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희수 시인 1주기 추모 특집 미완성 소설 > 함께 사는 세상


고 정희수 시인 1주기 추모 특집 미완성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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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양말
이 소설은 정희수씨가 생전에 쓰다가 완성을 하지 못한 단편소설이다. 굳이 미완성 작품인 이 소설을 싣기로 한 것은 이 소설이 정희수씨 자신의 삶을 형상화한 자전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작가의 성장과정과 빈곤, 그 속에서 깨닫게 되는 사회문제에 대한 분노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생전의 정희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드러내기 싫어했던 장애 외의 아픔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1
 - 칠년 만인가.
 지리산 끝자락인 경상남도 OO에 있는 선산에 아버지를 안장한 뒤로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제사상 앞에 서 본 적이 없었다. 성묘는 말할 것도 없고 묘지 상태를 살펴보러 함께 가자는 가족들 의견까지도 지질러 밟듯이 외면해 왔다. 그것은, 내가 제사상 앞에서 절하기를 금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대리업보(代理業報)인 양,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문신처럼 신체의 사분지 일이 소아마비로 망가져버린 내가, 아버지에 대해 내 존재를 끝끝내 확인시키려는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밤 기차를 타고 있다. 아버지를 선산에 안장하던 날, 가족들과 친인척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절은커녕 술 한 잔조차 따라 올리기를 거부했던 내가 성묘를 가고 있는 것이다. 겨울 양말 두 켤레를 가지고서.
 저 멀리 차창 밖으로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풍경이, 간간이 드러나는 농가 불빛을 받으며 비척비척 지나가고 있다. 한가위가 지난지도 한 달이 넘었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 나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소주병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 고운정 미운정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부자지간이라던데요, 하지만 그동안 제게는 미운정과 서글픈 감정이 더욱 복잡하게 버무려져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육군 특무상사로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 총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후방으로 이송된 뒤, 훈장을 받고 제대했다는 아버지, 술에 잔뜩 취한 날이면, 장남인 나를 앞에 앉혀놓고 그 훈장을 꺼내 들고는 움푹 패인 오른쪽 이마를 보여주면서 전쟁 당시를 흥분된 어조로 무용담처럼 들려주던 아버지, 하지만 학도군이었던 자신의 형님이 "빨갱이 개새끼"들에게 "학살"당한 얘기를 할 때는 그렁그렁한 눈이 되어 더없이 서글픈 모습이던 아버지. 그럴 때마다 나는 정신없이 씨줄과 날줄을 걸터듬는 감정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일학년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살아 있었더라면 내 큰아버지가 되었을 형님이 학살당한 얘기가 끝나면, 간혹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 공비분자놈들이 고마 형님을 직인 기라. 개새끼들! 그때 고마 확 싸그리 쓸어삣어야 되는긴데……. 양민이라꼬? 학살이라꼬? 총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자석들이 주딩이만 살아갖고……, 학살 억수로 좋아하고 있어. ……산청하고 함양서 공비들 땜에 내 부하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들이, 뭐가 우쨌다꼬? 양민을 학살했다꼬? 허허 참말로, 얼척이 없어서……"
 아버지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는 그럴 대마다 "인자 그 소린 그만 치우소. 그란다꼬 야가 그 말을 알아 듣겠는교" 하면서, 내게 빨리 건너가서 잠자라는 눈짓을 보내는 것으로 하루가 정리되곤 했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가장 인간답다고 느껴질 때는 바로 그런 순간 뿐이었다. 아버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군주로서 집안을 다스려왔으니까. 당시 서울 명동에 본사가 있었던 "금메달의 집 칠성제화" 제 3공장(수출화 공장) 공장장이었던 아버지는 월급액수가 대단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번도 생활비를 내놓지 않았다. 노름으로 탕진했으니까. 심지어는 부산에 회사 일로 출장을 간다면서, 술집여자에게 아파트를 마련해주고도, 자식들 학비는 어머니에게 떠다 맡겼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찌그러진 양은대야에 눈깔사탕, 왕사탕, 김밥, 과일 등을 담아 머리에 이고는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판 돈으로 우리 사남매를 키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아버지는, 시도때도 없이 어머니를 구타했고, 자식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대상으로 삼기가 일쑤였다. 장손 집안 장남이란 놈이 병신이라니 하면서(아직까지도 나는 앞뒤가 불분명했던 아버지의 유교사상에 학을 땐 때문인지, 방송매체에서 충효사상 운운하면, 억지춘향이 사상은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심정이 되고 만다.) 그런 날은 노름판에서 돈을 몽땅 날려버렸다고 보면 대개 정확했다. 다음날 아침엔 어머니의 행상비용이 몽땅 없어졌고, 그에 따르는 어머니의 눈물바람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춘기였던 나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의 뿌리를 깊이 깊이 박아가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나는 점점 말수가 적어져갔고, 그 부리가 착근이 되고 나이테가 늘어가기만을 운명처럼 기다려야만 했다.

2
 1951년 2월 10일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관해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960년대 초·중반 교과서엔 어떻게 기술되어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그 뒤 대학물이라는 것을 먹으면서, 그리고 자의적으로 대학을 중도에 그만 둔 뒤 좀 더 나이를 먹고 사회에 대해 눈을 뜨면서 어느 정도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 엉머구리 같은 의식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면서 무장공비들의 칼을 받고 죽어갔다는 초등학생의 황당하다 못해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소설같은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했다니! 나중에야 그것이 치기어린 어느 신문기자가 영웅심에 들떠서 쓴 작문이었음을 알고는 "어떤 개새낄까?" 하고 말았지만, 그러한 의식은, 소위 "부마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죽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북괴가 쳐들어오면 어떡하지" 하는 데까지 이어져왔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월 부터였다. 나는 그때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대복사(大福寺)"라는 신라 천년고찰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들려오는 엄청 나고 흉흉한 소문과 함께, 절 주변 요소요소를 차단한 채 새벽녘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장군인들(계엄군)의 지명수배자 색출 신분증 검사와 신원조회……. "다리는 언제 어떻게 다쳐서 절룩거리느냐?"면서 기어코 비쩍 말라빠진 내 오른쪽 다리를 검사하고서도, "경상도놈이 전라도까지 와서 고시공부를 하는 게 어쩐지 수상쩍다."는 이유를 달아 절 부근 관할 파출소에 끌고가서 어르고 뺨 치는 식으로 신원조회를 할 때 느꼈던 공포감, 하지만 그 공포감 속에서도 나는 비상정화를 통해 싸움을 하듯이 악을 써대는 군인들과 경찰관들의 대화내용에서 그 해 5월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 해 7월,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한동안 번민에 휩싸인 채 지냈다. 법학서적밖에 볼 줄 몰랐던 내게 그 해 5월의 참상은 -그것이 정부발표가 옳았든 소문이 옳았든지간에 -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는 지극히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역사사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사법시험에서 국사가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에 몇 권의 책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자꾸만 허기를 느끼는 속을 도저히 채울 수가 없었다. 대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뒤져 자료를 구하려 했으나, 얼어붙은 시대상황 탓에 수월치가않았다. 생각 끝에 청계천 헌 책방을 샅샅이 뒤져 세계사를 포함한 역사책을 수십 권 사들여 걸신들린 것처럼 읽어나갔다. 그 때문에 주머니에는 점심값은 고사하고 버스비조차도 달랑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런 식으로 열병을 앓듯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그 열병에서 벗어나려고 할즈음, 나는 정신적으로는 더욱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를 어느만큼 파악하고 나자 "산청하고 함양에서 내 부하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하던 아버지의 중얼거림이 가끔씩 내 머리 속을 어지럽혔던 것이다. 그런 어지럼증은 그러나 그닥 오래 가지 않았다. 노름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린 아버지는 그때 서울역 부근 염천교에 몰려있는 소규모 제화점(製靴店)을 상대로 하는 피혁거간꾼으로 전락해 있었고, 그 수입이란 자신의 술값과 찻값 담배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아버지의 부족한 용돈 충당과 집안 치다꺼리는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31일부로 모든 과외를 중지당한 탓에, 내게도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내 목을 조이고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생각만은 얻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뚜렷한 철학도 없이 기계적으로 법을 배우면 남을 해치기 딱 알맞다는 것 …. 시험에 합격하면 검사가 되어 사회정의를 세워 보리라던 내 알량한 생각은 뿌리째 뽑혀나가고 있었다. 사법시험이라는 작은 접시에 입을 댄 채 버둥거리며 목말라했던 나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만 들면 주위에는 수많은 접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 …… 시험공부 이제 그만 둬야 될 거 같습니더."
 불콰한 얼굴로 밤늦게 집으로 들어와 또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조금씩 흘러갈수록 내 마음엔 불안감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나가!"
 뒤통수를 오지게 내려치는 듯한 둔탁한 목소리였다. 한마디쯤은 그 이유를 물어오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너무나 순진한 발상법이었다.
 "예?……"
 "나가라는데!…… 내 말 몬 알아 듣겄나?"
 "…… 무슨 말씀이신지예……"
 "이놈아아 새끼가! 나가라면 나갈끼지. 말씀은 무슨 말씀이고!"
 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내 멱살을 붙잡고는 집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곧이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 갈갈이 찢어발긴 법학서적을 한무더기 들고 나와 내 얼굴에다 흩뿌리는 것이었다. 조용하던 집안이 느닷없는 벼락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그래왔듯이 아버지의 서슬퍼런 위세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아버지 뒤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여동생을 붙들고 소리 죽여 울기만 할 뿐이었다 .대학 4학년과 2학년인 두 남동생은 안타까운 눈길로 밭은 기침만 간간히 내뱉을 뿐, 아예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부유별, 장유유서, 부자유친…… 가족들의 아버지에 대한 굳어진 인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리 부모라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행위를 이해할 수가 아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딱 한 번 만이라도 좋았다. 고함이라도 지르면서 따져보고 싶었다.
 대문 앞 골목길에 깨구락지처럼 패대기쳐져 있던 나는 내 앞에 널려 있는 책 쪼가리를 집어들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며 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책이, …… 이 책을 우찌 해서 샀는지나 아십니까! 언제 지한테 공부하는 데 쓰라고 십원짜리 하나 보태주신 거 있습니꺼? 이 책이 아버지한테 뭐라캤습니까?"
 철썩! 뺨을 올려부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금 땅바닥에 나뒹굴렀고, 뒤이어 발길질이 내 몸구석구석을 핥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감싼 채 뱃속 태아처럼 동그마니 몸을 오그리며 자근자근 밟히고 있었다.
 "건방진 놈! 애비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짠다고? 어따가 대고 따지고 말대꾸를 하노! 이런 돼묵지 못한 놈. 아무리 몬나도 부모는 부모다. 이놈이 죽을라꼬 환장을 해도 유분수제. 어따대고 말대꾸고, 말대꾸는!"
 어머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어찌된 셈인지 슬그머니 웃음이 삐어져 나오면서, 육체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묘한 희열에 휩싸이고 있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실체를 거듭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순간이라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면서 갑자기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 어머니, 절대로 아버지를 말리지 마시소. 그카다간 어머니마저 매를 맞게 됩니더.
 "여어가 서울이니까 니놈이 무사하제, 시골 고향만 같아서봐라. 멍석말이를 해도 버얼써 했을끼다. 원, 이런 호로 돌놈같이 건방진 놈. 내가 니놈 땜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같으이. 당장 나가 뒈지삐리거라."
 -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고생은 자식을 걱정한 어버이의 마음고생이 아님을 난 압니더. 당신이 얼마나 체면을 중시하는지 난 알기 때문입니더. 어머니가 뭐라카신 줄 아십니꺼? 너거 아버지는 남한테 "기마이"(선심) 쓰는 거 빼면 쓰러진다 캤습니더. 더군나 배은망덕이라뇨? 그런 말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말이 아입니더.

3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부에 취직한 지 2년이 가깝도록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자취하는 생활이 내겐 -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고, 영광의 인물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보도를 접한 뒤 느끼는 착잡한 때를 빼고는 - 정신적으로 편했던 것이다. 물론 어머니에게는 출판사 전화번호를 알려드렸고, 어머니는 고달픈 중에서도 짬을 내어 밑반찬을 만들어 출판사나 자취방으로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코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만 꼭 한번, 아버지가 술기운을 빌려 말하던 "신청·함양"에 관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어머니는 난 그런 거 모른다는 한마디 말분이었고, 나도 더 이상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는 거창사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719명이나 학살당했다는 거창과 산청·함양은 모두가 지리산 동쪽자락을 타고 있는 마을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무슨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정국은 시위와 강제진압, 그에 따르는 대량구속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이 혼미상태를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미처 정리되지 않은 지식을 앞지르는 분노 때문에 떠밀리듯이 그 상황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바람에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서대문 국립호텔 장애인 전용감방 0순위 입주권을 받아쥐고 집들이 겸 입주식을 치루었다. 나는 그곳에서 장애인들도 소매치기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신기해 했다. 접견실에서 어머니는 내가 곧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절부절하며 눈물만 흘렸고, 나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곧 나가니까 앞으로 면회는 오지 마십사 했다. 석 달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 출판사를 찾아 갔다. 그때 느꼈던 감격이란! 사장은 내가 비워놓은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지 않고 내가 떠났을 때 그대로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부장 승진을 축하합니다. 편집부원 일동"이라는 글이 쓰인 16절지 복사용지가 놓여 있었다.
 "전화 받으세요. 부장님. 어머니시라는데요."
 점심시간을 막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어머니는 대뜸,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집에 큰 불이 나서 종이쪼가리 한 장도 건지지 못하고 다 타버렸다. 아버지는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놀란 나머지 이층에서 뛰어내리다가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 집만이 아니라 주변 집 네 채가 몽땅 다 타고 뼈대만 남았다. 불을 끄려고 미 8군 소방차까지 출동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앞뒤 두서가 없는 불이 난 원인을 말하지 않고 댓바람에 할 말만 쏟아부은 흥분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설명만으로는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전혀 실감을 하지 않게 했다. 오히려 무덤덤한 상태였으니까.
 전화를 끊은 지 세 시간이 넘도록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출판사를 나서서 택시를 잡았다. 빨리 병원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말이 머리 속을 휘도는 것과는 다르게 집으로 먼저 가봤다.
 불난 자리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변해있었다. 그나마 그것도 새까맣게 그을린 채, 마당은 소방차에서 뿌려댄 물에 집중호우를 맞은 것처럼 흥건했다.
 허물어져 건들거리는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종이쪼가리 하나 건지지 못했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감을 띠고 다가왔다. 아직도 마지막 숨결을 내쉬듯 가는 연기를 조금씩 뱉아내고 있는 장롱을 뒤적거려봤다. 새까맣게 타버린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끄집어냈다. 뜻밖에도 우리 사남매 백일사진만이 한쪽 귀퉁이조차도 그을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앨범에서 사진을 뽑아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흐흐흐 그래 웃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절망감과 웃음은 때로는 정비례할 때도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 말로는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 무허가 단추공장에서 신나통이 몇 개 잇따라 터지는 바람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불을 낸 당사자인 공원은 공장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서 죽었고, 집을 나와서 병원으로 가려고 택시를 잡아탔다. 오늘부턴 어디서 잠을 자지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아까하고는 다른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 이 지독한 이기주의!
 도떼기 아사리 시장판을 방불케 하는 대학병원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한 쪽 구석에 있는 공중전화기에 몰려서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막 옮겨졌다고 했다. 연기에 휩싸인 채 급작스럽게 이층에서 뛰어내린 탓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이틀 후, 검사결과는 비교적 양호하게 나왔다. 의사한테서는 오히려 환자의 영양상태가 극히 나쁘니 섭생을 잘해야 된다는 엉뚱한 말을 듣고 나흘 만에 병원 문을 나섰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식사를 거른 채 술로 살아왔을 테니 영양상태가 엉망이겠지.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약간은 넋이 달아난 사람 같았다.
 "너희들, 앞으로 어떡할래?"
 병원 부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내가 동생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기껏 이것뿐이었다. 막막했다. 어쨌든 당장 놓여 있는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남동생 둘은 내 자취방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막내 여동생은 급한 대로 당분간만이라도 이모댁에 얹혀 살 수 있도록 이모부 허락을 받았다.
 어머니는 지난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음날 나는 한 달치 월급을 가불해서 어머니 통장에 입금시켰다. 아낀다면 이모댁에 얹혀 사는 세 식구 생활비는 될 것이었다.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쨌든 사람에게는 몸을 누일 공간이 있어야만 되겠기에.
 한 달 뒤, 어머니와 내가 이곳저곳에서 벌린 삼백만 원에 내 자취방 보증금을 밴 돈을 합해서 청파동 숙명여대 부근에 네 평짜리 사글세 방 한 칸을 얻었다.
 그 한 달 동안, 살아 있는 사람 입에는 거미줄을 칠 수 없다는 말을 날마다 실감나게 느꼈다. 다른 것은 돌아볼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다. 도적같이 왔다가 주인처럼 행세하는, 자존심이라는 존재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 자존심은 어떤 때는 불어터진 라면 한 그릇보다 가치없는 것이면서도 때로는 사람 사이를 갈갈이 찢어 놓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는 그랬다.
 웬만큼 단칸방 생활에 익숙해졌을 즈음, 나는 아버지와 한방에서 같이 지낸다는 현실에 하루하루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또한 한동안은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더니, 한 달쯤 지나자 어머니를 들볶다시피 해서 내 행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것저것 따지고 나왔다.
 아버지가 가장 중점적으로 따지는 것은 내 월급 문제였다. 자고로 모든 금전관계 특히 월급은 받자마자 부모 앞에 먼저 내놓고, 선은 이렇고 후는 저래서 이만큼 탔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거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내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의 자존심을 모른 채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하루에 천원인 당신 용돈이 불만스럽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아예 모른 채로 일관했다. 그것은 자존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회사로부터 이미 두 달치나 가불을 해버린 탓에 점심조차도 회사부근 식당에서 외상밥을 먹고 있었다.
 그 두 달치 월급으로는 막내 여동생이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수업에 필요한 학용품을 마련해 주었고, 사글세방이지만 당장 끼니를 때워야 하는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어느덧 11월도 다 갈 즈음. 아버지는 상당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4학년인 동생은 취직시험에 합격했고, 2학년인 동생은 내년 학기에 휴학계를 내니 마니 고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동안 파출부 자리를 얻었다. 덕분인지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은 약간이나마 좋아진 듯했다. 다시금 염천교 출입을 시작했으니까.
 아버지는 그때부터 술이 거하게 취한 날이면 다시금 예의 그, 육군특무상사로 압록강 진격·중공군 총탄에 의한 부상·빨치산과 통비분자·학살당한 형님…, 산청·함양으로 얘기를 전개해 나갔다. 다만 그 대상이 막내 여동생으로 바뀐 것이 달랐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아버지와 얼굴 맞대는 시간을 줄이려고 새벽에 집을 나섰고 밤 늦게 들어오곤 했다. 알게 모르게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난 나는 출근하려다 말고 전날 받은 월급봉투를 어머니에게 건네 드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코트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순간적으로 낙심되는 감정과 동시에 욱 하는 분노가 치밀고 올라왔다. 벽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모로 누워 잇는 아버지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는 약간 몸을 뒤척이는 듯했다.
 "아버지! 가져가신 거 돌려주십시오!"
 나는 댓바람에 악을 쓰듯 소리를 질러버렸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잠을 자다말고 벌떡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낫다. 아버지는 끄응 신음같은 소리를 내며 마지못해 일어나는 시늉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나는 중학교 3학년 때와 고등하교 1학년 때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몇 달째 생활비라고는 누런 동전한 푼 받지 못한 탓에 먹을거리가 다 떨어진 적이 있었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45원짜리 국수 한 다발을 사왔다. 하지만 한 사람이 먹으면 딱 알맞을 양을 다섯 식구가 나눠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양은솥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석유곤로에 얹고 불을 붙였다. 물이 끊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찬장에서 한 주먹나마 남은 밀가루를 솥에 뿌려 넣었다. 그리고는 국수를 집어넣고 계속해서 저었다. 한참 뒤 국수가 푹 퍼질 때쯤 소금을 한 주먹 집어넣어 간을 맞추었다. 그것은 실로 "한국형 꿀꿀이죽"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는 국물밖에 없는 그 멀건 죽을 저녁밥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또 다시 몇 달째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가 새까맣게 변한 얼굴에 퀭한 눈으로 밤 늦게 안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듯싶더니 갑자기 언쟁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고, 뒤이어 방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날 어머니는 다음날 행상 나갈 밑천을 노름 판돈이 부족했던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빼앗겼던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문 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놈아! 아무 말 않고 있으니까, 내한테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아냐! 건방진 놈! 자고로 아무리 부모가 잘못해도 자식이 부모에게 큰소리는 칠 수 없다는 거 모르냐? 왜 새벽부터 고함을 지르고 지랄이야!"

정희수씨의 자전적 소설은 여기서 끝나고 있다. 소설 마무리의 간단한 메모에 의하면 소설은 주인공이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 기사를 확인하러 가서 아버지와 내가 권력투쟁의 희생자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결말을 내는 것으로 되어 잇다. <함께걸음>은 정희수씨가 생전에 발표했던 작품들과 미발표 작품들을 모아 유고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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