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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우리 아이들을 택할겁니다.

장애우가 된 첫사랑 찾아 새로운 가정 일군 엄연호씨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우리 아이들을 택할겁니다.

장애우가 된 첫사랑 찾아 새로운 가정 일군 엄연호씨

 

  활짝핀 봄꽃을 배경삼아 다양한 포즈를 취해보는 아내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남편. 화사한 봄거리에서 흔하게 연출되는 풍경화를 보며 누군가 수군거린다.
  “저 여자 아직도 그 남자랑 사나봐”
  아마도 오래전 그들 부부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게다. 하지만 두사람은 개의치 않는다.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부자연스런 오른팔에 군데군데 잘려나간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사지을 찍고 있는 남편 김병렬씨(51세·지체장애우). 취미로 하기에는 그의 사진찍는 기술은 아까운 솜씨다. 감독을 믿기에 마음놓고 편안하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갖은 모양새를 다 잡아보는 아내 엄연호씨(44세). 투명한 햇살 속에 그녀의 환한 미소가 번져간다.
  인천 부평인근의 교회에서 생생한 장애체험을 간증하러 다니는 남편과 대학원에서 법신학을 공부하며 사법고시를 준비중인 큰아들 철희(26세, 지체장애우),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 2학년에 복학할 예정인 둘째아들 용희(24세), 이렇게 네 식구가 살가운 정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내일을 꿈꾸며 사는 엄연호씨네. 가진 재산이라고는 영구임대아파트와 필수적인 교통수단인 낡은 승용차 한 대가 전부지만 남부러울것이 없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엄연호씨의 얼굴 뒤에는 순하디 순한 그녀가 사랑 하나로 헤쳐나온 모질고 가파랐던 지난 세월이 굽이쳐 있다.
  사실 엄연호씨는 이들 두 아들의 생모가 아니다. 그녀가 뜻밖의 화재로 큰아들과 함께 중화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던 김병렬씨를 찾아간 건 15년 전 이었다.
  “집에 갑자기 손님이 와서 큰 애와 저는 작은방에 전기장판을 깔고 잠을 자게 됐죠. 그런데 그날 밤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났어요. 작은 아들과 애들엄마는 다행이 무사했지만 큰애와 저는 몸에 65%, 3도 중화상을 입고 온몸이 심하게 일그러졌습니다. 몇 차례의 수술과 치료로 상당했던 재산도 몽땅 날리고 몇백만원의 빚까지 지게 됐죠. 그 사이 애들 엄마마저 떠나고 우리 부자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보는 김병렬씨. 충남 서천의 농가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 공부도 잘했고 직장에서 능력도 인정받았으며 리더쉽도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사고 당시에는 세관 공무원 생활과 무역회사에서 다년간 쌓은 경험을 토대로 개인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36세의 가장이었다.
  “애들 생모가 오죽했으면 자식까지 버리고 떠났겠습니까?” 그는 그때 집을 나가버린 아이들 엄마를 원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받았을 층격을 말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1살 어린 철희가 붕대를 감고 처절하게 신음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는 그는 아들 앞에서 만큼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삶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가질 수 없었고 희망없는 나날속에 폐인이 돼가고 있었다. 친구, 부모형제마저 발길을 끊어 사람이 그립던 그 시절.
  끝모를 절망과 외로움속에 날씨마저 을씨년스럽던 12월 어느날, 얼마간으 lclfyql와 먹을 것을 싸들고 세계위인전 ‘헬렌켈러’ 를 내밀던 29살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 엄연호 씨다.
  “참혹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저 사람이 정말 그일까, 믿기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이내 예전의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안타깝게 했죠.”
  엄연호씨의 말처럼 그들은 병상에서 다시 재회를 한 것이다. 그것도 6년만에.
  “부산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막 서울에 올라와 조그만 무역회사에 근무할 때였어요. 저는 회사에서 취급하는 염료의 수출입통관을 위해 세관에 오가는 업무를 봤죠. 바로 그때 세관원으로 일하던 이이를 처음 봤습니다.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한 세관일을 하다보면 힘이 쭉 빠지기 마련인데, 남편은 다른 직원들과 달리 친절하고 자상하게 일을 잘 처리해 주었어요. 체격도 건장한 미남이었죠. 그런데 알고보니 유부남이었던 거예요.”
  불혹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수줍은 소녀처럼 웃으며 말을 잇는 엄연호씨. 부산에서 사업하는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객지생활 초년병때 김병렬 씨를 놓고 소위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하지만 상대는 유부남이었고, 그녀를 거래처 여직원 이상으로 별다르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입술을 깨물었던 엄연호씨는 다른 부서 일을 보면서 가끔씩 인편에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 위안을 얻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당한 끔찍한 화재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 즉시 수소문해서 용기를 내어 병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 후부터 그녀는 바쁜 직장생활속에서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두 부자의 병상을 말없이 지켰다. 허벅지의 살을 떼어다가 하는 피부이식 수술과 손가락이 잘려나가 뭉툭해진 양손에 다 손등뼈를 빼내어 마치 동물의 발톱처럼 틈을 내는 기가 막힌 수술이 계속되던 하루하루. 그나마 다행으로 입원도중에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의료보험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병원비 걱정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생활을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비용은 있어야 했고 그것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기를 몇 개월. 수술이 어느정도 마무리 됐을 때, 엄연호씨는 인천 부평에 방 한칸을 얻어 두 부자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일과를 마치면 어김없이 그집에 달려가 밥과 빨래 등 온갖 집안일을 다했고, 사고 후부터 줄곧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져 있던 작은아들 용희까지 데리고 와서 세식구가 함께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아예 자신의 짐을 싸들과 들어와 남편의 아내, 두 아들의 엄마라는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남편도 처음에는 능력없는 자신을 떠나라고 간곡하게 말렸어요. 친정식구들 반대는 말할 것도 없었죠. 저보고 다들 미쳤다고 했으니까. 혼인신고도 못하고 살다 93년에야 겨우 했어요. 지금은 다들 인정해주시지만···. 전 그때 아무 거리낌이 없었어요. 그이와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부족함 없이 곱디곱게 자랐고 효녀였던 그녀가 부모, 형제와 등돌리며 고단한 삶을 스스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해답은 그녀의 말속에 들어있다.
  “저 여자도 뭔가 이상이 있을거야.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수술후유증으로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던 남편 대신 네 식구의 가장이 된 엄연호씨는 생선장수, 백화점종업원, 화장품의판원, 길거리 행상, 파출부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뼈저린 가난속에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플 시간도 없었던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재활에도 온 힘을 쏟았다. 처음에는 흉한 외모 때문에 마스크와 장갑을 손수 짜주던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재활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서기를 권했다.
  그 곱던 손이 거칠어만가고 두발에 굳은 살이 흉하게 베기는 아내를 보며 가슴아팠던 김병렬씨는 나름대로 세상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예전의 그의 경력은 무용지물이었고, 몸이 불편하고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현재만이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속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가장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없이 원망도 했다.
  그 시절 그래도 그가 유일하게 마음놓고 갈 수 있었던 곳은 인근의 교회였다. 힘들고 외로웠던 병상에서 갖게된 기독교 신앙은 그와 식구들에게 커다란 힘이었고 버팀목이 되었다.
  “먹고 사는 것도 문제였지만 손가락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심정은 미칠것만 같았어요.”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물론이고 양손가락을 절단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던 큰아들 철희를 두고 그들 부부는 가슴이 아팠다.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철희에게 피나는 글씨쓰기 연습을 시켰다. 집게같은 오른쪽 주먹손 틈새에 연필을 끼우고 고무줄로 붙잡아 맨뒤 왼쪽 주먹손으로 받쳐 두손으로 글씨를 쓰게하는 훈련. 글씨 한자를 쓰기위해 힘겹게 내리긋던 아들의 떨리는 손. 그러나 철희는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잘도 견뎌냈고 그 이듬해 5학년으로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남앞에 서는 두려움을 이기도록 시킨 웅변연습도 철희는 잘 소화해내 전국웅변대회의 상을 휩쓸면서 인천을 대표하는 학생웅변가로 자라났다. 성적도 우수해 중학교에서부터 법학을 전공한 대학가지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학비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고시에 도전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저같은 장애우가 일자리를 얻기는 힘든 세상 아닌가요.”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큰아들 철희가 법학을 선택하고 고시를 보겠다며 했던 말을 그들 부부는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다. 어쨌든 아들 철희는 무엇을 하든 잘 해내리라 그들은 믿고 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티없이 밝게 커준 작은 아들 용희도 마찬가지이다.
  “착하기만 한 우리 애들이지만 어린 나이에 자기를 낳아준 엄마가 떠나버렸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특히 사춘기때는 그 또래 특유의 예민함도 보였어요.”
  그때마다 그들 가족을 단단하게 엮어주었던 것은 기독교신앙과 그리고 가족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터놓고 이야기 하기, 주제를 정해놓고 토론하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그들 가족은 나눴다.
  학교생활, 이성문제에서부터 장애우의 사회생활 뿐만 아니라 조금은 거창한 우리사회의 구조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네식구가 둘러앉아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였던 앙금은 하나 둘 녹기 시작했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4년 현상금을 목표로 수기모집에 응모도 해보고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드디어 88년 아내와 함께 부평역 앞에 악세사리 노점상을 차리게 된다. 처음에는 몸도 따라주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남다른 시선속에 힘이 들었지만 아내를 도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단속반과 기존 노점상들의 텃새속에 리어카 하나로 그렇게 3년을 버텼다.
  그 후 남편 김병렬씨는 다니고 있던 교회 도서관에서 일도 했고 포네스장애인선교회 회장을 3년 동안 역임했다.
  “건강할 때는 몰랐는데, 중도장애를 입고 보니 장애우들이 너무나 많은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에 가슴 아팠습니다. 주로 인천에 있는 청각장애우를 돕는 일을 했어요. 교통사고나 산재의 해결사노릇과 법률자문도 했죠. 그런데 제가 손이 불편해 수화를 못하니까 아무래도 제약이 따랐습니다. 그러던 중 좋은 후배가 있어 회장자리를 물려주게 됐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김병렬씨는 91년부터 계속해서 각 교회를 돌아다니며 생활체험 간증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는 교회 몇군데서 살아온 이야기를 했던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은 인천, 서울은 물론이고 광주, 부산 등 지방에서도 초청의뢰가 들어온다. 시쳇말로 잘나가는 인기있는 강사가 됐다. 우렁찬 목소리에서 진솔하게 풀어내는 살아있는 삶의 이야기는 듣는이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리고 그 강사료도 적게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고 있다.
  그동안 아내 엄연호씨도 공업사에서 스티커 부치는 일을 부업으로 계속하고 있고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영구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아 집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애들은 애들대로 장학금이다 아르바이트다 해서 제 앞가림을 하기 때문에 학비걱정은 하지 않는다. 넉넉지는 못해도 네 식구가 먹고 살만은 하며, 이제 그녀가 하루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이일 저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재산은 서로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일 것이다.
  “집사람, 우리집에 와서 고생만 했어요···.” 김병렬 씨는 고맙고 안쓰러워 말을 잇지 못한다.
  “어머니, 저희들 믿으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효자로 소문난 두 아들의 위로는 그녀의 커다란 기쁨이다.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우리애들을 택할겁니다.” 엄연호씨의 소망이 있다면 두 아들 장가보내 며느리 들이고 손주 얻을때면 좀더 큰집에서 북적대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는 것 뿐이다.
 바야흐로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만개한 봄거리 한가운데 만나본 엄연호씨와 그녀의 가족들은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외모로 한몫보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울림이 되기에 충분할 듯하다.
 아니 그의 사랑은 심난하고 답답한 이시대에 날이 갈수록 파괴돼가는 가족관계속에서도 선명하게 피어난 무공해 사랑꽃처럼 보인다.

 

글/ 조 옥 객원기자

작성자조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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