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오뚝이 인생 정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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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인생 정희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장애를 극복하고 스스로 일어선 정희교씨, 그는 자신이 일어설수 있었던 이유로 강한 승부근성을 꼽는다.
"오직 살아 남겠다는 일념으로 세상을 헤쳐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오뚝이 인생 얘기를 들어본다.
"제천 시내에서 나를 모르면 간첩입니다"
그는 호기있게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알리 없는 사람들은 그가 제천시에서 꽤 유명한 유지인거나, 아니면 적어도 시의원쯤 되는 선량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지도, 그렇다고 흔한 구의원도 아니다. 그는 다만 평범한 한사람의 시민일 뿐이다. 그런 그가 제천 사람들에게 얼굴을 두루 팔리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런데 사실을 놓고 보면 그 까닭이라는게 그리 거창한게 아니다. 우선 그는 이십년 가까이 제천 시내의 큰 시장 두 곳에서 장사를 해온 처지다. 시장이라는게 속성상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므로 그 장소에서 얼굴을 파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하나 그가 제천 시민들에게 기억되는 건 그가 흔히 찾아볼수 없는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넘어져다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 그렇지만 오뚝이 인생은 말은 쉽지만 그렇게 쉽게 가능한 게 아니다. 더구나 심한 장애를 가지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많은 제천 시민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올해 서른아홉살인 정희교씨, 그는 지금 양쪽 다리에 인조 관절을 집어넣고 나서야 겨우 움직이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리뿐만이 아니라 오른쪽 팔도 굳어오고, 이제는 척추까지 서서히 마비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그의 지나온 삶이 그랬던 것처럼 좋은 날이 오리라는 게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이제 그이 굴고 많았던 삶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는 제천 토박이다. 제천시 외곽에서 일천구백오십칠년 정아무개씨의 아들 삼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부친은 농사를 지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수 없었다. 나중에 부친이 직업을 바꿔 환경미화원으로 일했지만 쪼들리는 살림살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겨우 국민학교만을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의 처음 직업은 체육복 가게 점원이었다. 당시는 그저 밥이나 먹여주면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으므로 월급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월급을 받는 직장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기술을 배우는 데도, 돈을 버는데도, 그는 실패했다. 이런 식으로 열아홉살 때까지 그는 갖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는 덜컥 장애를 가지게된다. 처음 왼쪽 다리가 쑤셔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장애는 나중에는 오른쪽 다리까지 통증이 오고, 설상가상으로 다리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움직일수 있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생활하게 됐다.
병원에서는 그의 장애를 "결핵성 고관절염"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장애 상태가 절망적이지는 않아서 "수술을 받으면 나을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수술비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는 결국 수술 한번 받지 못하고 꼬박 삼년을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채 집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어떻게든 내손으로 수술비를 벌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부모님에게서 당시 돈 칠천원을 받아 장사를 시작한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단돈 칠천원으로 할수 있는 장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밑천이 없었던 그가 할수 있는 장사는 노점상밖에 없었다. 그는 제천시내 화산동 대로변에 나무상자를 하나 갖다 놓고 쥐포를 팔기 시작했다.
뙤약볕에 앉아서 열심히 쥐포를 팔았지만 장사는 그리 시원치가 않았다. 하루매상이 고작 천몇백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돈도 창피하니까 술 한잔 먹고, 심심하니까 담배한갑 피우고, 배고프니까 점심 한끼 사먹으니까 오히려 쥐포를 판돈이 몽땅 다 들어가도 부족했다. 안되겠다고 판단한 그는 장사를 시작한지 며칠후 술 담배를 끊고, 점심도 거르고 먹지 않았다.
정희교씨는 지금도 술 담배를 일절 입에 대지 않는데, 그건 이시기, 그가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의 모진 결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심을 거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시기 그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국도 안먹고 물도 안 먹고 달랑 밥 한덩어리만 먹고 나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의 모진 결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일절 수분을 취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생리현상을 극복하고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곳도 없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고 남의 화장실에 들락날락 거리기가 창피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눈이오나, 비가오나, 쉬는 날도 없이 장사를 하던 그에게 뜻하기 않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경찰들이 노점상 단속을 한다는 명목으로 장사를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다시 한번 모진 결심을 하고 근 한달여를 경찰서로, 군청으로 쫓아 다녔다. 하루는 경찰서 보안과장을 만나고, 하루는 군청사회과장을 만나 그는 "더도 말고 삼년만 장사해서 다리 수술할 돈만 벌면 나오라고 빌어도 안나올테니까 제발 사정좀 봐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빌었다. 하지만 그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군청과 경찰서에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그는 어느날 이판사판의 심정을 가지고 군청과 경찰서를 찾아가서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며 책상을 둘러엎었다. 그런 다음 "이 나쁜놈들, 사람 살려달라는데 외면하는 너희가 공무원이냐!"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그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난동을 부리자 그제서야 공무원들이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제발 집에가서 기다리십시오"라고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며칠후 그의 집으로 "도로점용 허가서"가 보내져왔다. 그 허가서는 당시는 군이었던 제천시에서 처음 나온 "도로점용 허가서"였다.
군으로부터 노점상 허가서를 받아쥐자 그는 장사하던 자리에 알루미늄으로 가판대를 만들었다. 그리고나서 장사 품목도 늘려 쥐포뿐만 아니라 주택복권, 신문도 팔고, 엿과 과자 등 주점부리도 팔았다. 그렇게 장사를 하면서 그는 나중에 자신의 장사 기반이 되는 서울 경동시장 도매상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꼬박 그 자리에서 이년여 장사를 한 그는 이백여만원의 수술비를 벌수 있었다. 그 돈으로 그는 팔십년 이월달에 서울로 올라와 제일병원에서 일차 수술을 받았다. 수술결과는 좋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장애가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몇 년후에 재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다시 제천으로 돌아온 그는 재수술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장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날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형이 찾아와 "내가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어 먹고 살 것이 없으니 가판대를 나한테 넘겨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물론 그는 거절할수 있었지만 피차 모르는 처지가 아니었고, 선배형의 처지가 딱해 보이기도 해 아깝기는 했지만 "어차피 나는 다리를 고치면 장사를 안하려고 했으니까, 낫지는 않았지만 일단 수술은 받았으니까 애초 목적은 이룬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때 돈으로 리어카 한 대값을 받고 가판대를 선배형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그가 선배형에게 받은 돈은 알루미늄 샷시값도 안되는 십만원이었다.
십만원이라는 돈을 들고 무슨 장사를 할까? 고민하던 그는 그해 가을 친구와 동업으로 서울 경동시장 도매상에서 엿을 떼다가 제천 시내 구멍가게에다 내다파는 도매상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와의 동은 얼마안가 깨졌다. 친구가 보기에는 그가 몸이 불편하니까 궃은 일은 모두 자기가 도맡아 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이익의 반은 나눠야 했으니 차라리 혼자 장사를 하는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리어카 한 대를 사서 홀로 장사에 나서야 했다. 물론 당시는 친구의 배신이 가슴 아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친구와의 동업 관계를 청산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그 시점부터 그에겐 운이 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그가 리어카로 엿장사를 시작할 무렵, 때마침 제천에서 유명했던 엿장사 할아버기자 은퇴를 했다. 그 틈을 그가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여기에다 당시 제천에서는 참께엿과 들깨엿이 한창 유행했었는데, 특히 참깨엿은 재래식 방법으로 만드는 진짜엿이 크기가 작았던 것에 비해 서울에서 가져오는 가짜 참깨엿은 맛은 똑같았는데 크기가 훨씬 컸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큰 엿을 사먹는 사람들의 심리가 작용해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짜 참깨엿을 갖다가 막 퍼먹이니까 제천 사람들이 죽을둥 살둥 모르고 막 먹었다"그는 예전에 가판대를 하면서 서울 경동시장 도매상들과 충분히 안면을 익혀놨기 때문에 참깨엿을 무한대로, 그것도 외상으로 가져올수 있어서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할수있었다.
비록 리어카 노점상이었지만 그의 엿장사로 날로 번창했다. "엿장사 정"이라면 제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도매를 하고 낮에는 직접 리어카를 밀고 번화가로 나가 소매를 했다. 엿장사는 마진이 오십프로가 넘었으므로 돈을 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장사를 시작한 지 육개월째 되던날 그는 한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엿을 가져오지 못해 못팔 정도가 장사가 잘되자 그는 왕창 돈을 벌겠다는 욕심으로, 사람들이 구정이 지나면 엿을 잘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돈 다 털어 서울에서 일톤 트럭에 한차 가득 엿을 떼온 것이다. 그 엿이 팔리지 않아 그는 큰 손해를 봐야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엿장사는 철 지나면 그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다른장사에도 손을 댔다. 도너츠 장사도 하고 산나물 장사도 했는데, 특히 산나물 장사는 이익이 짭짤했다. 산나물 장사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촌에서 아주머니들이 가져오는 보따리를 하나 잡아서 소매상들에게 넘기면 하루일당이 떨어졌다.
이렇게 돈을 벌어 그는 팔십이년 가을 처음으로 제천 중앙시장에 점포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가 잡히자 그는 결혼을 서둘렀다. 마침 친구 동생을 소개받아 그는 일단 약혼식만 하고 아내와 같이 살았다.
결혼을 하고나자 그의 장사는 더욱 번창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에 가면 돈이 막 걸어다니는 게 보였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엿장사 외에 센베이, 건빵, 등 막과자 장사도 시작했다. 제천에는 없는 장사만 끌어왔으므로 당연히 그의 장사는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꼬박 일년여 장사를 하자 그의 수중에는 조그만 집 두채를 살수 있는 거금이 쥐어졌다.
이제 그의 고생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또 한번의 좌절을 예비해 두고 있었다.
그가 번 돈으로 집이나 한재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배달을 나갔다가 그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사고로 두달반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첫아이가 태어나서 아내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같은 시기에 어머니도 맹장수술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멀쩡하시던 아버지마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우환까지 겹쳤다. 거기서 우환이 끝났으면 그도 충분히 재기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곧이어 첫 아이인 큰딸이 심장병을 앓으면서 아내가 충격을 받아 내리 삼년을 앓아눕게 되면서 그의 집안은 말그대로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가족을 병치레하느라 번돈이 모두 들어가고도 모자라 빛까지 지게 되었다. 다행히 아내는 병석에서 일어났으나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밑바닥이라는게 정말 허무했다"고 말하고 있다.
비참한 상태에 빠진 그는 당장 먹고살게 없어 전전긍긍해야 했다. 때마침 계절도 여름이라 엿장사와 막과자 장사가 될리 없었다. 곤경에 빠진 그는 타개책으로 미루어두었던 결혼식을 올릴 것을 결심한다.
"그동안 장사하면서 남 결혼식에 많이 갔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결혼식만 올리면 몇 달 지낼 돈은 생기겠지"이런 생각을 한 그는 팔십육년 여름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다행히 그의 예상대로 결혼식에서 몇 달 먹고 살돈을 건져 그는 그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된다.
그 암울했던 여름을 보내고, 그는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 제천 동문시장으로 장사터를 옮겼다. 방이 딸린 가게를 하나 얻어 다시 엿장사와 막과자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는 그럭저럭 잘됐다. 거기에다 트럭을 구입해서 야채장사까지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숨통이 트이면서 얼마안가 그는 가게를 세 개까지 늘릴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들어와도 모두 수중에 남지는 않았다. 그는 다음해인 팔십칠년, 다리 통증이 심해 재수술을 받았다. 구십년에 또 수술을 받고, 그 후로도 수시로 수술을 해 그는 최근까지 무려일곱번에 걸쳐 다리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비로 많은 돈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벌어서 돈이 모일만 하면 병원에 갖다줘야 했지만 예전처럼 생활이 쪼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동문시장 요지에 고추방앗간 한곳과 막과자와 야채를 파는 또 다른 가게를 가지고 있다. 합해서 두 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차도 두 대나 굴리고 있다. 최근에는 집까지 구입해 그는 남부러울 것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장애를 극복하고 스스로 일어선 정희교씨, 그는 자신이 일어설수 있었던 이유로 강한 승부근성을 꼽는다.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세상을 헤쳐나왔다"는 것이다.
승부근성이 있으면 그는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불가능이란 건 있을수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태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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