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을 이끌었던 좋은 사람들, 바로 ‘당신’입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제 인생을 이끌었던 좋은 사람들, 바로 ‘당신’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김형수

본문

이 지면에 등장하는 이번 호 인물은 낯익은 ‘1인’이다. 누굴까? 지난 <함께걸음>을 펼치면 ‘김형수의 세상보기’라는 꼭지가 눈에 들어오실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다. ‘왜 그 사람인데?’라고 물음표를 붙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음 호 인물로 섭외해야지.’ 했던 게 몇 년이나 흘러갔기에, 이번만큼은 제대로 마주앉자고 다짐했을 뿐이다.

이렇게 깔끔한 복장은 처음 봤다 하니까, 오후에 강의가 있어서 강의용으로 입은 거란다. 그래도 <함께걸음>을 의식한 건 아니냐고 다시 물으니까, “제가 아는 분들이 가장 많이 보는 월간지인데….”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표지로 나갈 수도 있다 하니까, 그건 진짜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건 편집부 마음(?)이라 하니까, 정말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 글의 끝에도 언급할 내용이지만 언론에 드러나지 않는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다는데, 그 계획이 수립되자마자 완전히 틀어지는 모양새가 된 듯하다. 하지만 편집부 마음이 우선(?)이니, 이 대목에선 어쩔 수 없다는 양해를 먼저 구해야 할 것 같다. 젊은 장애학생들의 권익 확보와 인권 보장을 위한 발자취를 또렷이 남기고 있는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의 김형수 사무국장이 이번 호 주인공이다. 그의 다양한 활동은 많은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함께걸음>은 그의 개인사(史) 중심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아홉 번의 ‘No!’

김형수 씨는 뇌병변장애 2급이고, 태어날 때 좀 빨리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단다. 칠삭둥이에다 다리가 먼저 나와 목이 걸리는 바람에, 숨을 잠시 쉬지 못하는 산소결핍의 상황을 맞이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뇌수막염 등에 걸려서 뇌병변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 같은 게 아니라, 그는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비장애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돌잔치 전에 동네 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그 의사선생님이 뇌성마비 같다면서 어서 큰 병원에 가보라 하셨대요. 그 의사선생님이 정말로 고마운 거죠. 당시에는 돌 이전의 아기 증상을 발견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으니까 열심히 치료 받으면 좋아질 거라 하셨다니 아주 정확하게 진단을 하셨던 거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저의 장애증상을 굉장히 빨리 발견하게 됐고, 처음 대면했던 그 선생님이 제대로 판단했기 때문에 가족이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웠대요. 의학적으로는 매우 중한 장애가 맞지만, 외면적으로는 안면장애나 언어장애가 거의 없게 된 건 처음의 그 의사선생님 덕분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거든요.”

 참 고마운 분이라는 언급이 몇 차례나 이어졌다. 흑백TV 시절이었던 1970년대 중반의 동네 의원에서 단순한 감기 같은 증상으로만 치부했다면, 정말 그랬다면 나중에 더 심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남들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 내지 실감은 언제 처음 갖게 됐을까?

 “한 서너 살 때부터 그랬을 거예요. 여러 가지 신체적인 조건이 안 맞았으니까요. ‘왜 안 걸어질까?’ 또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왜 안쓰럽게 여길까?’ 하는 의문점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저의 집안은 장애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편이었어요. ‘얘가 장애가 있어서 그래요.’ 하며,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드러내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특히 어머님이 그러셨죠. 그래서 제가 살면서 ‘내가 왜 장애로 태어났을까? 이건 억울하다.’ 하는 생각은 사춘기 시절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과 하나뿐인 형이 막내의 장애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은 귀 기울일 만한 대목 같았다. 그게 죄악시되거나 숨겨야 할 상황이라는 인식을 아예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 내가 좀 특이하구나.’ 하는 점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장애를 의식적으로는 느끼지 못했다는 김형수 씨의 고백 또한 같은 의미가 된다.

“대외적인 경험을 쌓고 자극을 받아야 했으니까, 어렵게 어렵게 섭외를 해서 미술학원과 유치원을 같이 운영하는 곳에 들어갔어요. 유치원은 안 다니고 미술학원에서 그림 그리는 것만 열심히 했죠. 그런데 초등학교 취학통지서가 안 나오는 거예요. 형이 있으니까 어느 시점에 나온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관청 쪽에선 제가 당연히 유예되고 일반학교에 배정이 안 될 줄 알았는지 발급 자체를 안 한 거예요. 어머니가 달려가셔서 크게 항의를 한 뒤에야 발급이 됐죠. 그런데 아홉 군데 정도의 초등학교에서 거부를 당했대요. 그것도 이미 예상했던 시나리오였긴 했지만요.”

   
 

아, 내 편이 있구나!

그런데 참으로 믿겨지지 않는 반전이 뒤따른다. 부산에서 재벌 집안 자식들만 들어간다던,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하다는 아주 유명한 사립초등학교에 어머님의 선배가 있어서 문의를 한번 해봤단다. ‘이러이러해서 우리 아이가 입학을 못하고 있다’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짧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뭐 그런 걸 묻나? 데리고 오소.’ - 그런데 지금의 통념으로 따진다 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렇게 속칭 ‘잘난’ 집안의 자식들만 다닌다던 학교의 선생님들이 ‘장애’에 대해선 아주 올바르고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학부모들의 반대가 심했대요. 장애아동하고 같이 교육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는데, 저의 담임선생님이 딱 한마디로 모든 걸 다 막아버렸대요. ‘그럼 나도 안 맡는다. 이 반 전체를 안 맡겠다!’ 이런 교육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분이셨대요. 학교 선생님들은 제가 다른 아이들 속에서 소외될까 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주셨죠.”

이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도,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고 김형수 씨한테 얘기했다. 국공립 초등학교도 아닌 부유층 위주의 사립초등학교라 했는데, 어떻게 그런 교육철학을 확고하게 간직한 선생님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셨단다.

“저는 즐거웠어요. 한 학년의 학생 인원수도 적었고, 선생님들도 다 알며 지냈으니까요. 그런데 신체구조가 활발하게 성장하다 보니까 저학년 때까지는 무용이나 체육 같은 걸 따라했는데,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격차가 벌어지면서 뭔가를 따라하려 하면 계속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툭툭 치면 그냥 넘어져버리고…, 물리적으로 한계가 왔던 것이죠. 그래서 뒤로 물러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렇게 비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뭐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됐어요. 저의 그런 고민을 함께 공유했던 선생님들의 선택은 제게 책을 추천해 주신 거였죠.”

워낙 독후감을 많이 쓰게 하는 학교였다니, 요즘의 의미로는 ‘참교육’을 실천하는 보기 드문 초등학교였던 것 같다. 선생님들마다 꼭 읽어야 할 책들을 골라 그에게 추천해 주셨단다. 그 양이 점점 엄청나게 늘어났고, 김형수 학생 역시 거기에 맞게 가속도가 붙다 보니 완전히 독서 하나에 빠져 살게 됐다고 한다. 그런 왕성한 독서가 중고교 시절까지 이어지면서 사춘기를 별다른 위험 없이 넘기는 계기를 만들어 줬는데, 결과적으로는 그의 대학 전공까지 국문학과로 결정되는 초석이 되었다 하니, 그 선생님들과의 인연은 단순히 간과하며 넘길 대목이 아닌 듯했다.

“특별한 인권교육을 하셨다기보다는, 저한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던 것 같아요. 왜 비장애 학생들이 놀리는 건지, 그게 정말 장애가 궁금해서 놀리는 것일 수도 있고 나쁜 마음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거, 그런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는 점을 구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어요. 저의 정체성이나 존중감에 대해 많이 얘기해 주신 편이어서, 그때 저는 친구들이 놀리는 것보다 ‘아, 내 편이 있구나!’ 하는 기쁨을 간직하게 됐죠. 그때 생존기술을 거의 다 배웠던 것 같아요. 혼자 화장실 가고 자립하는 방법들을 알게 됐죠. 초등학교 6년 동안 공부한 건 책 읽고 글씨 쓰기 연습한 것밖에 없지만, 정말 세심하게 배려해 주셨던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 같아요.”

   
 

그 한 명을 잡아라!

듣는 동안에도 몇 차례나 감탄사가 이어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 당시에 그런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건, 사실 아홉 차례나 ‘퇴짜’ 받아야 했다던 그 이전의 여러 초등학교에선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들께서 친절했다기보다는 저를 괴롭히셨어요. 모두를 똑같이 대해 주려고 한다는 건 결과적으론 저를 괴롭힌 거죠. 예를 든다면 체육시간에 나가 있으면 이런 걸 설명해 주셨어요. ‘네가 체육시간에 체육을 못하니까 가만히 있는 건 좋은데, 너만 뽀송뽀송하게 있으면 다들 땀 흘리고 들어오는 다른 친구들은 억울할 게 아니냐. 그 억울함으로 너를 괴롭힐지 모르니까, 너 또한 칠판을 지운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하면서 뽀송뽀송하게 있지 마라. 뭐든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조언들을 굉장히 많이 알려 주셨거든요. 비장애 학생들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방법들을 정말 많이 말씀해 주셨어요. 특히 선생님한테 ‘애들이 저를 놀려요.’ 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위로해 주는 게 가능하지만, 어느 수준부터는 이게 고자질이 된다는 점을 제가 인지하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함께하려는 노력 이전에 고발부터 한다는 건 비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한테 일깨워 주셨던 거죠.”

친구들이 친해지고 싶어서 시비를 거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는 ‘왜 장애를 갖게 됐는지를 설명해 주라.’고 하셨고, 장애인이라고 놀리면 ‘그것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구하라 하셨단다. 그리고 이렇게 강조하셨다고 한다. ‘열 명을 만나면 아홉 명은 너를 놀릴 수가 있어. 하지만 한두 명 정도는 너를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 친구만 붙잡으면 돼. 나머지 아홉 명을 기억하지 말고.’

   
 

다르게 보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매번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물고기를 낚는, 다시 말해 낚시하는 법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일이다. 장애를 이유로 한 놀림과 폭행과 따돌림 같은 건 분명 존재했겠지만, 그런 환경을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을 올바르게 체득한다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초등학교 당시 선생님들의 교육방식은 지금도 본받을 점이 많다는 실감을 가려두긴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취학통지서가 나오기 전에, 어머니께서 서울의 어느 유명 재활학교를 자세히 들여다보셨나 봐요. 거기에 저를 넣을까 말까 깊게 고민하셨다는 거죠. 가장 유명한 곳이었기에 고민을 반복하시다가, 결국 그냥 돌아섰다 하셨어요. ‘이 정도면 내가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면 일반학교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재활학교에 대한 기대를 접으셨다는 거죠. 어머니 생각에는 아들을 넣기엔 너무 열악했대요.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학교가 아니라 시설이었던 거죠. 게다가 아들을 품에서 떼어내야 하잖아요. 그래서 돌아섰다고 하셨는데, 그때 만약 거기를 들어갔더라면 제 인생도 진짜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렇다면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미래, 꿈, 직업 같은 걸 처음 그려본 건 언제였을까? 중학교 1학년 때였단다. 선생님이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패러디해 마찬가지 수필 형식으로 적어오라 숙제를 내셨다고 한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와 독후감에 단단히 단련됐던 그가 아닌가. 중학교 초기라서 ‘쟤는 뭐야?’ 하며 급우들의 시선이 엄한 분위기였을 때였는데, 나름 열심히 쓴 글이 선생님의 눈에 확 띄었던 모양이다.

“담임선생님이 일어나 보래요.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해주시는 거예요. ‘너, 글 쓰는 데 소질이 있다.’ 그런 직접적인 칭찬을 받으니까 국어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됐죠. 사춘기 시절이니까 여자 분이셨던 그 선생님을 무척 좋아하면서 국어에 몰입했어요. 선생님도 놀라실 만큼 연거푸 만점을 받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국어 하나는 제가 지배를 하게 됐죠. 저를 괴롭히던 애들도 국어에 관해 모르는 걸 물어보려면 저한테 고개를 숙여야 하잖아요. 그런 확실하고도 유일한 무기(능력)가 생기고 나니까, 생활하는 데 많은 심적인 여유를 갖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장래희망은 ‘작가’로 결정됐는데, 중3 때부터 현실적인 고민 하나가 새롭게 그를 괴롭혔단다. 불편한 손으로 그 수많은 원고지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그런데 고1이 됐을 때 같은 학교 3학년이었던 형이 그의 고민을 듣게 됐고, 그 고민을 알게 된 형의 담임선생님이 김형수 학생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어이, 총각. 뭘 고민하시나. 네가 대학 갈 때는 컴퓨터로 글을 쓸 거야. 뭘 걱정해. 컴퓨터로 다 쓰면 되는데.’ 그래서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어, 그래요?’ 하며 희망의 불씨를 얻게 됐다고 한다.

“그 선생님이 또 웃으며 말씀하셨죠. ‘야, 글 쓰는 건 꼭 소설만 쓰는 게 아니야. 네가 대하소설을 쓸 필요는 없잖아. 시(詩)도 있어. 시 한 줄만 잘 써도 노벨문학상 받을 수 있어.’ 이런 얘기를 지나가는 농담처럼 하셨는데, 제게는 그게 ‘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큰 발상의 전환이 됐죠. 제 인생에는 장애가 끊임없는 열등감과 콤플렉스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와 자극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보고 가출도 하면서 여러 가지 방황과 갈등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좋은 친구 한두 명이 제 곁에 존재했어요. ‘야, 인생은 다 그런 거야. 나도 힘들어. 너는 그래도 이런 부분은 괜찮잖아. 나는 다른 게 힘들어.’ 그런 고민을 듣게 되면, ‘어, 내 몸 상태가 크게 심각한 건 아니구나. 더 심각한 것도 있구나.’ 하며 제 생각의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됐죠. 제가 힘들 때마다 그런 좋은 자극이 되는 친구들이 한두 명은 꼭 있었고, 그런 이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소중한 디딤목이 됐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 고마운 인연들

국어 과목은 최고라고 했지만, 사춘기 시절의 방황 때문에 그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공부는 안 하고 책에만 빠져 있었단다. 하고 싶다 했던 인문학 전공의 꿈은 사라지는가 싶었을 때, 학생 김형수한테는 엄청난 세상의 변화가 찾아든다. 대입제도가 학력고사에서 수학능력시험(수능)으로 바뀐 것이다. 학력고사라면 대학 문턱에도 못 갔을 텐데, 수능이라는 건 언어능력과 독해능력으로 모든 걸 평가하는 시스템이었기에, 말 그대로 ‘김형수의 시대’가 찾아든 셈이었다고 한다.

“고교 1학년 2학기 때 제도가 바뀌었어요. 다른 애들은 ‘이게 뭔 얘기야? 이게 무슨 우리말이야?’ 하며 갈팡질팡하는데, 저는 저의 그 수많은 독서와 영화 감상 이런 모든 게 다 수능의 영역 안에 있는 거잖아요. 언어능력과 수리탐구 모두 다 독해능력을 따지는 거니까, 전교 꼴찌에 가까웠던 놈이 갑자기 전교 5등 6등, 이렇게 치고 올라가게 된 거예요.”

아주 아깝게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게 됐는데, 엄청난 소식 하나가 또다시 그를 찾아들었단다. 장애인특별전형제도가 생긴다는 게 아닌가. 그 제도가 없었을 때는 바라보지 않았던 아니, 바라보지도 못했던 더 넓은 세상이 갑자기 그의 앞에 활짝 펼쳐졌단다. 재수하는 동안 김형수 씨는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고, 상위 2등급의 성적으로 당당하게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건 ‘편의시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의 캠퍼스 환경이었다. 장애를 바라보는 비장애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고, 22명의 장애인특별전형 입학생들은 기본적인 경사로조차 없는 건물 구조 앞에서 힘겨운 대학생활을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2학년 때부터 김형수 씨는 세상 속으로 직접 발을 담그기 시작했단다. 장애학우들을 위한 동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 봉사와 도움을 받는 동아리가 아니라 학교 구조물을 부수는(편의시설을 만드는) 동아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연세대학교 게르니카(Guernika)이다. 동정과 시혜가 아닌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장애학우들의 운동 중심점으로, ‘게르니카’라는 동아리가 그의 뜻과 함께하는 학우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열 명을 만나면 아홉 명은 저를 실망시켰지만, 꼭 필요한 시점에 꼭 필요한 좋은 사람 한두 명을 항상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죠. ‘내가 이렇게 서명운동을 하면, 외롭기는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서도 김밥 한줄 사오는 학우들, 맥주 캔 몇 개 사들고 오는 학우들, 그런 감동의 물결 같은 뭔가가 늘 함께했어요. 그런 가운데 기존에 갖고 있던 상처들이 많이 아물었죠. 지난 시절 동안 소외당했던 것들에 대한 상처들이 하나씩 치유가 됐던 거예요.”

게르니카 이후의 ‘인간 김형수’의 사회 활동은, 이 지면보다는 인터넷 검색이 더 빠르고 훨씬 더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 끝에 밝혔듯이 이번 만남은 그의 개인사(史)에 한정지으며 정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돌 이전의 그 동네 의원 의사선생님부터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 항상 한두 명의 좋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함께했다는 것, 그건 ‘그에게 인복(人福)이 있는가 보다’ 치부하며 단순히 넘길 일은 아니다. ‘인복’은 뭔가를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한테 찾아들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달라붙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40대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지난 20대의 기억을 정리하며 재정립하고 싶다는 김형수 씨. 요즘 개인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은 ‘조용히 살기, 드러내지 않기’라고 한다. ‘인간극장’ 같은 데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는 게 인생의 목표이고 정말로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다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함께걸음>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게 되었다. 모든 대화를 마친 뒤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표지로 나가는 거예요? 다른 걸로 어떻게 안 되나요? 아이, 이것 참….”  

 

작성자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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