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빈민장애우 심의섭
본문
이 땅의 장애우들이 견뎌야 했던 차별의 삶과는 또 다르게 고난으로 점철된 한 세상을 살아와야 했던 장애우가 있다. 시계수리 기술자, 걸인, 수세미 장사, 또다시 걸인의 삶을 전전하다가 결국 야시장을 따라다니면서 호구를 연명하고 있는 심의 섭씨, 그의 삶은 빈민장애우의 한 모델이다.
한 부류의 장애우들이 있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름 석자 대신 꼬지, 앵벌이, 기바리라는 모멸스러운 명칭으로 그 존재가 규정되어야 했던 장애우들, 이들의 대표적인 예로 재작년과 작년에 걸쳐 목소리를 높였던 성인장애인자립회 소속 장애우들을 꼽을 수 있다. 알다시피 이들은 입학 거부, 취업 거부 등 이 땅의 장애우들이 견뎌야 했던 차별의 삶과는 또 다르게 고난으로 점철된 한세상을 살아와야 했다.
어느새 사오십대라는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지만 삶은 이들에게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냉혹한 벌판의 한가운데일 뿐이다.
그 헐벗은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우 심의섭씨가 살아온 삶이 바로 이같은 헐벗은 삶의 한 전형이다. 그는 지금 서울 문정동에 있는 한 개척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시름에 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일천구백사십육년 경기도 지도면 감내리, 지금은 시로 승격돼 고양시 행신동으로 불리는 행주산성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동네는 벌판 하나만 건너면 바로 행주산성이 있는 동네였다.
그는 손이 귀한 청송 심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세상에 나왔다. 그가 장애를 가지게 된 건 그의 나이 세 살 때인데 열병을 앓아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그가 열병을 앓을 당시 식구들은 아무래도 그가 죽을 것 같아 죽으면 산에 갖다 묻을려고 밤새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데 새벽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비록 그 후로 다리를 못쓰게 됐지만 식구들은 무척 기뻐했다.
그가 장애를 가지게 되자 할아버지 심전모 씨는 다음날부터 백방으로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한의원을 찾아갔고 아무개가 난치병에 효염이 있는 비방을 가지고 있다면 그를 찾아 새벽길을 떠나기도 했다. 나중에는 전해오는 소문에 개구리를 많이 삶아 먹으면 낫는다는 얘기를 듣고 개구리를 잡으러 벌판을 헤맸고 흑염소가 몸에 좋다고 해서 직접 흑염소를 잡아 그에게 먹이기도 했지만 그의 장애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나이 네살 때 육이오가 발발했다. 그와 중에서 아버지가 폭격을 맞아 돌아가셨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화병이 생겨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전적으로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는 여덟살이 되자 행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걸어다닐 수 없어 동네 친구들이 업고 다녀야 했다. 집에서 기어만 다니다가 학교 다니면서 지팡이 짚는 연습을 했지만 이킬로미터가 넘는 벌판 길을 걷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학년이 됐을 무렵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도 그 해 돌아 가셨다. 이제 집안의 어른은 할아버지 한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일꾼을 두고 묵묵히 농사를 지으며 그 세월을 견뎠다. 당시 그의 집은 행주벌판에 사천평 가량의 넓은 논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정미소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일찌감치 동네에서 알부자로 통했다. 덕분에 그는 부모 없는 아이들이 겪기 마련인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이 없는 공간을 동네의 외갓집 친척들이 대신 메꿔줘서 그는 별 어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외숙모 세분이 돌아가면서 밥과 빨래를 해줬고 이모와 서울 청량리에 살고 있던 고모가 자주 찾아 와서 그를 돌봐줬다.
그는 공부는 잘 하지 못했지만 머리는 좋다는 칭찬을 받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는 중학교 대신 동네에 있는 서당엘 다녀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능곡 쪽으로 나가야 했는 그 길이 오리가 넘어 그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다니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외에도 당시 팽배해 있던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할아버지가 "너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한학을 배우는 게 좋겠다"고 우겼기 때문에 영어 단어 대신 하루 대부분을 천자문을 외우는 데 보내야 했다.
이런 할아버지의 우격다짐 뒤에는 당시 시골 사람들의 장애우에대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배타적이었다. 장애우가 대통령이 된다든지 공무원이 된다든지 하다 못해 기능공이 된다든지 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은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비문을 써주고, 굿을 하면 제문을 쓰고, 혼일 할 때 격문을 써주는 서당 훈장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또한 그런 글을 아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던 시대의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학교 대신 서당에 보냈던 것이다.
그는 동네 이름을 따서 "매화정 서당"이라고 불린 동네 서당을 거쳐 근처 몇 군데 서당을 전전했다. 한 서당에서 배우다가 학문 수준이 높아지면 다른 서당으로 옮겨 새로운 훈장 밑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면서 네 스승을 거쳤다. 이렇게 구년이 지나자 그는 사서삼경 중에서 주역만 모르고 나머지 논어 맹자는 후배들한테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됐다.
그가 특별히 주역을 배우지 않은 것은 철학은 담겨 있지만 그보다는 사주 보는 것을 더 많이 연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솔직히 자신의 미래가 점쟁이로 고착될까봐 두려웠다.
어느정도 학문을 깨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공부하기가 지겨워 할아버지에게 "맨날 한문만 배워서 뭐합니까, 서당에 그만 다니겠다"고 애기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래도 배워야 한다. 너는 농사도 못짓는데 뭐할거냐, 아무 말 말고 공부만 해라"며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인 열아홉살 때까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죽어 라고 한문 공부만 해야 했다. 이때 지겨워하며 배운 한학이 나중에 그의 삶에 나침반 역할을 할 줄은 미처 모른 채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그는 한학을 배우며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체득했다. 주역을 보면은 무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니까 어떤 어려움이 와도 실망을 하지말고 원망을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맹자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정치를 펴야 하느냐?" 맹자가 대답했다. "노인에게 지게를 지게 하지 아니하고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 정치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열아홉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이제 혼자였다. 때마침 형도 해병대에 입대해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집에 혼자 덩그마니 남겨져야 했다. 그는 이웃에 사는 큰 외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지막 스승이 그를 불렀다. "너는 이만큼 배웠으니 더 안 배워도 된다. 오일육 군사혁명도 일어났고 해서 내가 예측하기로 앞으로는 기술을 배우는 게 유망하겠다. 세상이 바뀔 게 분명할 터인즉 너는 하루속히 기술을 습득할 궁리를 해라."
그는 뚜렷한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스승이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막연히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네 이웃이 불쑥 "다리를 고치러 가자"고 했다. 서울 정릉 골짜기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목사가 있는 안수를 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심심하기도 해서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 정릉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할아버지가 나를 고칠려고 별짓을 다했어도 낫지 않았는데 이런다고 고쳐질까?"의구심을 품었다.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인지 어쨌거나 그의 장애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돈을 받지 않으니까 그는 재미 삼아 한 달 가까이 정릉엘 다녔다.
그렇게 서울을 오가던 중 어느 날 그는 신문을 보게 되었다. 마침 신문에는 "시계 기술학원 원생 모집" 광고가 실려 있었다. 그는 서울에 살고 있던 고종사촌에게 입학자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그는 당시 종로 오가에 있던 "서울 시계 티비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청량리 고모집에서 신세를 지며 육개월여를 다니자 그는 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같이 배우던 형이 을지로에 시계 수리점을 차리면서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제의해 실습도 할 겸 경험도 얻을 겸 시계 수리점에 취직했다.
그런데 워낙 자본이 없이 시작한 수리점이라 아는 형이 시계 수리점은 얼마 안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별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형이 제대할 때까지 이년여를 집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는 동네 사람들 시계도 고쳐 주고 한문책을 뒤적거리고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읽으면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시기 정부에 의해 인위적인 농지 개혁이 있었다. 구백평을 일담보로 해서 구불구불한 논을 정리한다는 게 농지 개혁의 목적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을 이장은 그와 상의하지도 않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던 논의 대부분을 형 이름으로 등기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일정부분의 재산을 그에게 물려준다고 해 그는 그 말을 믿고 있었는데 졸지에 상속받을 재산이 하나도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형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형이 제대했다. 형은 재산 문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집에 돌아오자마자 군대에서 뭐가 그렇게 쌓인 게 많았는지 동네 사람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을 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고 치료비와 노름빛으로 땅이 날아가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생뜽없이 낙농사업을 한다고 땅을 팔기도 했다.
순식간에 이천여평의 논이 타인에게 넘어갔다. 그는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고 "내 걸 남겨놔야 하지 않나"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형이 방황을 거듭하자 외갓집 친척들이 나서 마음을 못잡아서 그렇다며 서둘러 형을 결혼시켰다. 형은 그 해 일산읍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형의 결혼식이 끝난 후 그는 용기를 내어 형에게 요구했다. "앞으로 땅을 팔려면 내 몫은 남겨놓고 팔아라." 형은 "안된다"고 거절했다. 그는 외갓집 친척들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외삼촌이 형을 불러놓고 말했다. "동생에게도 재산을 나눠줘야 할 게 아니냐, 왜 안 줄려고 그러는지 이유를 대봐라." 형이 대답했다. "병신 자식이 나가서 재산을 다 팔아먹고 다시 나한테 들어오면 그걸 죽입니까 살립니까."
그는 속만 끓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하고 나서도 형의 포악성은 멈추지 않았다. 형은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와 살림을 부셔댔고 형수에게 손찌검을 해댔다. 그는 그때마다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형수는 형에게 당한 분풀이를 그에게 했다. 형수는 이년동안은 그를 깍듯이 대해주더니만 이년이 지나자 못본 척 밥도 차려주지 않았다. 같은 형제니까 마찬가지로 싫다는 것이었다.
그는 별 수 없이 집을 나와야 했다. 딱히 갈데가 없었던 그는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서울 청계천 시계 골목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년 가까이 장사를 하면서 경험을 익혔는데 중개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땅 주인이 건물을 짓는다고 나가 달라고 해 결국 손을 털고 그만둬야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그에게 형은 장사 밑천을 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말뿐이었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형은 돈을 주지 않았다. 무척 속이 상해서 이때부터 그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당시 화전읍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같이 지내면서 시계 수리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제의해 와 그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하는 생각이 들어 화전읍에서 다시 시계 수리점을 시작했다. 시계 수리점은 예상외로 장사가 잘됐다. 간혼 가다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워낙 진지하게 일을 해서 많은 단골 손님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삼년여를 지내면서 비록 떼이기는 했지만 계도 들고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술도 마시면서 지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형에게 뚜렷한 원망의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그런데 그의 감정을 자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형이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나머지 땅을 팔아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택해 형을 찾아갔다. "집을 주던지 돈을 얼마 주던지 해야지 다 팔아 가지고 가면 나는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형이 말했다. "천호동 집을 사느라고 논과 집을 다 팔아야 했다. 걱정마라. 지금은 남는 돈이 없으니까 주지 못하지만 천호동 집을 팔면 다만 얼마라도 줄테니." 그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셋방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후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형이 천호동 집을 팔고 시흥으로 이사갔다"고 일러 주었다. 그는 배신감을 맛보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나서 그는 물어 물어 시흥 형집을 찾아갔다.
그가 나타나자 형은 화들짝 놀랐다. "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어서 내 몫을 내놓으세요." "사실은 천호동 집을 팔 때 너 좀 줄려고 그랬는데 그거 판 돈 갖고 이 집 살 거밖에 안됐다. 조금만 참고 있거라. 내 이 집 팔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네 장사 밑천을 대줄 테니." 형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그는 반신반의했지만 형 말을 믿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형의 배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은 다시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훌쩍 인천 백마장으로 이사를 갔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형을 찾아갔다. "도대체 내 몫을 줄 겁니까, 안 줄 겁니까. 확실히 하세요."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직업이 없다. 그래서 시흥집을 팔고 남은 돈은 생활비로 다 들어갔다. 이젠 이 집을 팔아야 돈이 좀 있을 텐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생전 처음 형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차마 그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는 허탈감을 가득 안고 화전읍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동안 그는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는 게 자신이 없고 앞날이 캄캄했다. 그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눈만 뜨면 술을 마셨는데 친구와 소주 다섯병을 나눠먹고 산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기도 했고 외상술을 하도 많이 마셔 대포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렇듯 술에 취한 나날을 보내자 어느새 수전증까지 생겼다. 그는 손이 떨려서 핀셋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시계 수리점을 작파했다. 친구에게 "집어치우겠다"고 통보하고 어느 날 술을 왕창 마시고 할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산소에서 "할아버지는 손자 자식을 편하게 살라고 재산을 물려 주셨는데 지키지를 못하고 더 날렸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하냐"고 한바탕 통곡을 한 후 그는 동네 앞 감내역에서 열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한살 이었다.
그는 모래내 가좌역에 내렸다. 계획이 전무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서 어떤 생활을 해야 되나 어디로 가지, 그는 고민했다. 그순간 눈앞에서 무릎 아래 다리가 없는 한 사내가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는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야 뭐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나" 위안을 얻었다. 그때 위안 끝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 그는 구걸을 마치고 저만치 걸어가는 사내를 쫓아갔다. "어이 형씨 애기좀 합시다." 사내가 돌아섰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슈?" "사실은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오갈 데도 없고 해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며 서 있는 참이었는데 형씨를 보니까 형씨는 나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졌는데 비록 동냥을 할망정 열심히 사는 걸 보면서 어떻게 같이 사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말은 곧 같이 구걸을 다니고 싶다는 언질이었다. 사내는 순순히 "그럽시다." 대답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잘 안 될거요." 사내가 덧붙였다.
그는 사내를 따라 나섰다. 사내가 그를 데려간 곳은 동대문 창신동 부근의 민가였다. 그곳까지 가면서 사내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얘기했다. 사내의 말인즉슨 군대에서 다리를 다쳤는데 처음에는 좌절감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정리를 하고 나니까 장애를 가졌어도 돈만 있으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지금 상이용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돈이 좀 나오지만 더 많이 돈을 벌려고 이렇게 신분을 감추고 구걸을 다니다. 사내는 말끝에 "벌어서 나는 꼭 저금을 한다"고 자랑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날 이후 창신동에 거처를 정하고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거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가 처음한 일은 주민등록증을 난로불에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형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래서 혹 구걸을 다니다가 길거리에서 죽기라도 해서 형 한테 소식이 가면 형이 통쾌하게 생각할 것 같아 일부러 소식을 끊어 형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라고,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주민등록증을 없애 버렸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동대문 이스턴 호텔 뒤편 골목에는 창녀촌이 있었고 그 부근에는 말뿐인 무허가 하숙집들이 밀접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지 소굴은 주로 허름한 집 지하실에 있었는데 하루 오십원 내지 백원만 주면 그곳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때 거지 소굴에는 구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외에도 지게꾼들과 교도소에서 막나와 오갈 데가 없는 사람, 그리고 도망다니는 범죄자들도 우글대고 있었다. 이렇듯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만 모이다보니 집 주인들은 장애우는 될 수 있으면 받지 않으려 했다. 동냥 다니다가 영양실조 걸려 죽는 사람의 태반이 바로 장애우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행이 인상이 좋아 집주인이 거부를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데려다준 사내의 소개로 십년 연상이 또다른 걸인 사내 한 명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열흘을 목발을 집은 그 사내를 다라 다녔다. 처음엔 그냥 말없이 사내의 뒤에 서있기만 했다. 사내는 구걸해서 얻은 돈으로 그에게 밥도 사주고 술도 사줬다. 그래서 그는 포식을 했다. 열흘이 지나자 사내가 말했다. "자네 참 착하구먼, 어때 이만하면 혼자 다닐 수 있겠지?" 그는 자신감이 생겨 대답했다. "더이상 신세를 지지않고 혼자 다니겠습니다."
구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대개 도는 코스가 정해져 있어서 사람들이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문을 밀고 들어서면 아무 말 없이 동전을 던져 주었다. 혹가다 "또 왔냐"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각설이 타령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싫어했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 요령이 생기자 그는 인사로 한푼줍쇼로 대신하기도 했다. 문을 두드려서 사람이 나오면 그는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했다. 상대방이 "어쩐 일이냐" 고 물어 오면 그제서야 "동냥 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머리를 쓰기도 했는데 여름날 만약 수박이 먹고 싶으면 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내버린 수박껍질을 주워 먹었다. 그냥 달라면 가게 주인이 순순히 내줄리 만무였기 때문이다. 그가 걸신들린 사람처럼 수박 껍질을 씹고 있으면 가게 주인은 "쯧쯧 얼마나 수박이 먹고 싶으면 껍질을 먹겠어. 이봐요 그거 먹지말고 와서 이거 가져가요." 그러기 일쑤였다.
그렇게 구걸을 해서 그는 수입이 많은 날은 하루 오천원 가량을 벌었다. 그돈으로 밥을 사먹고 하숙비를 내고 나머지는 술을 먹었다 술이야 술집에 가면 한잔씩 얻어 마실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돈을 내고 사먹는 술맛이 제맛이었다. 그렇게 써도 돈이 남으면 그는 겨울을 생각해서 조금 저축을 했다.
구걸은 겨울에는 추워서 제대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날은 하숙방에서 동료 걸인들과 화투를 치고 잡담을 나누며 지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구걸을 나가야 할 때가 있는데 그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의 밥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지하 하숙방에는 일이 없어 하루종일 쫄쫄 굶는 막일꾼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성했기 때문에 구걸을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그릇을 들게 하고 밥동냥을 나갔다. 몇집을 돌면 서너그릇은 족히 얻을 수 있었다. 반찬도 얻고 정육점에 가서 비계, 콩팥, 돼지불알도 얻어주면 그들은 날로불에 구워먹으며 좋아했다.
구걸 다니는 걸인들 중에는 장애우들이 많았다 집이 있는 장애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도 절도 없어서 떠도는 장애우들이었다. 그는 사고로 한쪽 팔과 한쪽 눈을 잃은 한 장애우와 무척 친하게 지냈다. 툭하면 싸움질을 하고 동냥을 주지 않는다고 땡강을 부리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장애우들은 자학을 심하게 했다. 온몸이 유리로 긁은 상처 투성이었다.
그는 일년여가 지나자 걸인 세계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 의리 있고 족집게처럼 단속 정보를 알아내 동료들에게 알려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구걸을 하면서도 신문 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빨리 단속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단속에 걸리면 무조건 갱생원행이었다. 그리고 한번 갱생원에 잡혀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그는 신문을 보면서 언제 일제 단속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냈고 일단 감이 잡히면 동료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그가 거는 비상은 곧 시골로 튀자는 신호였다.
시골에는 단속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단속이 시작되면 그는 주로 장터를 쫓아 전국을 유랑했다. 오늘은 철원장, 내일은 포천장, 그 다음날은 안성장‥‥‥ 이런 식으로 전라도와 제주도만 빼놓고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장터를 선호한 것은 물어볼 필요 없이 인심이 좋기 때문이다. 지역이 좁아 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대신 정감 어린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 그는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여관잠을 자기도 했는데 여름엔 바깥 공터에서 거적을 깔아놓고 잤지만 겨울에는 추워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파출소를 찾아갔다. "잠 좀 자자"고 얘기하면 파출소에서는 면사무소를 찾아가라고 위치를 가르쳐 줬다. 물어물어 면사무소에 가서 "파출소에서 보내서 왔다"고 말하면 숙직하는 공무원이 메모를 써주며 아무개 여관으로 가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여관에가서 메모를 내밀면 여관 주인은 "에이 개새끼들 우리 집으로만 매일 보내고 그래." 투덜거리면서도 내쫓지는 않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날 따라 돌아다니다 보니 밤중이 됐는데 파출소도 보이지 않고 마땅히 잘 만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근처에 술을 파는 데가 있어서 술을 한잔 사먹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잘 곳이 없어서 그럽니까?" 그는 얼른 "네 그렇습니다." 대답했다. "나를 따라 오십시오." 그는 스님을 따라 산을 한참 올라가 한 암자에서 밤을 지내게 됐다.
마침 암자 안에는 붓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옛날 생각이 나 "스님, 글 몇 자 적어도 되겠습니까?" 물었다. 스님은 "그러시죠." 쾌히 응낙했다. 그는 붓을 들어 짧은 시를 적었다.
地葉落風 深夜寂寂 哉山鳥 (나뭇잎은 바람에 떨어지고 밤은 깊어 고요하고 고요한데 산새만 우는도다)
그 개인의 삶을 나뭇가지에 비유해서 세상 세파에 시달려서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었는데 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산새가 이나무 저나무를 옮겨 다니며 울 듯이 내 인생도 이집 저집 문전을 다니면서 떠도니 생각하니 눈물뿐이다. 이런 뜻이었다.
스님이 그 시를 보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한학을 많이 했군. 그러면 자네 혹시 거지새끼라는 뜻이 뭔지 아는가?" 그는 "잘모르겠는데요." 대답했다. "거지 새끼라는 뜻이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닐세." 스님이 붓을 들었다. 居地塞基, 즉 "우리에게 주어진 땅에 살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거 참 멋있는 뜻인데요." 그는 웃었다.
그는 이밖에도 갖가지 일화를 남기며 삼년여에 걸쳐 걸인 생활을 계속했다. (계속)
글/이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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