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꿈꾸는 책방이 현실이 되다 - ‘책방 꼬마’
417호 함께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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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작은 책방에 신발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먼저 도착한 어린이는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펼쳤다. 그 사이 책방지기 주토토씨는 평소 자리를 차지하던 책장과 책상을 옮기고 의자를 놓았다. 벽 쪽에는 빔프로젝터 화면이 켜졌다. 누군가 말을 하자 화면에 문장이 자막으로 나타났다. 약 8평의 그림책방이 이날 저녁만큼은 하나의 북토크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림책 작가 소복이와 함께하는 책방 꼬마(KOMA)의 첫 북토크가 곧 시작될 참이었다.
지난 6월 27일 문을 연 꼬마(KOMA)는 약 8평의 어린이 그림책방이다. KOMA는 ‘Kids Of Meaningful Archive’의 약자로, 그림책 작가 윤나리와 아동권리 활동가이자 책방지기인 주토토가 함께 운영한다. 책방을 만들기 전 두 사람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율 어린이를 포함한 장애 어린이 5명과 비장애 어린이 5명, 모두 열 명에게 자신이 가고 싶은 동네 책방을 자문했다. 지금 책방의 바닥과 책장, 창문과 여러 접근성 장치에는 그때 들었던 어린이들의 말이 남아있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문을 연 뒤 어린이들이 공간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새로 생겼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신발을 벗고 바닥에 눕거나 아무 곳에나 앉아 책을 읽고, 어른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책장 뒤의 좁은 공간도 찾아낸다. 책방 안의 나무 경사로에서는 미끄럼틀을 타듯 놀기도 한다.
“어린이들이 그냥 아무 데나 철퍼덕 앉아서 책을 봐요. 저 경사로도 미끄럼틀 같은 느낌이 있어서 놀고요.”

▲북토크를 앞두고 책방 안의 이동식 책장을 옮기는 주토토 책방지기. 작은 공간은 필요에 따라 책방이 되기도, 행사장이 되기도 한다.
문 하나를 넓히면서 시작된 질문
처음부터 지금 같은 책방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꼬마가 들어선 곳은 원래 윤나리 작가의 작업실 ‘스튜디오 포카’였다. 두 사람이 이곳을 그림책방으로 바꾸기로 했을 때부터 점자책이나 AAC 같은 구체적인 접근성 장치를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다. 시작은 오래된 건물의 좁은 출입문이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건 없었어요. 다만 하나 시작하고 싶었던 건 저 문이었어요.”
평소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오가던 문이 책방이 된다고 생각하자 다르게 보였다. 휠체어도 들어올 수 있을까, 전동휠체어라면 어떨까. 고민을 구체적으로 만든 것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율 어린이와 나눈 이야기였다.
주토토 책방지기에 따르면 지율 어린이는 대형 서점에는 가봤지만 동네의 작은 책방에는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가족이 책을 사러 들어간 동안 자신은 휠체어를 탄 채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동네에 책방이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들어가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꼬마는 전동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문을 크게 냈다. 출입구에는 사회적협동조합 ‘오늘의행동’과 함께 전국 20팀이 보내온 약 1만 개의 레고 브릭으로 경사로도 만들었다. 그러나 문을 넓히자 질문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 휠체어가 들어온 다음에는 어디서 책을 볼지, 시각장애 어린이는 어떻게 공간을 알 수 있을지, 말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어린이가 오면 어떻게 대화를 나눌지도 생각해야 했다.
▲약 1만 개의 레고 브릭으로 만든 책방 입구 경사로. 휠체어와 유아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됐다.
장애·비장애 어린이와 함께 책방을 설계하다
공사를 앞두고 모인 자문위원은 장애 어린이 5명과 비장애 어린이 5명. 열 명은 유니버설디자인에 대해 함께 알아본뒤 ‘내가 바라는 동네 책방’을 그림으로 그렸다. 정해진 시설 목록에서 필요한 것을 고르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책방의 모습을 자유롭게 그리고, 왜 그런 공간을 원하는지 설명했다.
열 장의 그림에는 저마다 다른 책방이 있었다. 지율 어린이가 그린 ‘낭만 책방’은 꽃이 그려진 둥근 전등으로 옮겨졌다. 하성 어린이가 그린 커다랗고 네모난 창문은 골목을 향해 열린 책방의 얼굴이 됐다. 선율 어린이가 바랐던 ‘모두가 편안한 책방’은 신발을 벗고 러그에 앉거나 누워 책을 읽는 바닥 공간으로 이어졌다.

▲책방 내에 전시된 어린이 자문위원 10명이 그린 ‘내가 바라는 동네 책방’
다율 어린이가 그린 ‘조용한 책방’에는 문을 열면 책이 나오는 책장이 있었다. 이 그림은 책을 안에 넣어두었다가 문을 열어 꺼내는 사물함 형태의 책장으로 만들어졌다. 나우 어린이의 그림에서는 어린이 키에 맞춘 책장과 책상이 나왔다.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라 어린이가 직접 책을 보고 고를 수 있는 높이였다.
다양한 어린이가 책방을 이용하기 위한 아이디어도 그림 속에 함께 있었다. ‘유니콘 아이스크림’이라는 닉네임으로 참여한 어린이의 그림은 점자책과 촉각책을 두는 자리로 이어졌다. 윤나리 작가는 책방의 모습을 손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촉각 안내지도도 만들었다. 한결 어린이의 그림에서 나온 생각은 그림카드와 글로 뜻을 전할 수 있는 디지털 AAC로 연결됐다. 연서 어린이가 그린 인형 창고는 책방 곳곳에 놓인 포근한 인형이 됐고, 윤슬 어린이가 그린 경사로는 휠체어와 유아차가 들어올 수 있는 입구를 만드는 데 반영됐다. 어린이들의 그림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두 책방지기는 어린이가 무엇을 그렸는지만 보지 않고 왜 그런 모습을 원했는지 다시 물었다. 그림에 담긴 이유를 듣고, 설계자와 함께 약 8평의 공간에서 실제로 구현할 방법을 찾았다. 어린이의 의견이 장식으로 남지 않고 창문과 전등, 책장과 바닥, 책과 의사소통 방식으로 옮겨진 과정이었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자신들이 잘한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의견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가 내놓은 의견도 책방 안에서 서로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낮은 책장과 바닥, 넓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누구나 함께 사용했고, 어린이들은 완성된 공간도 어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출입문 유리에 그려진 휠체어를 탄 어린이와 ‘인공와우’를 착용 하고 달리는 어린이. ‘모든 어린이를 환영하는 그림책방’이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다.
경사로를 지나서도 남아 있는 접근성
책방의 출입문 유리에는 휠체어를 탄 어린이와 달리는 어린이의 그림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아래에는 레고 브릭으로 만든 경사로가 놓여 있다. 문을 넓히고 경사로를 만든 변화가 책방 입구에서부터 보인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출입문과 경사로 같은 물리적 장치만으로 접근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모든 시설과 기술이 완벽하진 않아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지금 바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가 안 통하더라도 핸드폰을 꺼내서 타이핑하거나 글씨를 써서 대화를 나누면 되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대화는 할 수 있는 거고요. 중요한 건 상대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 같아요.”
자문위원의 그림에서 출발한 디지털AAC(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보완대체 의사소통)는 말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기 어려운 어린이와 직접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가 됐다. 그림카드와 글 입력 등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도록 책방에서 디지털 AAC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8월 22일 열린 꼬마의 첫 북토크. 소복이 작가, 주토토 책방지기 가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책방꼬마)
8월 22일 첫 북토크를 준비하면서는 새로운 실험도 시작됐다. 책방지기들은 참가자의 말을 실시간으로 글자로 바꿔 화면에 보여주는 자막을 준비했다. 행사 전부터 마이크에 말을 해보고, 벽에 띄운 자막이 잘 보이는지 화면 크기를 조정하며 작동 상태를 확인했다. 평소 책과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의자가 놓이고, 한쪽 벽에는 빔프로젝터 화면이 펼쳐졌다.
북토크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말이 화면 위에 문장으로 따라붙었다. 어린이들은 자기 목소리까지 글자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오, 신기하다”, “이 말도 들어가네”라며 일부러 여러 말을 해보기도 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북토크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준비한 자막이 어린이에게는 이전에 몰랐던 의사소통 방법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장면이 된 것이다. 책방을 만들 때 어린이의 의견을 반영할 방법을 고민했다면, 문을 연 뒤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프로그램에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지를 다시 시험하고 있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곳도 보인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책방 뒤편 외부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야 하고, 화장실 문 바로 앞에는 턱이 있어 휠체어 이용자가 편하게 접근하기 어렵다. 주토토 책방지기도 책을 사고 잠시 머물 때와 달리 북토크처럼 오랜 시간 책방을 이용할 때는 화장실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현재는 이동식 경사로를 이용해 안내하고 있지만 개선이필요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촉각 안내지도가 마련돼 있지만 점자·촉각 정보도 책방 전체에 갖춰진 것은 아니다.
책방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동네로
책방을 연 뒤 예상과 달랐던 점도 있었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가까운 지역의 어린이가 많이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초반에는 오히려 SNS에서 꼬마의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이 영종도나 더 먼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경우가 눈에 띄었다고 했다.
지역과의 접점은 조금씩 늘고 있다. 최근 인근 아동돌봄시설의 어린이들이 책방을 찾았고, 주토토 책방지기 역시 조만간 시설을 찾아가 어린이들을 만날 계획이다. 책방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린이가 있는 곳으로 관계를 넓혀가는 것이다.
사실 홍제동에서 어린이를 환영하는 일은 책방보다 먼저 시작됐다. 윤나리 작가는 2022년 어린이를 환영한다는 의미의 ‘키즈존’ 포스터를 직접 만들어 홍제동과 홍은동의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나눴다.
책방이 생기자 새로운 사람들도 찾아왔다. 서대문구의 지역 이야기를 전하는 SNS 운영자를 통해 청년 봉사모임과 연결됐고, 홍제동 상점들을 잇는 바자회를 준비하던 사람도 꼬마와 함께할 방법을 제안했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자신들이 무언가 해보겠다고 나서자 “그럼 같이 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모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책방의 공간과 운영에 대해 인터뷰 중인 주토토 책방지기
많은 어린이가 오래 머무는 책방이 되기 위해
사람을 환영하려면 우선 책방의 문을 계속 열 수 있어야 한다. 꼬마가 문을 연 뒤 마주한 또 하나의 현실은 작은 동네책방의 ‘지속성’이었다. 주토토 책방지기는 예상보다 책이 많이 팔렸지만 정산을 해보니 실제 순이익은 생각보다 적었다고 말했다. 책 판매만으로 이 공간과 프로그램을 유지하면서 계속 독자를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단계다.
사회적기업 창업지원사업에 선정돼 받은 지원은 새로운 활동을 시도하는 계기가 됐다. 오는 11월에는 홍제동에서 어린이 축제를 열 계획이다. 축제를 준비할 때도 “어떤 친구가 못 오지?, 어떤 친구가 오면 무엇이 불편하지?”를 먼저 생각한다고 주토토 책방지기는 말했다.
현재 준비 중인 ‘제1회 꼬마 그림책상’에서도 같은 방향이 이어진다. 본선에 오른 그림책은 점자와 음성해설을 더한 형태로 만들어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가 같은 작품을 읽고 심사에 참여하도록 할 예정이다. 11월에는 홍제천 유진상가 하부에 조성된 문화예술공간 ‘홍제유연’에서 어린이 축제가 열리고, 이곳에서 이어진다.
지원금은 축제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됐지만, 책방 자체를 어떻게 오래 유지할 것인지는 여전히 두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다. 동시에 축제를 준비하면서 책방 주변에는 도움을 보태겠다는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다.
“저희는 정말 저 문 하나 바꾸려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주토토 책방지기의 말처럼 출발은 문 하나였다. 그 문을 넓히면서 어린이 열 명의 이야기를 들었고, 창문과 전등, 책장과 바닥, 그림과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졌다. 책방을 연 뒤에는 화장실처럼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발견했고, 가까운 지역의 어린이를 만나기 위해 책방 밖으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소중한 공간을 지속할 방법을 고민하고, 동네 사람들과 어린이 축제도 준비하고 있다.
출입문을 넓히는 공사는 끝났지만 책방 꼬마가 완성됐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새로운 어린이가 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불편과 바람을 말할 때마다 이 여덟 평의 책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작성자글과 사진. 박수찬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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