택시의 감사 이후 시청이 관선이사를 파견했지만 현 이사장과 친분이 있는 인물로 이후에도 에바다복지회가 최성창 등의 입김이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농성을 끝내지 않고 97년 1월10일 농성장소를 한국농아복지회로 옮겨 다시 농성을 계속 했다.
6월2일 도교육청에서 농성하는 학생들에게 귀교명령을 내려 서울에서 농성을 하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으나 학생들은 학교에는 갈지언정 사태가 정상화되기 전에는 절대로 농아원에 돌아갈 수 없다고 버텨 농성에 참여한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이삼십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숙식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하게 됐다.
임시방편으로 나온 대안은 몇몇 선생님과 학부모의 집에서 학생들을 몇 명씩 재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학부모의 집이 용인에 있을 정도로 떨어져 있어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결국 방을 얻는 수밖에 없는데 소규모 공동체 규모에 버금가는 대식구를 받아줄 집주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아 3일 밤은 인근 교회의 유아실에서 지냈다.
"별의 별 군데를 다 다녔어요. 처음엔 월 10만원에 넓은 방이 있다고 광고에 난 집엘 가 보았는데 방 한칸에 다 큰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생활하기도 그렇고 방도 그리 크지 않아 또 다른 곳을 알아봤죠. 전세금 1천7백만원하는 아파트가 광고에 나서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계약을 하려고 했더니 그 집은 한 번 들어가면 방이 잘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돼 취소하고 심지어 사무실 지하까지도 알아봤어요. 그러다 학부모님 중 한 분이 지금의 해아래집을 발견한 거죠.
마을 한 가운데 라면 주민들이 반대하는 문제 때문에 입주하기까지 어려움도 있었을텐데 마을 외곽인데다 주변 경관도 좋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집주인이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계약금 없이 한달에 20만원을 받기로 해 저렴한 선에서 계약을 하고 6월5일 입주를 했죠."
"일구이언 하는 사람들 너무 미워요"
그러나 시청이나 도청 담당자들을 비롯해 많은 관련인사들의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태도로인해 에바다사태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서 해아래집은 지난 해 IMF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많은 실망과 좌절을 맛보아야만 하기도 했다.
지난 해까지 이년 연속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김선기 평택시장은 에바다정상화를 또 다시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감사장만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외면해 에바다사태는 현재까지 계속 원점에서만 맴돌고 있다. 이 일로 김선기 시장은 지난 해 직무유기로 고소당하기도 했지만 이유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또 지난 해 5월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방청객 중 한명이 에바다와 관련해 사태를 빨리 해결해 달라는 민원성 발언을 했고 김 대통령도 조속한 해결을 약속했지만 이 역시 한 달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이어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으면서 경기도 지사 후보로 나온 국민회의 임창렬 후보의 부인 주혜란 씨가 직접 해아래집을 찾아와 당선만 되면 현 재단의 이사를 모두 교체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당선된지 벌써 6개월이 넘게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야말로 해아래집 식구들은 대통령과 도지사, 시장 모두에게 기만당한 느낌 뿐이다.
또 얼마 후 발표된 감사원의 감사 결과 역시 농성자측의 의혹을 다 풀어주지 못했을 뿐더러 그나마 내려진 시정조치도 현재까지 집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자난 달 KBS 9시 뉴스에는 "에바다 뭘 믿고 이러나"라는 제목의 보도가 되기도 했는데 이 보도가 나간 후 평택시에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할 듯 보이기도 했으나 농아원 전원장인 최실자 씨는 현재까지 시설에 상주하며 실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평택시장을 맞고소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동안 김선기 평택시장과 에바다재단측 사이에 뒷거래가 있어서 지금까지 봐주기식 행정과 감사를 했다는 의혹을 씻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IMF한파로 인해 국민의 관심은 물론 후원의 손길마저 끊어져 지난 해 여름과 가을 해아래집은 가장 큰 위기에 접어들었다.
"후원자들이 해아래집에 보내주는 돈이 작년 8월까지 월 평균 3백만원이었는데 IMF이후 80만원으로 줄어 완전히 바닥이 보이는 상태였죠. 그 때는 쌀도 다 떨어져서 외상으로 쌀을 팔면서 겨우 실림을 꾸려가고 있었어요."
해아래 집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에 잇는 에바다학교 교사들이 월급에서 50만원까지 각출을 해서 간신히 꾸려가긴 했지만 권오일 김정일 교사 부부마저 97년 12월 재단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직위해제당해 어려움이 한층 더 심했다. 권오일 선생님은 법원으로부터 복직판결을 받았지만 재단측은 여전히 권 선생님의 복직을 혀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해아래집의 산타클로스 "칭찬합시다"
이 때 해아래집에 구세주같이 나타난 것이 바로 21세기위원회라는 이름의 방송프로그램의 "칭찬합시다"라는 코너였다. 연세대 박대운 학생이 휠체어로 2002킬로 유럽횡단에 도전해 성공하면서 칭찬합시다의 주인공이 됐는데 마침 박 군이 다음 번 칭찬 주인공으로 해아래집 권오일 선생님을 추천한 것이다. 방송이 나갈 당시에는 고장난 세탁기를 대신해 새 세탁기를 상품으로 받은 게 전부였지만 그 이후 여기 저기서 후원금이 들어왔고 이후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에 또 한 번 출연을 하게 됐다. 거실 밖이 바로 차도인지라 청각장애 학생들이 장난을 치다가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어 해아래집에 가드레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가드레일을 전문으로 설치하는 회사에서는 무료로 가드레일을 설치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힘이 됐던 것은 마을 사람들의 격려와 에바다사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방송을 시청한 어떤 공무원은 "이 에바다가 그 에바다냐"고 물었을 정도로 사람들 기억에서 에바다사태는 잊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 중에는 해아래집 사람들은 농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격하고 위험한 인물일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오해는 많이 사라졌다.
원래 해아래집에 처음 이사오고 부터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권오일 선생님등 교사들은 밖에 나갈 일이 없어도 마을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큰길가지 태워다 주기도 하고 태워오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아래집 이야기를 해서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 해아래집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방송 후 해아래집 식구들의 형편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며 주변 식당 사람들이 쌀가마를 갖다 놓고 가기도 하고 오리탕집에서도 식구들 실컷 먹을 만큼의 오리고기를 봉고에 실어오기도 했다. 이 방송이 나가나 후 이 마을로 손님도 더 많이 찾아온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화성에 사는 어떤 주민은 "해아래집이 들어설 때 땅값 떨어진다고 반대한 주민중의 한 사람인데 해아래집이 이런 곳인지 몰랐다"며 부디 용서해 달라는 사죄의 글과 함께 거액의 후원금을 남기고 가 해아래집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정든 해아래집을 떠나기 싫어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에바다 사태가 해결되면 해아래집은 향후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재단 운영만 정화되면 이 해아래집은 사라지게 될까.
그래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그러지 않아도 그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라고 한다.
학생들은 해아래집에서 가정의 따스함을 유일하게 맛볼 수 있었는데 이 공간을 벗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다시 깨질까봐 여기보다 휠씬 시설이 좋은 농아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수업시간에만 대해왔던 학생들을 벌써 2년여 기간 동안 매일같이 함께 지내다 보니 학생들에게 정이 들어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 한켠이 허전하다.
또 에바다정상화를 위해 평택역에서 20여일간이나 텐트농성을 하고 매주 국민회의와 자민련 당사 앞에서 집회를 하면서 에바다사태를 널리 알린 비상대책위원회 대학생들, 시간만 나면 해아래집에 찾아와 학생들과 함께 하고 지친 선생님들을 대신해 돌아가며 학생들을 봐주기도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 건 마찬가지다.
특히 대학교 2학년 겨울 처음 에바다사태를 접하면서 에바다정상화를 위해 1년 휴학까지 한 김형수 군에게도 해아래집은 대학기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임에 틀림없다. 이날 역시 김형수 군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이의 생각은 이렇다. "사태가 정상화된 이후라도 해아래집은 없어지지 말고 그룹홈 형태라도 남았으면 좋겠어요. 에바다 문제가 벌써 3년째 접어들면서 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장 갈 곳 없는 사람들도 많으니깐요. 해아래집이 없어진다는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요. 에바다재단과의 장기간 투쟁 속에서 장애계는 물론 지역내에서도 많이 알려져 여러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는데 기념하는 의미에서 소규모 시설로 신청을 하든지 그룹홈으로 전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해아래집 선생님들은 이 문제에 대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해아래집에 입주할 당시 사태가 정상화되면 원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바도 있고 선생님들도 교사일과 해아래집 살림을 해내느라 많이 지쳐있는 것도 사실이다. 권오일 선샌님 같이 가정을 이미 꾸린 사람들의 눈에는 이 곳에 있는 여선생님들이 다들 노처녀라는 사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러나 해아래집의 앞날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이 문제는 사태가 해결될 즈음 다시 깊게 고민하기로 했다. 어찌됐든 지금으로서는 에바다문제가 빨리 해결되기 위해 온 힘을 모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시간만 가면 안돼요"
해아래집 사람들의 새해 소망은 학생이나 교사들 할 것 없이 모두 같다. 새해에는 에바다 사태가 꼭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에바다 문제가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큼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거구요. 그러나 그 시기는 모르겠어요. 다만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에바다 사태가 정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죠" 김선옥 선생님의 말이다.
그런가 하면 올 1월 1일 서른아홉번째 생일을 맞는 안병호 씨는 "12년 동안 에바다 작업장에서 일한 1천만원을 최성창 이사장에게 떼였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춥고 힘들게 살았다. 에바다 사태가 빨리 해결돼야 한다."는 말을 서툰 글씨로 적어 보였다. 에바다 사태가 정상화되면 때인 1천만원을 돌려 받겠다는 그이의 새해 소망 역시 에바다새태 해결이었다.
권오일 선생님 역시 "분위기는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봅니다. 지난 번 국정감사 때 이성재 의원이 에바다복지회 이사장으로 오겠다고 했고 평택시장도 인정한 만큼 이제 칼자루는 이 의원한테 달려 있습니다. 현재 임시국회 중이어서 후속 조치가 없지만 이 의원이 1월 7일 이 부분에 대해 논의하자고 청와대와 관련기관에 얘기했다l고 하니 그 말을 믿을 수 밖에요."
그리고 새해가 지나 공대위 차원에서 한국장총 지도부를 찾아갈 것이라는 향후 계획도 함께 밝혔다. "장애계가 이제 하나가 됐고 그래서 그 힘도 전보다 커졌을테니 한국장총에서도 에바다사태 해결에 힘을 실어 주실 것을 요청할 겁니다. 지난 번 조선일보에서 장애라는 단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한 것에 대해 직접 언론사까지 찾아가 정정보도를 내게 할 만큼 막강해진 한국장총이 4년째나 끌고 있는 에바다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재치 넘치는 유머로 사람들을 다독여 온 권오일 선생님도 많이 지쳤는지 올 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에바다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바람을 밝히며 다소 흥분된 모습을 보여줬다. 모 주간지 독자칸에 쓴 에바다 사태 해결을 위한 열망과 취재요청의 글을 보면 그 마음이 충분히 헤아려지기도 한다.
또 김태권 학생의 아버지 김주명 씨도 새해 첫날을 해아래집에서 보냈다. 해아래집이 세워진 후 얼마간 살림을 맡기도 했는데 IMF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생계가 급해지자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온다고 한다. 자신의 딸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모두 친자식 같아 떨어져 있는 동안에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한숨짓는다. "말을 못하는 아이들이라 전화로 목소리도 들을 수 없잖아요. 늦게 나마 우리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IMF가 터져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선생님들에게만 맡겨 놓게돼 많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농성 시작할 때 50명이나 되던 학생들이 차츰 졸업을 하면서 이젠 겨우 20명밖에 안 남았다"며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아이들이 다 졸업을 하면 더 이상 농성도 할 수 없고 에바다는 지금처럼 영원히 갈 수 밖에 없으니 지금이 사태해결을 위한 가장 적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해 첫날을 해아래집에서 맞은 기자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 어서 빨리 에바다복지회 운영이 정상화 돼서 해아래집의 향후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그 날이 올해에는 꼭 왔으면 좋겠다.
글/ 노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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