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 입에서, 특히 젊은 연령층에서 ‘존재감’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존재’라는 철학적 주제가 아닌 ‘존재감’이라는 합성 용어는 아직 저에게 낯섭니다. 정여울씨와 같은 문학평론가는 ‘존재감’이 ‘존재’보다 더 중요한 용어로 쓰이는 기이한 사회현상을 비판합니다. 심지어는 이제 ‘미친 존재감’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합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학벌과 실력을 갖추고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청년실업 세대들, 굳이 언급하자면, 88만원 세대를 중심으로 그들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는 기성세대들에 대한 조롱과 반발로써 ‘존재감’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라는 얘기지요. 뒤집어 보면, 기성세대는 ‘존재감’이 큰 사람이지만, ‘존재’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어렵게 공부하고,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았지만, 빚진 등록금 갚기도 어렵고, 취직은 되지 않으며,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이 없는, 그러나 어느 세대보다 문화의 혜택을 받으며, 아름답게 성장한 서글픈 ‘존재’, 88만원 세대들의 항변이 담긴 ‘존재감’이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일탈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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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소개할 영화와 ‘존재’라는 용어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한 생명체로 살아가며, 성장과 쇠락을 모두 경험한 노년의 삶에 갑자기 스며든 사랑과, 한 평생을 사랑하며 살다가 거대한 질병 앞에서 함께 죽음을 선택한 사랑이 서로 교차되어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한국)’입니다. 스크린에 비치는 존재(?)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하는 노년의 국민 배우, 이순재, 윤소정, 송재호, 김수미, 이들이 모여 영화 한 편을 찍었습니다. 강풀의 원작만화를 ‘사랑을 놓치다(2004, 한국)’의 추창민 감독이 느리지만 진득하게 연출하였습니다. 기존의 강풀 만화의 영상작업과는 달리 원작에 충실하였고, 특히 굽어진 골목길과 희미한 가로등의 배치, 배우들의 대사와 표정들을 세밀하게 스크린에 담았습니다. 크게는 붓으로 그려지는 질감이 영상으로 도드라지는 효과가 느껴질 정도로 로케이션이 정확하였습니다. 놀이터, 고물상, 우유대리점, 동사무소, 윤소정의 집, 이순재의 오토바이, 송재호와 김수미 부부의 집 열쇠에 이르기까지 손에 닿을듯한 촉감을 이 영화는 만들어 냅니다. 순식간에 100만 관객이 모아졌고, 입소문에 의해 영화는 퍼져가고 있습니다. 포탈사이트 다음 영화게시판에서는 1,200여명이 참가해 역대 관객 평점 1위 영화가 되었습니다. 잠시 영화를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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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가부장인 김만석(이순재 분)은 순종적인 아내의 죽음 뒤에 평소 잘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우유배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그의 뒷모습은 강인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새벽길에서 만난 송이뿐(윤소정 분)의 가날픈 모습에 연민이 스며듭니다. 죽은 아내의 존재는 약한 동성의 여성에게 전이됩니다. 늘 그렇듯이 사랑은 아무런 이유없이 시작됩니다. 그녀를 돕기 위해 우유팩을 꾸리고, 고물상에 전달합니다. 송이뿐은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온기로 행복해지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존중받습니다. 평생 처음 단 한 번 소중하게 받아본 생일케이크와 선물. 참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느끼며,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소중함을 깊이 간직하기 위해 그녀는 이제 떠나온 고향집으로 돌아가 남은 삶을 보내려고 합니다. 서로 엇갈린 사랑법이지만 김만석과 송이뿐은 헤어져 있어도 그리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고물상을 통해 알게 된 주차 관리인 장군봉(송재호 분)은 김만석과는 반대로 아내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유순하고 가정적인 남편입니다. 평생 성실하게 택시기사로 일했고, 세 자녀를 모두 출가시켰습니다. 그는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김수미 분)를 돌보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매일 일어나는 일상을 순이에게 도란도란 얘기해주는 군봉과 눈을 깜박이며 나란히 누워있는 순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누더기같은 장판과 천장, 벽이지만 그들의 눈에 별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치매와 암으로 고통받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 소풍을 갑니다. 바닷가에서 만석과 군봉은 평생을 같이 한 친구보다 더 깊은 교감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동반 죽음을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아달라는 군봉의 부탁을 들어주는 만석에게 알 수 없는 분노와 서글픔이 몰아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저는 강은교 시인의 ‘사랑法’을 떠올렸습니다. 사랑法은 우선 ‘떠나는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가 홀로 떠나고 잠드는 시간을 충실하게 바라보고 견디는 것입니다. 영화 속 네 사람의 사랑은 바로 이런 충실함을 전제로 합니다. 어쩌면 사랑은 스스로의 외로움에 일순간 스며드는 ‘존재’의 힘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생명체로서의 존재 증명에 사랑보다 더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모든 이에게 사랑은 생명력을 일으키는 원초적인 꿈입니다. 노년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를 저는 단순히 노인자살의 현실적 문제로 부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만석과 이뿐의 사랑이 아름답듯이, 군봉과 순이의 사랑과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연륜이지만, 노년의 사랑 또한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닫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큰 하늘은 우리의 등 뒤에 있는 법입니다. 건강하세요.
작성자이영문 정신과 전문의, 경기도 광역정신보건센터장 humanishop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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