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이 상황에서 극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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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극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절단 장애우 서정 씨
축구선수로 시작해 코치로서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서정씨는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를 가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버거씨병이라는 희귀한 장애로 인해 손가락 다섯 개마저 절단해야 하는 불행 속에 빠진 그, 그러나 그는 불행을 이기고 지금 장애우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아픔과 희망을 들어본다.
전락(轉落)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 사람이 나쁜 상태로 빠지는 것을 가리키는 이 말은 흔히 사람의 신분이 바뀌었을 때 사용된다. 즉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 중한 장애를 가지게 되거나,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가 이 말이 적용되는 경우이다.
올해 마흔일곱살인 서정씨에게 "전락했다."라는 표현을 쓰면 그는 억울해할까.
하긴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인하여 나쁜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 자체는 불행이지만 불행을 겪음으로써 오히려 간과하고 있던 진실을 발견하는 수도 있다. 그 진실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으로 다가오는데 그 중 흔한 예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체득하는 것이다.
서정씨도 장애를 가지지 않았으면, 그리고 장애로 인하여 가난해지지 않았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소중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삶을 마쳤을 것이다. 그래서 잔인한 말이지만 여기서 그에게 장애는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는 비약을 해볼 수도 있겠다.
서정씨는 지금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간인 "벧엘 장애인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전락해서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불행 앞에서 당당하다. 그러나 그에게 "전락했다."는 표현을 들이대면 그는 억울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정씨를 제외한, 그리고 속사정을 모르는 타인의 입장에서는 서정씨가 전락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곤두박질 칠 수 있느냐."는 심한 안타까움의 토로와 함께 그의 불행을 동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장애를 가지기 전 서정씨는 어떻게 살았나.
그는 운동선수였다.
부산 한양중고 시절 축구를 시작해 학교 대표선수와 청소년 대표선수로 활동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이번에는 코치로 한창 주가를 높이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 때는 일천구백팔십삼년이었다.
그 해는 그에게 영욕을 함께 안겨다준 해이기도 하다. 영광은 청소년 대표팀 코치로서 지금도 축구팬들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멕시코 청소년 월드컵 사강"의 신화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소속팀인 "대우 로열즈"로 복귀한 그는 팀이 독일로 전지훈련을 가게 돼 따라갔다가 장애를 가지게 됐다.
그가 소속된 "대우 로열즈"는 독일 전지훈련에서 프로팀인 "보쿰"팀과 잦은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어는 날 연습경기에 그치지 않고 내기 경기를 하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무려 십만달러라는 돈을 걸고 내기 경기를 하게 되자, 양보할 수 없는 게임의 승리를 위해 그는 벤치를 벗어나 선수로서 그라운드를 누비기 시작했다.
"보통 축구선수가 머리로 받을 공을 나는 가슴으로 받았어요. 그만큼 점프력이 뛰어났던 거죠. 그런 내 장기를 살려 전반전에만 내가 세 골을 넣었어요. 어떻게 넣었냐면 상대편 문전에서 동료가 센터링 해 주면은 내가 떠서 해딩하는게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서 터닝슛을 차니까 상대편이 속수무책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전반전이 끝나 보쿰팀이 삼 대 영으로 진 상태에서 후반전에서 내가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골을 넣으려고 점프를 하니까 독일 선수가 뒤에서 내 다리를 냅다 찬 거예요.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죠."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간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칠십사일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다친 지 칠십오일만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이번에는 두 다리가 골수염으로 진행됐다는 치명적인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를 치료한 독일 의사는 "나는 당신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그걸 신경 쓰다 보니 다리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그는 입원한 독일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회복 불능의 신고를 받게 되자 어떻게든 다리를 고쳐 보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병원을 찾아 전전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국내 병원으로 유랑하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이미 염증이 생긴 그의 다리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절망 상태에 빠진 그는 일본 동경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살을 시도했다. 수면제 백팔십여 알을 입에 털어넣고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지만 그의 자살 시도는 마침 주사를 놓으러 온 간호사에게 발각돼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위세척을 당한 끝에 삼일만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떤 고통을 겪어도 좋으니 제발 다리만은 절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는 병실에 누워 누군가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냉엄한 운명은 그의 애원을 야멸차게 묵살했다. 국내에 돌아와 역시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골수염이 골수암으로 진행됐습니다."라는 최후통첩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백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상심해 있던 그는 설상가상으로 아내와 이혼의 아픔마저 겪어야 했다.
"아내 쪽에서 못살겠다고 이혼해달라는데 어떡합니까. 이혼해 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보상금으로 받은 돈의 대부분을 위자료와 두 아이의 양육비로 아내에게 건네주고 혼자가 되어 외로운 투병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가 나머지 한쪽 다리를 마저 절단한 것은 팔십팔년이었다. 그 때 이후 그는 두 다리가 없는 중증장애우로서 험한 세파에 시달려야 했다. 장애를 가지기 전 월수입으로 이백만원을 넘게 벌고, 그래서 부족할 것 없는 중산층으로 살면서 두 아이의 커 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던, 그리고 미래에는 후진 양성에 매진하면서 축구 발전에 기여 하리라던, 장밋빛 삶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그는 병실 시트를 쥐어뜯으며 회한에 몸부림쳐야 했다. 다시 죽음을 생각하던 그,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삶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주는 한 계기가 찾아온다.
"내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 두 눈을 실명한 시각장애우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한 쪽 다리가 절단돼 있는 상태에서 다시 사고를 당해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절단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전혀 살 가치가 없어 보였어요. 안 그렇겠어요. 볼 수도 없고 두 다리가 없는데, 그래서 내가 물어봤죠. 아주머니 그런 몸으로 뭐하러 살려고 합니까?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 웃으며 그러는 거예요. 왜 내가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죽습니까. 우리 아이들도 있고,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데 왜 내가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죽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으로 서늘한 깨달음이 왔어요. 그래서 그 아주머니한테 사과했습니다.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나는 이 세상 그만 살려고 그랬는데 아주머니를 봐서라도 내가 앞으로 열심히 살게요."
"열심히 살겠다."는 그의 다짐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구체화 됐다. 장애 때문에 취업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곧바로 자영업을 시작했다. 혼자 자취하면서 문구점을 열고, 만화가게를 운영하고, 최종적으로는 시흥에서 정육 도매점을 경영하면서 그의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 살겠다는 삶의 결단은 서서히 가시화된다. 그의 더불어 살겠다는 대상의 설정은 자신의 처지로 인해서이기도 했지만 장애우로 귀결됐다. 그는 시흥에서 정육점을 운영할 때 일부러 전과자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들과 같이 일하면서 "이 사람들도 일을 하는데 우리 같은 장애우들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고 생각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장애우들 속에 들어가 장애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것으로 귀착됐다. 그는 아무 미련없이 정육점을 정리해 같이 일하던 전과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줬다. 그런 다음 "공동체로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 없어서" 단 돈 오만원만을 들고 장애우 행사에서 알게 된 경기도 성남에 있는 장애우 공동체 "은혜의 집"으로 들어갔다. "은혜의 집"에서 그는 밑바닥 장애우들과 어울려서 일년여를 지냈다. 그러다가 "부활교회"라는 역시 장애우 공동체로 옮겨갔다. 그는 이 "부활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부활교회" 식구로 있으면서 한 일은 시장 바닥을 기면서 잡화를 파는 수세미 장사였다. 왕년의 촉망받던 축구 코치가 이제는 행인들의 동정에 기대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로 추락한 것이다. 당시 시장바닥을 기어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부활교회"에 기거하면서 일년하고 한 달을 꼬박 수세미장사를 했다. 그래서 일천오백만원을 벌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돈에 욕심이 없었던 그는 그 돈을 다 써버렸다. 바로 그즈음 그가 처음 의도했던 더불어 사는 삶은 단지 희망사항으로만 남아 있었고, 여기에다 장애우 공동체들의 고질적인 병폐인 후원금을 둘러싼 운영자의 전횡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제 이런 삶도 귀찮다."는 핑계를 대고 "부활교회"를 벗어나 혼자 독립했다. 이때가 일천구백구십구년이었다.
그런데 서울 문정동 비닐하우스촌에 거처를 정하고 이제는 혼자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과 쓸쓸함을 곱씹던 그에게 다시 가혹한 운명이 찾아왔다. 어느 날 부터인가 오른손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손가락이 손톱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의 장애를 버거씨병, 일명 혈전성 동맥염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골수암으로 두 다리를 잘랐는데 이젠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장애로 인해 손가락마저 잘라야 하다니, 그는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운명에 다시 한번 진저리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냉엄했다. 그는 손가락을 절단하지 않고 어떻게든 치료하기 위해 애써봤지만 결국 버거씨병이 온몸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섯 개의 알토란같은 손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다리와 손의 장애, 가혹한 운명이 그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 또 무엇이 남았을까.
그는 자신의 버거씨병이라는 장애를 신의 징벌로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부활 장애인 교회에 있을 때 거기 식구들 대표였고 예배시간 때마다 기타를 치며 찬양 인도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그 짓 안하겠다고 그만 뒀더니 손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부활교회에 있기 귀찮아서 나왔거든. 그러니까 또 다시 손이 아프기 시작했고 결국 버거씨병을 앓아 장애를 가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손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생각했어요. 아 장애인들을 위해서 뭔가 일을 하긴 해야겠구나."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광암동 이칠칠번지 "벧엘 장애인 농장"이었다. 이때가 구십일년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기 전 그에게 불행만이 있은 건 아니었다. 그는 농장을 시작하기 전 재혼을 하게 되는데 "부활교회"에 있을 때 알게 된, 그 자신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평생 장애우를 위해 살겠다는 열 살 밑의 소아마비 장애우 강명화 전도사와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그에겐 행운이었다.
서울을 약간 벗어난 중부고속도로 변에 있는 "벧엘 장애인 농장"을 처음 시작할 때 그는 역시 "부활교회["에 있을 때 알게 된 장애우 여섯명과 함께 일년에 쌀 열세가마니를 주기로 하고 땅 이천칠백평을 임대했다. 그 땅에다 채소와 과일을 심고 같이 사는 미래를 설계했지만 처음 같이 농장을 시작한 장애우들은 지금 그의 곁에 없다. 힘든 농사일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부랑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부랑인들 중에서도 주로 장애우들을 데리고 그는 농사를 짓는다. 지금 "벧엘 장애인 농장"에는 정신지체 장애우 두명, 절단 장애우 네명, 소아마비 장애우 두명, 질병을 가지고 있는 장애우 네명 등 모두 열두명의 식구들이 공동체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모두 다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그리고 청량리역 주변에서 노숙하며 구걸해서 먹고살던 장애우들이다.
그는 이들을 일주일에 한 번 영등포역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만났다. 처음 그가 전도를 하면 장애우들은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통해 전도가 되면 그는 그들을 농장으로 데려왔다. 많을 때는 식구가 육십명 가까이 됐지만 술을 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하다 보니 대다수가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열두명만 남게 됐다.
일단 장애우들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그는 "여기는 농사짓는 곳이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곳이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뜻이 있다면 여기서 사시고 그렇지 못하다면 나가서 사십시오."라고 권유를 한다고 한다. 그의 권유를 듣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장애우들은 농장에 남게 되지만 떠돌면서 나태한 생활을 이어가던 장애우들을 술을 끊지 못해 결국 농장을 떠나고 만다.
아침 먹을 때 봤는데 점심때 없어지는 장애우들을 목격했을 때 그는 황당함을 맛본다. 그렇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어떻게 든 단 한 사람이라도 떠도는 장애우들을 농장에 정착시켜 새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각오이다.
"벧엘 장애인 농장"의 일과는 신앙 생활위주로 짜여져 있다.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서 예배 드리고, 식사하고 난 뒤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점심 식사를 하고 난 오후 두시에 기도시간을 갖고, 그런 다음 다시 일하는 생활이 매일 반복된다. 그가 이렇듯 신앙 위주로 식구들을 몰아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가 하는 일이 뭡니까, 사람이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교회지요. 그럼 부랑인들이 왜 밖으로 떠도나 이유를 따져보면 바로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사람도 우리나라의 큰 인적 자원임이 분명한 이상 나는 그 사람들 생각을 바꿔서 농촌에 가서 농사짓게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여기서 자연농업을 배우게 해서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는 게 내 목표지요."
그는 농장을 운영하면서 독특하게 자연농업을 고집한다. 일절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농업을 고집하는 그의 농사법은 흔히 떠올리는 유기농업과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우리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음식물까지 병든 거 약 친 거 먹을 수 없는 거 아니예요. 그래서 음식물이라도 최소한 싱싱한 걸 먹자, 건강 상태를 더 이상 버리지 말고 유지하자, 그래서 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고 공기 신선한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장애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내 믿음입니다."
"벧엘 장애인 농장"에서 수확되는 농산물은 식구들이 자족하고 극히 일부분만을 시장에 내다판다. 자연농업으로 지은 채소와 과일이다 보니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런 반응에 힘입어, 그는 내년부터는 대규모로 농사를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식구들이 떠돌던 사람들이다 보니 한 곳에 정착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제일 마음 아프다는 그도 처음에는 식구들에게 보다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후원을 받아서 이 일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 장애우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한 평 땅에서 무 하나만 나와도 나는 할 수 있구나. 라는 성취감이 중요하다고 생각돼 후원받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장애우들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장애를 인정하면 편안해 집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부분이 되고 저 부분은 안된다면 되는 부분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 원칙을 식구들에게 늘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신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공동체 운영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새로운 삶을 앞두고 있는 그는 가까운 시일안에 두레마을을 모델로 대규모 국유를 빌려 장애우 촌락을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땅으로 시작하면 다툼이 있기 마련이기에 정부 국유지를 임대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는 가능성을 긍정하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쯤에서 그의 원래 직업이었던 축구 이야기를 해보자. 축구 이야기를 꺼내자 이제 마흔일곱살이 된 서정씨는 축구 코치로 활약할 당시 같이 활약하던, 이제는 여러팀의 감독으로 자리를 자은 동료들과의 교류를 애써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 텔레비전에 축구 경기 중계가 있는 날이면 빼놓지 않고 경기를 지켜본다는데 그 경기를 지켜보면서 그는 그 어디쯤에서 화려했던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을까.
"장애를 가지기 전에 아무리 잘돼 있었으면 뭐합니까. 지금 상태가 중요한 거지요. 그때 아무리 내가 잘돼 있었어도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극복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눈가에는 어쩔 수 없이 한 점 회한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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