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장애우 시인 백원옥 서른살의 비망록 > 함께 사는 세상


[기획] 장애우 시인 백원옥 서른살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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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다가 눈물이 날 때는 왜 이렇게 외로운지요.
처절하게 한편의 시를 쓰다보면
너무나 아픈 영혼에 마침내는 눈물을 흘리고 말지요.
여기서 지나쳐서는 안될 분이 있어요.
저와 장애
이것은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 중에 하나이지요.
장애인을 올바르게 볼 줄 아는 시각을 우리 함께 가졌으면 소원해요.
너무나 비뚤어진 시각, 거의 무지에 가까운 장애에 대한 지식.
부정적인 것만을 바라보는 편견, 그것을 옳다. 주장하는 아집, 벽이지요.
장애인에게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아주 높다란 벽이지요.
그래서 장애인은 항상 피해의식에 젖어 있어요.
그래서 장애인은 늘 아파하는 삶 속에서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지요.
장애인을 생각하세요.
장애인과 함께 하세요.
그리고 장애인을 사랑하세요.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요 사람이요 우리들 자신인 것을 잊지 마세요.
시와 장애
이 모두가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랍니다.
              -시집 「홀로 한 사람은 간절히 별의 세계를 보듬었다」의
              저자서문 (사랑의 자리에서 우리 만날 때) 중에서-

 <열병으로 시작한 뜨거운 출생 그리고…>
  1962년 1월 20일 백원욱은 종로구 옥인동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일주일만에 그를 덮친 열병은 그의 팔과 다리를 비틀어 놓았으며 이 때문에 그는 9살이 넘도록 방 바깥의 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된 채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백원욱씨는 뒷날 당시 상황에 대해 "몸은 균형이 잡히지 않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서지도 못했다. 몸이 흐늘거리고 모든 지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항상 누워서 지내는 절망적인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깥 세계와 차단된 채 끝없는 절망 속을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혼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스스로 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그가 만난 것은 교회와 하나님이었다.
  어머니와 누나의 등에 업혀 교회라는 바깥세상을 접하게 된 소년 백원욱은 8살이 되던 70년 봄 그의 표현대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셔서 단숨에" 한글을 깨우치고는 글씨로 죄여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었다. -
  그러나 그의 몸은 더 이상 어머니나 누나들이 업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으며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는데 대신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아들의 상태가 호전되기만을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봐야 히는 것이 그에게는 또 다른 슬픔이었다.

<목발을 잡고 새롭게…>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어 실의에 빠져있던 백원욱은 75년 봄 "문득 다락 속에 처박아 두었던 목발이 생각나" 스스로 걸어서 교회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일어나 한쪽 손으로 벽을 짚고 집 밖으로 내려가 목발을 잡았다. 꽃샘 추위가 한창이고 나의 그림자는 길기만 했다. 나는 목발을 잡고 걸어보았다. 발을 떼는 순간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마에 피가 맺히고 팔에 상처가 났다. 한쪽 손으로 상처를 대강 닦고 다시 일어나 목발을 잡고 다시 걸어 보았다. 그러나  시 넘어지고, 나는 또 다시 상처 속에_서 일어나 걸어갔다."
  두시간여의 사투 끝에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와 세상을 향해 걸어 갈 수 있었던 그는 뒷날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목발을 짚고 걸어가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어 발로
글을 쓰고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이, 뇌성마비 아이야

시 -「뇌성마비아이에게」- 부분

목발을 짚으며 기쁨에 찬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백원욱은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며 뒤늦게 맛본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갈증을 채워 나갔다.
  그러나 다니면 다닐수록 뇌성마비 장애우인 자신의 존재는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애가 심하고 배우지 못하고 직업을 갖지 못한 나의 상황들은 나의 모든 인생을 절망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은 나를 평가절하고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했다"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토로했다.
  사람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느낀 백원욱은 재활원을 찾아가 무엇이든지 배우겠노라고 사정을 했지만 찾아가는 곳마다 번번이 그의 심한 장애를 이유로 거절할 뿐이었다.

<"죽음" 그리고 "되살아 남">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회적 사형선고를 받은 방황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음"이라는 외길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갔다.
  78년 성탄절 전야 축복과 사랑으로 흥청이던 거리를 방황하던 백원욱은 자신도 모르게 불이 환히 켜진 어떤 교회로 들어가서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들을 피해 3층 종탑으로 올라갔다.
  "절망 속에서 가슴 깊이 저며오는 슬픔으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과 땀방울이 뒤범벅되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한 이날의 기도 중에 "모든 장애자의 모습에서, 모든 고통받는 자의 모습에서 나를 버리지 말아라"라는 응답을 들었으며 이때부터 그의 삶은 기나긴 어둠의 그늘에서 벗어나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 백원욱은 다음해 2월부터 국민학교 과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혼자 공부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었다. 그러나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책과 씨름을 했던 그 해 8월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생애 최초의 기쁨을 맛보았다.
  82년 초 아버지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으며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을 빌려보면서까지 공부를 계속할 정도로 집념을 불태운 덕분에 마침내 그 해 4월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철인처럼/홀로 아득히 서서/우러러 하나의 별빛을 향하여(「홀로 한 사람 중」)라는 자신의 싯귀절처럼 학업에 열중했던 백원욱은 84년 8월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에도 합격함으로써 기쁨의 절정에 올라섰다.
 
<너무도 짧은 기쁨 그리고 허무한 끝>
  그러나 마지막 관문은 완강하고도 높았다.
  84년 2월부터 90년 1월에 이르기까지 무려 6년 동안 이 땅의 대학들은 백원욱을"뇌성마비 장애인이 배울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거부해 왔으며 이때마다 그는 좌절과 방황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
  "나에게 있어 공부를 포기하는 것은 곧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입학거부를 당할 때마다 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죽음이라는 엄청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었다. 굴 속에서 극약을 먹고 신음하던 일, 한강다리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지나가던 행인에게 제지당하던 일 등 입학거부 때마다 죽음행각을 계속했다"던 백원욱은 마침내 90년 3월 강남대 신학과에 입학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의 닻을 내렸다.
  그러나 백원욱의 삶은 너무 짧았으며 그 끝은 너무도 허무했다.
  3월21일 오후 3시경 학교 연못가 사자상에서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그는 한시간이 지나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운동장 옆 비탈길을 내려오다 운동장 화단 벽에 부딪히면서 10미터 아래 운동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모든 게 끝이었다.
  3월23일 아침 동수원병원을 떠난 그의 시신은 성남 화장터에서 한줌 재로 변해 자신을 영원히 추방해 버린 이 척박한 땅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거름으로 바쳤다.

<백원욱의 죽음은 구조적인 살인(? )>
  신학과 시작에 몰두하면서 이제 막 자신의 꿈과 재능을 키워나가던 신학도이며 장애우를 사랑했던 시인인 그의 최후는 이 땅 4백만 장애우들이 삶의 모든 자리에서 마주 대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살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데 더욱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이다.
  84년 9월19일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 서울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강동구 마천2동 지하 셋방에서 음독 자살한 김순석씨(당시 34세)의 경우나 87년 2월19일 영등포구 당산동 전철 2호선 당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뒷 승객들에 떠밀려 전동차에 치어 죽은 숭실대생 이춘광군(달시 27세·숭실대 경제학과 4년) 그리고 백원욱의 허무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장애 우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부분에서"생명을 걸어야"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백원욱의 사망소식을 접한 전국장애인한가족협의회(총회장 황광식), 장애인인권사업단(단장 최민) 둥 20여 개 단체는 24일 대책 회의를 열고 "그의 죽음은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온갖 차별과 냉대, 인권박탈의 실태를 드러내 주고 있으며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과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사회적 배려의 부재가 결국 그의 죽음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우연한 사고나 개인적인 부주의의 결과로 넘길 수 없으며 보다 포괄적인 진상규명과 대비책을 모색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백원욱 사망사건 진상규명 범 장애인단체 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위원장 황광식)를 꾸리고 30일 서울역에서 추모행사를 겸한 대국민 홍보전을 비롯해 추모제와 모금운동 둥 행사를 통해 장애인 인권침해의 실태를 명확히 밝히고 다시는 이처럼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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