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제약을 하나씩 타파할 때마다 생긴 자긍심, 삶의 원동력이 되다
사람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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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권리와 복지에 힘써온 그의 여정
지난 4월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국민훈장을 받은 조창영 변호사는 장애인복지와 관련된 제도와 인식이 준비되지 않았던 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장애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문화와 제도를 바꾸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1980년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설립에 참여해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관점에서 권리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한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설립에도 함께해 장애인의 문화예술 참여권 확대에 기여한 바 있다. 또 장애인 인권센터를 설립해 장애와 관련된 수많은 공익소송을 진행하며 장애에 관한 전체적인 제도와 사회 문화를 바꿔 나갔다.
나의 장애가 주변의 장애를 보게 했다
조 변호사는 성인이 되기 전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된 중도 장애인이다. 학창 시절에는 당시 공부 잘하는 사람만 갈 수 있다던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니며 서울대학교 입시반에 있었을 만큼 이른바 ‘우등생’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과속하던 차에 치여 지체장애인(당시 2급)이 되었다. 그때부터 거동에 불편이 생겼다.
“그전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걸 지상과제로 삼으며 살았죠. 장애 이쪽은 생각도 안 하고 인식조차도 없었고. 그러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평소처럼 있는데 예전에는 안 보였던 장애인들이 주변에 자꾸 보이는 거예요. 시각장애인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어떤 불편함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장애인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죠.”
장애가 생긴 후 또 다른 시각이 열린 조 변호사. 어느날 생겨난 관심이었지만 조 변호사는 그 작은 관심이 차별에 앞장서서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조 변호사는 자신이 겪은 차별의 경험과 주변에서 보이는 문제들을 못 본채 지나치지 않았다. 해결책을 제시하고 때로는 싸워가며 조금씩 사회를 바꿔갔다.
하나씩 바뀌는 문화와 제도가 그를 움직이게 만들다
“인권센터 원장으로 있을 때 장애를 이유로 대학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들에 대해선 아주 진짜 엄청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요. 당시에는 장애를 이유로 불합격 조치하면 안 된다는 게 훈시 규정으로 되어 있어 처벌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처벌 가능한 조항으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도 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5~6년 뒤에는 입시에 관한 차별이 거의 없어졌어요. 또 여성 지적장애인을 성폭행한 사건에 우리가 승소했을 당시엔 전국적으로 크게 공론화가 되면서 장애인의 인권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한층 높아졌어요. 작은 케이스, 과정일지라도 장애인의 권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 장애인인권센터의 개원을 알리는 기사 지면. 뒷 줄 오른쪽에 조창영 변호사가 있다.
조 변호사가 장애인의 대학 입시에 적극 대응한 것은 그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허리를 숙이는 것이 어려웠던 조 변호사에게 대학 면접관은 다른 학생과는 달리 ‘앉아, 일어나’를 그에게만 시켰다. 면접 과정에서 조 변호사는 심한 모멸감과 좌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경험에 기초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조 변호사의 활동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설립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소송 등을 통해 장애인 관련 제도를 변화하는 데 앞장섰고 재판에서 승소하면 그 사례가 법 개정에 근거가 되기에 더욱 신경 썼다.
사실 장애인 인권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조 변호사도 사고 당시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장애인이 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녔어요. 고등학교 졸업식 때 병원에 있었으니까 친구들은 내가 장애인이 됐다는 걸 몰랐거든요. 몇 년 동안은 몸은 불편하지만 머리로는 부정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어서 거울도 안 보고 살았고요.”
대학 진학 과정에서 겪은 차별과 불편한 시선, 증명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다
지금은 변호사가 아닌 조창영을 상상하긴 어렵다. 그런 조창영 변호사가 법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고 한다. 본래 수학을 좋아해 약대에 지원, 약사가 되는 꿈을 꾸었던 조 변호사는 입시 과정에서 차별을 겪으며 진로를 전환하게 되었다. 학교 측이 법대 진학을 제안하면서 진로를 바꾸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과생이었던 조 변호사가 문과로 전향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오랜 기간 이과적 사고방식에 익숙했던 조 변호사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낯선 문과적 사고방식으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또 법대 진학 후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상황이었다.
“(법대) 2학년 되니까 법학 논리를 구성하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게 이과적인 부분과 비슷했어요. 이과생이었던 저에게는 정말 다행이었지요. 그래서 사법시험에 합격해야겠다는 큰 목표도 세울 수 있었죠. 사법시험에 꼭 합격해서 세상에 다시 나를 보이겠다는 오기도 생겼죠. 좌절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가는 데 있어 그 사고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에서 ‘장애’는
“40년 전보다 여러 방면에서 좋아졌다는 걸 체감해요. 특히 인식 부분에서요. 옛날에는 장애인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식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리고 복지 정책의 이름으로 나가는 지원들이 장애인으로서 이 나라에 버림받지 않았다는 걸 체감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요.”
조 변호사는 그동안의 활동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제도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더불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 필요한 것은 장애계 내에서도 소외되는 중증장애인과 지적장애인에 대한 연구와 그에 맞는 지원이라고 덧붙였다.
인간 ‘조창영’으로서의 앞으로, 장애계를 돕는 울타리가 되고 싶다
“처음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장애인이라고 해서 남들에 뒤처지는 변호사는 되지 않겠다는 거랑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5% 안에 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봤을 때 두 가지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후회는 전혀 없어요. 장애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여한 없이 꿈을 펼친 삶을 산 것 같아요.”라고 그동안의 소회를 밝힌 조 변호사.
그는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이제는 나이도 많고 에너지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아서..(웃음). 주체가 되기보다 울타리가 되어 지지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장애 운동의 뒤를 이을 인재를 찾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라며 장애계 울타리를 자처해 나서겠다고 밝혔다.
장애인의 권리와 복지 증진을 위해 40년간 멈추지 않고 달려온 조창영 변호사, 울타리가 되어 든든히 곁을 지킬 조 변호사의 활동은 계속된다.
△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조창영 변호사
작성자글. 동기욱 기자 / 사진제공. 조창영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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