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이 사람들] "앉으나 서나 광범이 생각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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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광병 이는요, 그러니까 몇 년 도인가 하면 83년도 2월 7일에 태어났어요. 낳고 사흘만에 애기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 제따라는 곳에 돈 벌러 갔거든요. 애들 잘 키우고 있으라고 말하고 갔는데 서운하기도 하구 그렇대요. 하여간 하루가 열흘 같았어요. 그래도 편지는 자주 왔어요. "보고 싶다" "애들은 잘 크느냐"하는 내용으로요.
애기아빠는 없지, 친정어머니도 산간호 해주려고 오셨다가 몸이 아파서 15일 만에 가셨지, 허전해서 막 울었어요. 눈물이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첫애 춘병이도 그랬지만 광병이 낳았을 때는 아주 잘 생겼다고 주변에서 난리들이었어요. 그러고 아주 똘똘하게 생겼다고도 그랬고요. 근데 광병이 이 자식이 젖을 먹으면 그냥 토하더라고요. 자꾸 토하고 토하고 해서 처음에는 너무 많이 먹여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냥 지나갔어요. 11개월이 막 지났을 때 시집에 추석을 쇠러 갔어요. 충남 흥성시골인데 마침 한창 벼 베는 철이라 할 일이 무지 많았어요. 그러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시골 와서 지내라고 하면 말도 잘 들었어요. 그전에도 오라면 아무 말 없이 가서 며칠동안 일하다 오곤 했어요.
그때도 아마 벼 베러 나가려고 아침을 서둘러서 먹고 있었던가 봐요. 그런데 광병이가 막 인상을 찌그리고 누워 있더라고요. 저는 "경기"라는 것이 어떤 건지 몰러요. 정말 몰랐어요. 근데 어른들이 "경기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홍성 근처에 대천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집안 어른이 하는 한의원이 있다고 가자고 그러시더라고요. 아이를 들쳐업고 갔더니 괜찮대요 의사는.
하지만 저는 괜찮지만은 않았죠. 아이 아빠 생각이 났어요. 아이들 잘 키우고 있어라 했는데 일이 터진 거잖아요.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몰라요. 이틀인가 치료를 받고 시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는 암사동에 살고 있었는데 제일 가까운 병원이 한양대학병원이었어요. 병원도 크고요. 거기 가서 피검사도 하고 뇌신경 검사도 하고 그랬어요. 의료보험도 안 돼서 비쌌어요. 그래도 계속 다녔지요. 경기를 하면 인상을 찌그리면서 막 쓰러져요. 그게 경긴가 봐요. 지금까지 낫지도 않고 그러네요. 그래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지‥‥‥
1년 있다가 아이 아빠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왔어요. 큰 걱정이더라고요. 어쨌든 시골에 있을 때 그런 거니까 시어머니가 설명을 잘 해주더라고요. "얘가 잘못 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애가 그러려니까 그렇지"라면 서요. 시어머니는 시골에서 경기하는 것을 봐서 그런지 별 말 안 하세요. 뭐 시골에 있다고 그랬겠어요? 지가 그러려니 그런 거겠죠. 다른 일반 아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발달이 늦은 채로 세월이 흘렀어요. 벌써 10년, 장병이가 열 살이에요.
일곱 살이 되었는데 학교 보내라고 통지서가 나왔어요. 그때까지 조기교육이 뭔지 특수교육이 뭔지 하나도 몰랐어요. 그냥 집에만 데리고 있었던 거예요. 광병인 항상 내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였어요. 내가 잠시 어디 나가더라도 같이 따라갔고, 죽 집에만 있었던 아이 에요. 하도 업어 달라 그래서 어디 가지도 못했어요.
친정어머니가 "너는 허리 아파서 이제 허리도 못 쓴다"고 그럴 정도였어요. 주위 사람들도 그랬고요. 일곱 살 때까지만 해도 땡강 (고집부리고 떼쓰는 것)을 얼마나 많이 부렸는지 몰라요.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대문도 제 맘대로 막 열고 닫고, 여름에는 더위를 못 참어서인지 더 꽉꽉 문을 밀치고 난리였어요. 그러다 성질 나면 한 쪽에 가서 가만히 숨어 있곤 했어요.
일곱 살이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 자꾸 "조기교육인가 뭔가 그런 거 시켜야지 집에 그냥 데꼬(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지 성질만 낼 줄 알았지 운동화 하나 제대로 못 신고 옷 하나도 제대로 입을 줄 모르던 아이였어요.
사실 아이 때문에 내 성질도 다 버린 거여요. 그래도 처녀 적에는 순진하고 얌전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시집 와 갖고는 할 소리 안 할 소리 막 하고, 욕 같은 것도 진짜 많이 해요. 광병이 때문에 속 끓고 애 태우면서 성질을 다 베렸나봐요. 때로는 누가 뭐라 그라면 금방 욱하고, 참으려고 참으면 병이 나 버리고‥‥‥
취학통지서를 들고 동사무소에 갖고 갔어요. "얘는 뭐든지 느리고 못 하기 때문에 일반학교에 못 보내고 특수학교에 보내야 된다."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그러대요. 그러고 말았거든요. 학교에도 못 가고 그냥 1년이 지났어요. 여덟 살 되니까 또 통지서가 나왔어요. 통장 님이 우리 집에 갖고 오셨어요. 다시 동사무소에를 갔지요. "얘는 특수학교 다녀야 된다."고 했더니 도장을 갖고 오라고 하더군요. 일반학교에 아주 못 다닌다는 확인을 하는 건가 봐요. 애기아빠 도장을 찍더라고요. 학교를 안 가면 어떡해요? 어디든지 보내야 되잖아요. 주위 사람들은 조기교육도 안 시키고 그냥 집에 데리고만 있다고 그러죠. 누가 봉천 10동에 장병이 같은 장애아들이 다니는 조기 교육실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가봤더니 일곱 살까지만 받는다고 하면서 학교를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뭘 알아야지요. 아무 것도 모르니 간요.
친정어머니가 오시더니 어떤 수녀님 얘기를 해주었어요. 수원이래나 천안이래나, 거기서 말 못 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치는 분이래요. 마침 어머니가 사시는 동네에 오게 돼서 우리 광병이 얘기를 했나봐요. 그랬더니 수녀님께서 집에만 있으면 어떡하냐구 교육을 시켜야지, 부모가 잘못한 거라고 그러셨대요.
엄마의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뭔가 잘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학교 보내라는 통지서도 나왔지, 집에 두면 이웃 사람들 보기에도 뭐 하잖아요.
이 자식이 어릴 때는 얼마나 울어댔는지 이웃집들에서 애가 왜 우느냐고 말도 많았어요. 하도 우니까 여름 같은 뻔 집안에 들어와 쳐다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으니까 나보러 "여기 애기 엄마냐"고 묻기도 하고 그랬어요. 남의 집 앞을 지나가면 초인종도 막 누르고, 대문을 막 두들기고, 진짜지 밖에도 잘 못 다녔어요. 그래서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광병이가 어떻다는 것을요. 이웃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많이 알죠. 그래서 좋은 소리도 듣고, 나쁜 소리도 듣고.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떳떳하게 나다니고 그래야 되는데‥‥‥
경기를 하고 나니까 애가 뭐든지 느려 보이더라고요. 그 또래에서요. 한 1년쯤 지나서 앉고 서고 할 땐 괜찮았어요. 근데 저는 것, 쓰는 것, 말귀 알아듣는 것은 또래 아이들처럼 나이가 되면 할 수 있어야 되는데 못하잖아요. 그게 경기를 해서 그런가 봐요. 키만 크고 살만 쪘지, 머리는 안 좋아지더라고요. 물론 요령도 없고요. 아유, 사는 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진짜로. 힘만 들어요. 내가 시집와서 광병이 같은 애 낳아 갖고 이렇게 고생을 하나, 고생보다도 나한테 주는 그런 뭐도 있겠죠. 정신지체아를 둔 엄마들끼리 모이면 애들 걱정 많이 해요. 그래도 광병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그래도 그런 말이 위로가 되진 않아요.
특수학교를 보내야 되니까 여기 저기 학교를 알아봐야 되잖아요. 봉천 10동에 있는 조기교육실에 가서 그곳 선생님을 통해 특수학교 전화번호를 알아냈어요. 왜 이름 있는 사립학교에 데리고 갔더니 애보고 뭘 시키기도 하고 맞춰보라고 하더라고요. 머리가 어느 정돈지 알려고 그랬나 봐요. 이 자식이 엄마하고만 있어서 그런지 거기에서도 내가 보이지 않으면 막 울면서 바깥으로 나오잖아요.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떨어졌다고 하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많이 찾아오는 아이들 중 상태가 좋은 아이들만 뽑는 거예요. 또 다른 학교에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개학하고 나서 빈자리가 있어야 받아줄 수 있다고 하대요. 그러면서 기다려 보라고.
성북동에 있는 명수학교도 처음에 전화를 했더니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리래요. 그래도 자꾸 자꾸 전화했더니 상담하러 오래요. 그날 가서 상담을 하고 그 다음날부터 광병 이는 학교를 가게 된 거예요.
그때 다른 엄마들 통해서 들은 얘기지만 특수학교에 들어가려면 어떤 학교든지 돈을 내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좋다고만 생각했어요. 첫날 광병일 데리고 학교엘 가보니 깐 광병이 보다 못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똥 싸는 애도 있고요. 어떤 학교는 똥오줌 못 가리면 받아주지도 않어요. 그런데 명수학교 는 그런 애들도 많이 다니더라고요. 엄마 곁을 한시도 떠나있지 않은 광병 이를 잡고 학교를 갔어요. 이발소에 끌고 가다시피 해서 머리를 깎이고, 깔끔하게 차려 입혀서 데리고 갔죠.
여덟 살이라니까 신입생들이 있는 아래층 교 실로 보내대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이 자식 이 교실이 떠나가도록 울고불고 하는데 난리 가 났어요. 들여보내면 나오고 또 나오고. 처 음 닷새는 내가 학교에 꼬박 붙어 있었어요. 지금도 선생님이 그때 일을 얘기해요. 참 신기했어요. 엄마 품을 떠나 학교라는 것을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더라고요. 닷새 동안 학교에 붙어 있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이제 그만 오라고 하더라고요. 아침 7시 반에 학교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고 오후 3시경에 다시 버스서는 곳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와요. 사당동 지하철역 있는 데니까 여기 봉천동에서 멀지는 않아요. 아이를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된 거예요.
한번은 학교에서 놀다가 버스를 놓쳐서 선생님이 승용차에 태워서 데려다 준 적도 있어요. 그러고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엄마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면서 "엄마, 엄마"그러며 막 울더래요. 지금은 많이 의젓해졌대요 선생님이. 이제 밥그릇도 엎지 않고, 신발도 제대로 신고 옷도 지가 잘 입어요.
학교에 3년째 다니고 있는데 말하는 건 그냥그냥 해요. 글씨도 모르고. 학년이 올라가고 공부 잘 하고 못하고가 특수학교에선 좀 우습죠. 그래도 아주 못 하는 애는 학년을 못 올라가고 그래요. 쓰는 것, 보는 것, 읽는 것을 못 하니까 그것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요. 경기를 해서 그런지 손에 힘이 없어요. 그냥 혼자서 중얼중얼, 말로만 떠들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말도 있고 없는 말도 있고 그래요. 말은 열심히 해요. 시키는 대로 조금씩 알아듣기도 하구요.
광병인 잃어버리기도 많이 했어요. 파출소에서 찾아오기도 했고, 아동일시보호소에서 데려온 적도 있었어요. 관악구청까지 간 적도 있었고요. 가출신고 전화번호가 182인데 여기에도 숱하게 신고를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길 따라 쭉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길을 잃는 거죠. 아이를 쓸었을 때처럼 속상한 적이 없어요. 차라리 영 못 찾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찾으면 눈물부터 흘렸어요. 아이가 없어지면 애기아빠는 돈 벌러도 못 나가고 그랬어요. 애한테 일일이 신경은 못 깼지만 애가 없어졌을 때는 난리가 나요. 다섯 살 때까지는 그러더니 학교 다닌 이후부터는 괜찮아요. 그래도 이자식이 없을 때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철컥 내려앉아요.
지금도 나가서 놀고 온다고 했는데 불안해요. 교통사고 위험도 있고, 또 길을 잃어버릴까봐서요. 말이 그렇지, 사람 찾아다니는 일이, 특히 애를 찾아다니는 일이 보통 피를 말리는 일이 아니에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정말.
봉천동에 이사 온 지는 9년쯤 됐나봐요. 비록 작고 볼품 없는 집이지만 이 집에 계속 살았어요. 그래도 남의집사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요. 광병 이한테 신경 쓰고 살아야 하니까 남의집살이는 못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일단 지장을 주니까요.
우리 집에도 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 때가 있었거든요. 지만한 애들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고 싸워요. 특히 같은 또래는 더했어요. 자기애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데 아무리 세사는 사람이라도 좋다고 하겠어요? 다른 애가 먹으면 가서 다 뺏어 먹고 막 그랬어요. "광병아 네가 형이고 오빠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수없이 말하고 달래도 소용없어요.
그래도 밖에 나가서 놀 때는 훼방은 안 해요. 다른 애들이 공놀이하고 놀면 그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막 웃고 손뼉치고 그래요. 구멍가게 앞을 지나다가 먹고 싶으면 그냥 막 집어 와서 어떤 때는 가게 주인에게 붙잡힌 적도 있었어요. 요즘은 돈주고 가서 두부 사오라고 하면 사오고 그래요. 거스름돈을 받을 줄 모르니까 돈을 획 던지고 온대요. 그래도 자꾸 시켜요 요즘은. 말귀 알아듣는 것도, 돈 쓰는 것도 모두요.
때려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속을 색일 때는 내 속이 정말 다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요. 지한테 매달려 시간이 하나도 없는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지 애기아빠 이야기요? 지는 결혼을 스물 다섯 살에 했어요. 지는 집안이 천주교 신자예요. 애기아빠는 불교 집안이고요. 처음에 시집에서 뱀띠하고 잔나비 띠는 안 좋대요. 성당에 다닌 저는 그런 거 따지지 않았는데 그쪽 집에선 따지더라고요. 그래도 애기 아빠가 절 좋다고 쫓아다니더라고요. 사촌 동생이 중매를 했는데 만나다 보니 둘이 비슷해요. 공부 제대로 못 배우고 키도 좀 적고요.
시골에서 자랐을 때 사람들이 지보고 머슴이라 그랬어요. 오빠와 동생 사이 중간에 끼어서 공부도 못했어요. 돈도 없고 해서 시골에서 일만 한 거여요 머슴 마냥. 나무도 하러 다니고 소도 키우고 그랬어요. 거기서 돈 나오는 걸로 오빠 공부도 시키고요. 동네 다른 처녀들은 화장도 하고 눌러도 많이 다녔는데 나는 그런 것 몰랐어요. "멋"이래는 것도 모르고 일밖에 몰랐던 거여요. 친정어머니는 맨날 나보고 "너는 시골에서 고생만 진탕 했으니 서울로 시집보낼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광병이 아빠 만나갖고 자식들 낳고 사는 거잖아요. 첫아들 춘병이 낳고 3년 있다가 스물 여덟 살에 둘째 광병 이를 낳은 거예요. 광병 이에게 매달려 사느라 사실은 정신 없이 살았지요.
광병이 아빠는 공사 현장에 나가 건축일 해요. 미장이요. 일이 맨날 있는 것이 아니니깐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은 놀아요 집에서. 그래도 소속되어 있는 회사가 있어서 그쪽에서 연락이 와요. 요즘은 분당 아파트 단지에 가서 일하고 있어요. 일당으로 쳐서 월급을 받으니까 고정적인 수입이 되지 않아요. 퇴직금도 없지요. 그것도 월급이라고 뭐 빠지고 뭐 빠지고, 또 저축까지 하고 나면 겨우‥‥‥
광병이가 혼자 잘 있기만 해도, 내가 하나라도 젊을 때 돈이라도 벌었으면 싶은데, 어떡해요? 앞으로 광병이의 남은 생활도 부모인 내가 책임을 져야 되죠. 누가 해 주겠어요? 그런 걸 생각해서라도 내가 벌어야 되는데, 광병이의 학교가 머니까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꼭 차 타는 데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해야 해요. 지 혼자 잘 못 찾아가요. 그렇다고 학교 근처로 이사 갈 수도 없고요. 학교가 동네 근처에 없으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통학 거리가 하루 3시간이 넘게 걸리니까 아이도 지치고요. 서울만 해도 특수학교가 각 구별로 하나만 있어도 정말 좋겠어요. 우리 엄마들 모이면 늘 이런 얘기해요. 자식학교 보내는 것도 쉽게 못 하는 우리여요. 학교가 먼 것은 관두고, 먼 통학거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들어가기도 힘드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막막해요.
광병이가 커갈수록 걱정만 더 태산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 키만 커갔고 제 일도 못 찾고 돌아다니면 남 보기에도 좋지 않잖아요, 나중에 우리 부모가 없을 때 얘네 들은 어떡해요. 그 애들은 어디에 살아요? 누가 돌바줘요? 우리 엄마들은 얘네들의 앞날이 제일 걱정이에요. 당장에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에요. 집에만 처박혀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지들끼리 사는 방법을 생각해야 되지 않아요? 정부에서 어떻게 해주면 좋겠지만 우리 엄마들도 그렇게 하려고 요즘 모임을 갖고 있어요.
광병이가 커갈수록 걱정만 더 태산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 키만 커갔고 제 일도 못 찾고 돌아다니면 남 보기에도 좋지 않잖아요, 나중에 우리 부모가 없을 때 얘네 들은 어떡해요. 그 애들은 어디에 살아요? 누가 돌바줘요? 우리 엄마들은 얘네들의 앞날이 제일 걱정이에요. 당장에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에요.
조금씩이지만 모금도 하구요.
광병인 아직까지도 경기를 해요. 어릴 때보다 지금은 덜한 편이지만. 인상 쓰면서 퍽 쓰러지는 거여요. 금방 깨서 돌아오기는 하지만요.
요즘도 내가 잘못 낳아서 저렇게 됐지, 내 탓이지 하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어요. 솔직히 아직까지 이런 생각하며 울기도 해요. 내가 사는 것은 "앉으나 서나 광병이 생각"이어요. "저 자식, 저 자식"이라는 말이 자꾸만 입에서 나와요.
아는 것도 없고, 부족한 엄마이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가르쳐야죠. 그럼 하나씩 깨쳐가는 것이 있겄죠.
(놀러 나갔던 광병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서 와, 어디 갔다 왔어, 손 좀 봐."
저렇게 늦게 오고 흙 묻혀오고 그러면 야단쳐야 되는데 이렇게 들어올 줄 안다는 게 신기해요. 기특하기도 하구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야단칠 수가 없어요. 내겐 가장 소중한 자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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